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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베드로의 실패한 역사가 주는 교훈 (마 26:69-75, 막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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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실패한 역사가 주는 교훈 (마 26:69-75, 막 14:6)

얼마 전 영국에서 열린 명견 선발대회에서 우리나라 진돗개가 수백 마리 명견 가운데 2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우리가 키우다가 강원도 정선에서 잃어버린 진돗개 백호가 생각났습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개를 사랑하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은 개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주인에 대한 충성의 속성 때문일 것입니다. 
고대 희랍의 배우 포러스의 애견은 주인을 화장하는 불속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습니다. 

로마의 폭군 티베리우스에 의해 처형당하고 강물에 던져진 사리너스의 애견은 강물에 뛰어들어 사체를 끌어올리려다 지쳐서 죽었습니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감옥에 갇히자 애견 디스비는 마차를 따라가 밤낮 감옥을 돌며 짖었다고 합니다. 

고려 말 개성 진고개에 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눈먼 고아가 있었는데 그 집의 개 황구가 그 아이에게 꼬리를 잡혀 밥을 빌어 먹이고 먹고 나면 샘으로 가서 물을 먹였습니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황구에게 정삼품 벼슬까지 내렸습니다. 

우면산 산사태가 났을 때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며 고물상을 하던 허경열씨는 산사태 몇 분 전에 자기 집에 기르던 흰 개가 이리저리 뛰는 바람에 잠을 깨어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산이 와르르하고 무너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개가 사람을 살렸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개를 3월 20일 새벽에 TV화면을 통해 보았습니다. 
만취한 주인을 동사冬死에서 구해낸 충견이 있는가 하면 개의 충성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을 비하할 때나 자신을 비하할 때 개를 등장시킵니다. 성경은 속되고 부정적이고 패역한 것을 가리켜 개로 상징했습니다. 아마도 개의 생활습성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 왕 앞에 엎드린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자신을 가리켜 죽은 개 같다고 비하했습니다(삼하 9:8).
하사엘은 엘리사에게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일을 행하겠느냐고 했습니다(왕하 8:13).

원수를 개라고 했습니다(시 22:16; 59:6, 14). 마지막 날에 거룩한 성 밖에 있는 자들을 개로 표현했습니다(계 22:15). 

개처럼 운다고 비유했습니다(시 59:6, 14). 네 영혼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시 22:20)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는 자기 주인을 따르는 동물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베드로는 선을 악으로 갚고 사랑을 배신으로 보답하는 개만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는 일제히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을 상세한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Ⅰ. 첫 번째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입니다. 

마태복음 26장 70절에 『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라고 했습니다(눅 22:57; 막 14:68; 요 18:17). 
요한복음은 1차 부인과 2차와 3차 부인을 나누어서 언급했습니다. 1차 부인은 안나스의 집에서 했고, 2차와 3차 부인은 가야바의 집에서 했습니다. 

1차 부인 당시 베드로가 어떻게 안나스의 집에 가게 되었는지를 사도 요한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안나스의 집으로 가실 때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는 그들의 도망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주님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 들어가자 베드로는 문밖에 멈추어 서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집안으로 들어간 다른 제자는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해서 베드로도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다른 제자는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순히 제자라고만 언급했는데 요한 자신인듯 합니다(요 1:37; 13:23; 21:24).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문 지키는 여자는 이 사람이 누군가를 확인해 보려고 했습니다. 이때 바깥 뜰(마 26:69) 즉, 아랫 뜰(막 14:66)에 앉아 있는 베드로를 발견했습니다. 

이때는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종과 하속들이 뜰 가운데(눅 22:55)에 불을 피우고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에 베드로도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베드로를 보고 주님의 제자임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부인하여 말하기를 『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을 부인한 것은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무서워서라기 보다는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1차 부인의 대가로 앞문까지 나아갔습니다. 여자는 대제사장 집의 비자였습니다. 요한은 이 여자를 여종이라고 했습니다(요 18:17).

이런 여종 앞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데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대군 앞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왕하 19:35).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 베드로는 하찮은 여종 앞에서 주를 부인하므로 자신의 역사에 첫 번째 부끄러움을 남겼습니다. 

Ⅱ. 두 번째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입니다. 

마태복음 26장 72절에 『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막 14:70; 눅 22:58; 요 18:25).
사복음서 기자들은 기록상 서로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장소의 차이입니다. 

사도 요한은 첫 번째 부인은 안나스의 집에서 있었고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은 가야바의 집에서 있었던 것처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가야바의 집 뜰에서(마 26:57) 세 번째 부인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누구의 집인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히 대제사장의 집 뜰 안에서 세 번의 부인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막 14:54).
공관복음의 기자들은 베드로의 부인을 기록하는 데 집중했고, 요한복음은 사건의 진행과정에 더 치중했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 자체에만 무게를 두면서 사건의 장소나 재판 과정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언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장소와 재판과정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2) 인물에 대한 차이입니다.

두 번째 부인을 하도록 유인했던 인물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다른 비자라고 언급했습니다(마 26:70)
마가는 첫 번째 부인을 유도했던 동일한 비자인 듯 기록했습니다(막 14:69). 누가는 다른 사람이라고만 언급했고 요한은 사람들이라고만 언급했습니다(요 18:25).
그렇다면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도 연약한 비자 앞에서 한 것이 분명합니다.

두 번째 부인 때의 상황은 주님에 대한 심문이 본격화 되었을 때입니다. 대적들의 반기독적인 실질적인 심문을 보는 동안 무서운 대세 앞에서 베드로는 그만 나약하게 굴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항상 대세 앞에 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거듭되는 부인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역사에 두 번째 부끄러움을 남겼습니다.


Ⅲ. 세 번째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입니다.

마태복음 26장 74절에 『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고 기록했습니다(막 14:71; 눅 22:60; 요 18:27).
2차 부인이 있은 후 한 시간쯤 지난 후에(눅 22:59) 베드로가 왜 그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 곁에는 대제사장의 종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종은 남자였습니다. 이 종은 베드로에게 귀를 베였던 말고의 일가였습니다(요18:26).
그는 베드로에게 장담하며 말했습니다(눅 22:59). 아마도 그가 자기의 가까운 친척이었던 말고를 상처 낸데 대하여 분노를 표시한 듯합니다.

그는 『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고 했습니다(요 18:26). 『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다 』고 했습니다(눅 22:59).

이 말을 듣고 곁에 섰던 사람들이 『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 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고 했습니다(마 26:73).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고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했습니다.
이 공격을 받은 베드로는 당황하여 대제사장과 종에게 나는 네 말하는 말을 알지 못한다고 주님을 저주하고 자신에게 맹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참으로 자신의 양심을 송두리째 속이는 파렴치한 베드로는 자신의 역사에 세 번째 부끄러움을 남겼습니다.


Ⅳ.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게 된 원인입니다.

1) 사건 전의 원인입니다

(1) 베드로는 자신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을 의지하고 모든 일에 덤벙된 일이 많습니다. 깝친 일이 많습니다. 예컨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자기도 걸으려고 하다가 실패했습니다(마 14:22-33).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시기 전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 26:33)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면 신앙생활은 실패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잠 28:26).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고전 10:12). 

(2) 성령 충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간에는 성령 충만 이전의 베드로의 부인과 오순절 성령 충만 이후에 베드로가 주를 위한 결의에 찬 자세를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기점으로 해서 그에게 나타난 두 가지 면에 신학적인 해석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절에 『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고 기록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기록했습니다.

(3)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마 26:41). 그러나 그는 기도하지 아니했습니다(마 26:40-43).
베드로의 부인에 대해 겟세마네 사건을 복음서 기자들은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실패의 원인은 기도하지 않은데 있는 것입니다.

(4)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 헌신하려는 것보다는 주님을 통한 민족의 회복이라는 헛된 명예욕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습니다(마 16:24).

2) 사건과 함께 있었던 원인입니다.
(1) 그가 합당치 못한 자들과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과 하속들과 함께 불을 쬐었습니다(막 14:54). 추워서 불을 같이 쬘 때 누구나 쉽게 동화된다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은 잘 압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을 불신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2) 두 주인을 섬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체면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여종이 와서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했을 때 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그렇게 했습니다(요 18:17). 
갈수록 부인의 강도는 심해갔습니다. 이른바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배신한 죽은 개만도 못한 베드로는 그 후에 자신의 실패한 역사를 극복한 위대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복음서에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했습니다(마 26:75; 막 14:72; 눅 22:61-62).
베드로를 통곡하도록 한 것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눅 22:61). 이 말은 열중하여 주목했다는 말입니다. 그가 장담한 말과 그의 허위성이 충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회개를 위해 이미 기도했습니다(눅 22:32). 따라서 베드로의 회개는 예수님의 기도응답입니다. 
주님은 이미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예언했습니다(마 26:43; 막 14:30; 눅 22:34).
베드로는 닭이 울 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한 것입니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여 죽은 개같이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죽은 실패한 역사의 주인공이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심으로 우리는 주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넘어집니다. 일곱 번씩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의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지금은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work) 때문에 자주 연약해지고 자주 넘어지는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주님의 선언입니다(요 13:10). 우리가 주님의 말씀이 생각날 때 통곡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역사하는 가운데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2절에 『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실패한 역사歷史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처음부터 실패한 자였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역사를 극복하지 못할 때 실패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끄러운 역사를 극복하면 성공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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