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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속량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엡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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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량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엡 1:7)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느 날,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같이 도말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읽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던 어떤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엄마, 하나님이 나의 죄를 도말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요? 하나님이 그 죄를 어떻게 하시려는 거예요?난 하나님이 그 죄를 어떻게 도말하고 어떻게 치우시는지 모르겠어요. 도말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예요?' 

어머니는 소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 어제 석판에다가 글씨를 쓰지 않았었니?' '예'라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럼 그것을 나에게 가지고 오렴' 그 소년은 석판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머니는 그 소년이 볼 수 있게끔 석판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네가 썼던 글씨가 어디 있니?' '아 그거요, 지워 버렸는데요 ' '어쨌든 그 글씨가 어디 있니? '왜 그러세요, 업마 난 잘 몰라요' '그렇지만 그 글씨가 정말 여기에 씌여져 있었다면 네가 그것을 어떻게 치울 수 있었니?' '모르겠어요 엄마, 내가 아는 것은요 글씨가 거기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는 것 뿐이예요.' '그거야, 하나님께서 네 허물을 도말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뜻하신 것이 바로 그거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되었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분열과 다툼, 미움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온갖 과학 문명과 철학적, 사회적 이론으로써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낙원을 건설하려고 노력하여 왔지만 그 성과는 과학이 최고로 발달했다고 평가되는 오늘날에도 극히 미미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전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고요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과학이, 철학이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하려다 실패한 새 사회, 새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소망을 이미 이천 년 전에 십자가로써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매우 간결하고도 확고하게 증언해 줍니다. 곧 예수께서는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 곧 십자가로써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는 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는 인류에게 걸려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였던 것입니다. 
   
속량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는 바울 서신에서 총164회,에베소서에서만도 약30여 회 사용된 표현으로서 바울 신학의 핵심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잘 나타내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제로 해서 하나님의 선택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관계됩니다. 즉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우리 성도의 구원 역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안(엔 크리스토)은 택함 받은 성도가 대속 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의 상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누구든지 선택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속량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이로서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비밀에 붙여졌던 것으로(골 1:26)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비로소 온 인류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구속의 계획과 성취를 만천하에 공개하셨습니다(요 14:7).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만천하에 공개된 구속의 사실이 인간의 세속적인 지혜에 의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가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1).

가장 고차원적이고 보다 이성적인 지혜와 지성, 육체의 훈련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는 인간들이 오늘날도 십자가 안에 계시된 구원의 지혜를 바라보지 못함으로써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되고 준비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를 단순히 로마인들이 중죄인을 다스리던 형틀로만 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속량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사도 바울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은혜를 표현하고자 할 때 변함 없이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풍성함’(플루토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풍성함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통하여 구원하시되,인색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차고 넘치는 그 은혜로 죄인들을 자녀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사실 무죄한 자신의 독생자를 원수 된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행위 자체가 그 은혜의 풍성함을 그대로 증거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은혜로써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는 동인이 되어 인류를 향한 구속사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풍성’이라는 표현이 아니면 결코 예수님의 은혜를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무한한 은혜를 이제 막 표현하기 시작한 데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이 은혜에 대한 표현 방식이 어떻게 발전합니까?

‘기업의 영광의 풍성’(엡1:18),
‘능력의 지극히 크심’(엡1:19),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엡2:4),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2:7),

그리고  그 표현은 좀 더 극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3:8)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이렇게 표현합니다.‘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엡3:18)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재보려고 나름대로 시도해 보았던 사도 바울의 최종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수학이라는 학문이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일을 도와줍니다. 인간은 무한히 깊을 것으로 추산되는 태평양의 깊이도 수치로 환산해 내었고,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도 수치로 환산해 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약과입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조차 수치로 환산한 것이 인간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무엇을 수치로 환산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까? 세상 모든 것은 다 환산해 내어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만은 환산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차고 넘치는 것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떠났지만 얼마 안 되어 바닥이 났습니다. 그는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 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일로아버지의 집은 재산이 거덜 났습니까.? 심각한 부의 손상이 왔습니까? 집안이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이때 탕자가 홀로 앉아 하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눅15:17). 

그렇습니다. 탕자는 자기 아버지가 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형이 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품꾼들이 양식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버지는 아예 계산하거나 인간의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부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거기에서 초점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은혜에 맞추어져있습니다.

인간적인 수치와 계산으로 하면 어마어마한 손실이나 고갈이 와야 합니다. 아니 그 이전에,고갈되기 전에 일찌감치 창고의 문을 걸어 잠가야 합니다. 아니면 제한적으로 공급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퍼내도 고갈은 커녕 미동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주고 또 주고,퍼주고 또 퍼주어도 결코 다함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중에서 어마어마한 분량을 죄인 중의 괴수인 사도 바울에게 퍼주셨습니다. 어거스틴에게 퍼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퍼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은 매우 풍성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도말하셨으며(사 43:25; 44:22), 전체적으로는 전 인류, 전세대의 죄를 다 도말하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인한 자도 용서받고(눅 23:43), 간음죄를 범한 여인도 용서받으며(요 4:10), 동족의 고혈을 팔아 축재한 죄인 세리도 용서받으며(눅 19:10), 심지어 예수를 핍박한 자도 회개하고 용서를 얻었습니다(행 9:18).

죄 사함의 풍성함은 제한이 없음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요 3:16). 주님의 은혜는 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면 주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창세로부터 세상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풍성하게 누려도 부족함이 없는 은혜입니다. 누구나 주님께 나아가면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고 삶에 필요한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 늘 풍성한 영적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 세상에서 영적 기근에 허덕이는 사람을 이 은혜로 이끌어 동일한 은혜의 풍성을 누리게 해야 하겠습니다.

‘속량’(아폴뤼트로신 원형 아폴뤼트로시스)은 노예가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거나 죄수들이 자신이 선고받은 형을 면제받기 위해 속전을 지불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고대 헬라어에서 속량(아폴뤼트로시스)은 자유, 구원, 풀어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받은 구속에 대한 속전은 그 자신이 치르지 않았습니다.

마치 룻을 위해 보아스가 기업을 물려준 것처럼(룻4장) 성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속량의 속전을 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속전으로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 값으로 성도를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부터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서 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속량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이 구속 사역의 핵심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는 예정된 자의 속량 곧 죄사함으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라는 말과‘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는 말 사이에 ‘그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속량 곧 죄 사함은 은혜의 풍성함만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속량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격과 형상을 지닌 인류가 죄로 인해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두고 보실 수 없으신 사랑의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속량해 주시고 멸망의 길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지만 그 방법은 무조건적이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인류의 죄 값으로 십자가 형틀에 내어 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악을 사해 주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렇습니다. 속량 곧 죄 사함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지만 오직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사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가가 있어야했습니다. 그 대가가 바로 예수님의 피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피로서만 사해질 수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예수께서는 죄와 허물이 없으셨지만 친히 속죄 제물이 되사 십자가 제단에서 피 홀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예수님의 피에 근거해서 자신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그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사함을 생각할 때 반드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생각해야 하고 동시에 무죄하셨던 예수님의 피의 희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속의 은혜를 생각할 때 기뻐하면서도 또한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실로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이라는 엄청난 대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사함이 엄청난 사건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고 찬양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희생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은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속량 사역은 시간 기준에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현재에 누리게 되는 구원론적인 죄 사함을 말씀합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미래에 얻게 될 종말론적인 구원의 완성을 말씀합니다.

(엡 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속량은 결과적으로 우주적인 통일을 가져옵니다. 십자가의 최종적인 목표는 통일과 화합입니다. 인류의 범죄는 온갖 종류의 분열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갈라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틈을 메우고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인류의 죄 짐은 대신 지시고, 자신의 의는 온 인류에게 전가하심으로 인류가 거룩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하나님과 영속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인류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갈 4:6)라 부를 수 있는 대화합의 장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서는 온 인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심으로써 온 인류를 한 형제로 묶으셨습니다(요 11:52). 미움과 다툼과 경쟁의 대상을 사랑과 관심과 용서의 대상으로 바꿔놓으신 것입니다.
  
기차 정거장에서 최신식 엔진을 한 기차가 빠르게 지나치자 '그 엔진 참 세군!'하고 한 사람이 역장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역장인 친구가 말을 잇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그것도 철로 위에서 뿐이지 철길을 벗어나면 더없이 무력한 것이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우리 신자들 역시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주님과 연합하여 교제할 때 가능한 것이지 주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면 가장 미약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속량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우주적인 통일을 가져왔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성찬에 참여하며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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