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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에 서서 자유함을 얻자 (욥 2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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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서서 자유함을 얻자 (욥23:1-17)

예수님께서 자기를 시험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그러나 유대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도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시고, 나아가 성경이 곧 진리입니다. 우리 성도는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처하든지 그 문제가 해결 되든 그대로 존재하든 마음의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 455장에 이런 가사가 있지요?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 마음의 자유를 누리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유로움이 없다면 그것이 곧 시험 든 것이요 실패입니다.


오늘 본문의 욥이 그런 상태입니다. 그는 극심한 상황에서 심히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던 동방의 의인 욥의 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여러 가지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당시 계시의 수준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정도는 당시에도 충분히 계시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키는 2절입니다.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즉 지나친 환난으로 욥이 진리에 서지 못하고 상황에 깊이 빠진 것입니다. 상황에 빠졌다는 말은 시험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탄식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을 찾지만 멀리 있는 느낌이고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지만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상황이 호전 되든지 아니면 지속되든지 중요한 것은 그 문제에서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자유는 강한 성령의 붙드심으로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때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자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자유의 말씀을 붙들 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 본문이 가르쳐 주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1.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확신입니다.

3절에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라고 탄식하는 욥의 모습을 봅니다. 8-9절을 보면 욥의 갈등이 더 자세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여기서 발견하는 욥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앞을 찾지 못한 영적 갈등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점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멀리하시거나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은 우리 마음을 슬프게 만듭니다. 왜 이런 갈등이 생길까요? 체험과 느낌에 기초했기 때문입니다. 환란이 너무 심할 때, 혹은 내 기도가 응답 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을 잃어버린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해야지 하나님을 느낌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힘이 솟든지 솟지 않든지 말씀에 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있는 것이지 결코 버림이 되거나 등한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는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42편을 보면 시편기자도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시42:4을 보면 시편기자가 성령이 충만하여 백성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큰 성회 인도에 쓰임 받은 존귀한 제사장들이요 능력 있는 부흥사들입니다. 그 때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일어났던 그 은혜의 경험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웬일인지 그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든 갈급합니다. 애통하고 부르짖으며 그 때를 생각하며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5절과 11절에서 자기 영혼에게 격려하는 말씀을 우리는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이 말씀을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거나 그 은혜가 떠난 것이 아니니 너는 낙망하지 말아라. 불안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그는 변함없이 그 은혜로 너와 함께 하시니 더욱 찬송할 뿐이라.’

이처럼 하나님과 그 은혜를 아직 경험치 못했다 할지라도 경험하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어디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크게 경험했던 체험에 대한 회복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큰 체험을 다시 회복하려고 애쓰다가는 세상 어디에 가도 그 체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한 집회에 참석해도 그것을 경험치 못할 수 있습니다. 실재로 어떤 이는 10년 20년을 이 문제로 방황합니다. 그러나 그 때의 그 풍성한 경험을 되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서야 체험이 따라오는 것이지 체험에 서면 체험은 도리어 떠나거나 사단이 틈타게 된다는 사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충만하신 은혜로 함께 하시며 나를 성전 삼고 내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고 예수 안에서 하늘 높이 구원하시고 능력 주시고 권세 주셨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예수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아름다운 일을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그 믿음으로 이웃과 교회를 위해 기도로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의 삶이 잘 되면 빌4:6 말씀처럼 하나님의 임재로 평강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2. 예수 안에서 문제는 이미 판결 받았다는 확신입니다.

3-7절에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욥은 이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정당한 판결을 통해 문제의 자유함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알지 못하여 심히 방황합니다. 아직도 복음을 모르고 율법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사고입니다.

그러나 이 때 문제만 바라보지 마시고 예수 안에서 이미 판결해 주시고 해결해 주신 복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병 고치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귀신을 이겼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죽음 공포도 예수 안에서 이겼음을 찬양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이 이루신 복음을 알면 간구의 기도보다 감사와 찬양의 기도가 더 많아집니다. 그리고 오래 기도해도 되지 않던 것이 복음의 기도로 쉽게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노래요, 예수의 공로가 우리의 찬미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해결 받지 못한 것처럼 “해결해 주세요”가 아니라 “해결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확신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 진리에 서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러므로 이 감사를 옳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50:23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3. 낮아지게 하심에 감사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욥의 또 하나의 문제는 섭리에 대한 생각입니다. 욥은 10절에서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금 같이 단련하시고자 하시는 섭리라고 고백합니다. 11-12절을 보면 즉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고 말씀을 음식보다 더 귀히 여기며 산 자신에게 이런 고난이 닥친 것은 하나님의 연단의 섭리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건 연단이지 죄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는 자기의 변호입니다. 끝까지 섭리 앞에서까지 자기를 변호하려는 욥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욥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자세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죄 때문에 징계하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징계 받지 않을 만큼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고 단련이라고 했는데 죄란 말씀 순종함에 부족함도 죄라는 점에서 죄 없는 연단이란 사실상 있을 수 없습니다. 연단이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벧전5:10). 그러므로 고난이 올 때 자기 의로움 주장보다 더욱 겸손히 엎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한 형제는 낮아짐을 자랑하라(약1:10). 이것이 연단의 섭리 앞에 취해야 할 성도의 자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정 겸손해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 크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4. 좋으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욥은 13-15절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변성과 절대적 주권성을 확신합니다. 이건 옳은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불변성이 도리어 자기에게 더욱 계속 되는 고난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리의 깊은 것은 알지 못하는 말로 좋으신 하나님께 맡겨드리지 못하는 불신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큰 뜻이 불변한 것이지 섭리의 방법이 불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믿고 좋으신 아버지께 자신을 맡겨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주관하신 분이 좋으신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맡기고 마음의 자유와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일 못하게 될 것 같아 염려하지 마십시오. 물론 열심히 기도는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할 능력과 환경 주시지 않으면 쉴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유함을 가지세요. 내가 만사를 책임지려고 하니까 염려되고 무리하게 되고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요, 모든 일은 주님의 일이니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산이 가로놓여 있어도 지금 이 시간 그리고 영원히 만사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멀린 R. 케로더스의 ‘찬송생활의 권능’에는 정신지체 딸을 둔 부부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년 동안 온갖 방법으로 딸을 치료하려 애쓰던 이들은 우연히 케로더스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역경 그 자체에 감사하고 그런 역경을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부부는 고민했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저의 딸을 저보다 더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딸에게 정신병이 있는 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과 지혜에 찬양을 드립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놀랍게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딸은 완쾌되었고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병에 대한 감사에 동의하기 힘들지만 그러나 이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맡겨드리는 신앙을 고백했다는 점이 기적을 불러왔다고 생각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들의 산을 넘는 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심을 믿고 감사하며 그 섭리에 맡겨 드릴 때 우리 마음은 자유를 얻고 그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러므로 욥처럼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불안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맡겨드리고 찬송하고 평안해야 한단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처럼 큰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살길 원하십니까? 이제 체험보다 진리에 서서 더욱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세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욥처럼 고난 앞에 불평과 두렴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맡겨드리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영원히 진리에 서서 믿음과 감사와 찬양으로 넘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구원을 크게 경험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한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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