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많은 용서는 더 큰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눅 7:36-47)

  • 잡초 잡초
  • 210
  • 0

첨부 1


  어떤 자매가 배곱 티를 입고 교회에 왔습니다. 민망히 여긴 담임목사가 그 자매를 불러서 “배꼽티를 입고 교회에 와도 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그랬잖아요.” 라고 말했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의 중심을 보시는 게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中心→ 마음의 가운데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보여 지기를 바랍니다. 속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뻔뻔하게 아니라고 우겨댈 때 무어라고 합니까?
  아이구 속 보인다 속보여...
  여러분도 남의 속을 볼 줄 아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의 속을 모르시겠습니까?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여기 왜 오셨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시기 위해 오셨습니까? 아니면 적당히 시간 때우려고 오셨습니까? 예배 시간 지루하다고 자꾸 시계만 보는 사람 속보이는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시계만 보고 있으니....
  그런데 문제는 사람에게 속보이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속 보이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사람은 속보여도 체면상 그냥 넘어갈 수 있고 모른척 해 줄 수 있습니다. 뒤에서 수군거리고 욕해도 못 들으니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 - 속보이는 사람
  본문에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였습니다.
  성경에 이 바리새인 시몬의 신상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시몬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상당히 용기 있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시몬이 예수님을 초청한 이유가 예수님에 대한 존경이나 경외심에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의 표현이거나 사랑의 표현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은 하였으나 아주 냉냉하고 거만한 자세로 맞이하였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눅 7:45-46절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초청해놓고 “예의를 다한 인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

  그는 무성의하고 예의 없는 태도로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특히 39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였으며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청은 했으나 자기 집에 오신 예수님을 그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하고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 요리 조리 뜯어보고 살펴보며 의심하는 .... 어떻게 보면 아주 악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은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입술로 예수는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내 맘에 오시라고 영접해 놓고서는 진정으로 그를 기뻐함도 없고 예수를 영접하기 위한 어떤 수고나 헌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의심하고 눈치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이 바리새인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닌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한 한가지의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시몬의 생각과 마음을 다 읽으시면서도 예수님이 그의 초청에 응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 까요? 저 같으면 속보이는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갔어도 대단히 불쾌하여 화를 내고 나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집에서 모욕을 당하시고 의심을 당하시며 푸대접을 받으시면서도 그 집에 가셨고 거기서 식사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집에 벌어질 일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어떤 여인 하나가 예수님께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앉으신 뒤로 와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물에 젖은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어내고 입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행위는 사람이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경외를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이 여인에 대하여 본문은 “죄인인 한 여자”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죄인이라고 표현되는 사람들은 “세리와 창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사람들에게 드러난 죄인 즉 “창기”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여자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청하였던 바리새인이 속으로 “이 분이 정말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인줄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죄인이 함부로 자기 몸을 만지지 못하게 할텐데.....” 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습니다.
  선지자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몬의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시몬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교훈하시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 하였습니다. 

  빚 주는 이에게 두 사람이 빚을 졌습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화폐단위로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본다면 오백 데나리온은 2천5백 만원 정도이고 오십 데나리온은 2백 5십 만원이 되는 것입니다. 둘 다 가난하여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불쌍히 여긴 채권자는 은혜롭게도 두 사람의 빚을 모두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 비유를 하시고 예수님은 시몬에게 물었습니다.
  둘 중에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할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대답을 옳다고 하시면서 비록 죄인으로 불리던 여인의 행동과 비록 예수님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바리새적인 교만과 자만에 빠져있는 시몬의 행위을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요?

  자만에 빠진 의로움보다 울며 회개하는 죄인이 더 하나님께 의롭다는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선지자일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집에 초청하였지만 여전히 종교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자신의 바리새적 안목으로 여인의 행위를 평가하고 나아가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하여 의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왔을 때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입맞춤의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발 씻을 물을 주는 것과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는 것, 그리고 감람유를 붓는 것은 자기 집에 온 귀한 손님에게 드리는 최상의 대접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 식탁에 초청했으면서도(7:36)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아니했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자신의 종교적 편견과 영적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 편견과 영적 교만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알게 만듭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지만 자기 마음에 모시지는 않았습니다. 공간적으로는 예수님과 가까워졌으나 영적으로는 여전히 멀리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공간적으로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죄인”이였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에 구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최상의 영광을 받으실 구주로 인정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발에 눈물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으며 귀한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자만에 빠진 의로움보다 울며 회개하는 죄인을 더 기뻐하십니다.(눅18:10-14)

  많은 사죄는 큰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선지자에게 해야 할 대접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은 죄가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잘못된 종교적 편견과 영적교만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용서 받아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헌신도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죄의 양과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은 정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결국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바리새인에 대해 적게 탕감 받았기 때문에 사랑도 적다는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넘쳤다(롬5:20)고 하였습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인처럼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만큼의 무거운 죄를 단번에 탕감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발 씻을 물을 드려야하고 기쁨으로 입 맞추어야 하며 나의 구세주로 기름을 부어 드려야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이 여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많이 사랑해야 하고 더 많은 헌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자가 더 사랑합니다.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의인 되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주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더 무 싼 값에 사단에게 넘기지 마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사랑과 헌신을 드립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