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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특별은총과 일반은총 (신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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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장의 장소와 2장의 장소가 똑같습니다. 가데스바네아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1장과 2장 사이에는 광야 38년의 세월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불신앙으로 인한 불순종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38년을 헤맨 후에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기 때문에 신명기 1장과 2장은 장소가 같지만 시간은 무려 38년이 흘러 간 것입니다.

모세는 38년을 헤맨 사실을 단지 신명기 2장 3절의 말씀으로 간단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산을 두루 행한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 동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를 빙빙 돌기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아무리 앞을 향해 열심히 가도 결국은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었으므로 이제는 돌이켜서 북으로 나아가라. 이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할 때가 됐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신명기 2장은 좀 이상합니다.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고 있는 38년의 세월은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벌 받은 세월입니다. 그런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신 2:7)고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벌 받는 시절에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알았다(watch)’는 것은 하나
님께서 그들이 방황하는 것을 위에서 다 보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혹시 잘못 가지는 않는지, 혹시 다치지는 않는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일일이 관찰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먹을 것을 주시고 마실 것이 부족하면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벌을 주시면서 또 복도 더불어 주셨습니다.

자녀를 기르면서 자식이 가끔 잘못하면 체벌할 때가 있습니다. 벌주거나 체벌 하면 자식들은 울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밥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가 제대로 있는지 살펴보고 맛있는 요리를 해서 문을 살짝 열고 넣어줍니다. 자녀를 때렸지만 마음이 더 속상한 것은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신앙으로 권징하시면서도 이와 같이 복을 주시고 함께 하시며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벌주시는 가운데에도 복을 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징계하실 때 한계를 가지고 징계하십니다. 때가 되자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신명기 1장에서는 악명 높은 아모리 백성 산지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신명기 2장에서는 에돔과 암몬과 모압의 경계선을 따라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더 편안한 길을 택해서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2장을 주목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에돔과 암몬과 모압 사람들과는 다투지도 말고 땅을 빼앗으려고 하지도 말며, 괴롭게 하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 족속의 땅을 지나게 되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할 것인데 그들은 전멸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신명기 2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주변국가들 간의 관계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과연 주변의 불신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지를 신명기 2장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광야 40년 방황의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된 근본 이유는 불신앙입니다. 신명기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과 불순종과 두려움 때문에 방황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2장의 사관은 조금 다릅니다. 신명기 2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해도 아직 아모리 족속의 때,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낼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계시해 주신 장면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2-16)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지만 애굽에 가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40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애굽을 징치하실 때에 그 자손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또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신명기 2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된 이유를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는 아모리 족속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극한에 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낼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과 일반 백성들, 즉 믿지 않는 백성들과 상호 연관하여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만 역사를 진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은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은혜 받지 못한 세상의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가’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의 은혜(saving grace)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특별은혜(special grace)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창세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시며 부르시고 의롭다하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을 주십니다. 구원의 은총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이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구원은 택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은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은혜도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햇빛도 주시고, 비도 주시고, 지식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예술적인 능력을 주십니다. 이 은혜를 가리켜 일반은혜(common grace)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구원의 은혜(saving grace)를 받고, 일반 사람들은 일반은혜(common grace)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해서 우리가 그 음악을 듣고 즐기지 않습니까? 소설가 헤밍웨이도 불신자이지만 좋은 소설을 썼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즐겨 읽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모두 신자는 아닙니다. 정치가들도 모두 신자는 아니지만 그 분들이 정치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먹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일반 은혜, 일반은총인 것입니다.

2. 대항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예절과 상식으로 대하라

그러면 구원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반은총을 받은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신명기 2장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지 않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대적하지 않는 사람들은 암몬, 모압, 그리고 에돔 세 족속이고 대항하는 족속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입니다.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중국의 유명한 두 지도자 장개석과 모택동이 힘을 합쳐 일본에 항거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에 두 사람이 모여서 통일된 중국을 이루고자 했으나, 그 계획이 깨져버리고 결국 1946년부터 3년 동안 중국에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장개석 군대와 모택동 군대가 싸우게 된 것입니다. 장개석은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졌고, 모택동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장개석이 승리했으면 좋았겠지만, 장개석의 군대는 패배하고 대륙을 떠나 결국 대만을 차지하였고 모택동 군대는 승리하여 대륙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왜 모택동은 승리하고 장개석은 졌을까요? 정사(正史)에는 나오지 않지만, 야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택동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너희는 어느 지역을 가든지 민폐를 끼치지 말라. 거기서 여자를 겁탈하지 말고 양식을 빼앗지 말아라. 사람들을  절대로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주는 것만 먹고 지나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민폐를 끼치는 사람을 엄벌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 군대는 가는 곳마다 민폐를 끼쳤기 때문에 민심이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장개석 군대는 자유 민주주의를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으로 쫓겨나고 모택동 군대가 결국 대륙 중원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대항하지 아니하는 세상 백성들에 대해서는 예절과 상식을 가지고 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압, 암몬, 에돔 사람들과는 다투지도 말고 괴롭게 하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고 그들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지도 말고 양식과 물이 필요하면 돈을 주고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돔, 모압, 암몬 백성들은 악한 백성들이요, 우상숭배하는 백성들이요, 부도덕한 백성들이지만 그래도 너희를 대항하지 않고 너희에게 길을 내어줄 것이니 그들과 싸우거나 다투지 말고 민폐를 끼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이라고 하는 조그만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아넣고 거기서 억지로 살게 하셨는지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차라리 애굽과 모압, 암몬 사람들을 전부 쫓아내고 그 넓은 땅을 마음대로 차지하고 살게 하시지 왜 조그마한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을까요? 그것은 세상 백성들을 모두 쫓아내거나 죽이고 하나님의 백성들만 끼리끼리 모여 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은혜를 베푸실 때에는 일반은혜를 받은 죄인들 가운데서 택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일반은혜를 받은 죄인들이 없다면 특별은혜를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터전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 의인이 됐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죄인들과 섞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들로부터도 혜택을 많이 받습니다. 그들이 길을 닦아놓으면 우리가 자동차 타고 달리고, 장사하면 가서 물건도 사고, 죄인들이 의사가 되면 가서 병도 치료하고 수술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받아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죄인들과 섞여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마 13:29-30) 죄인들은 추수 때에, 예수님의 재림 때에 심판 받고 멸망하게 되어 있지만 최후 심판 때까지는 의인과 함께 이 세상 가운데 섞여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과 불교 신자와 박수무당과 이슬람 교인들이 다 섞여 살아도 서로 해치지 않는 이상 예절과 상식을 지키면서 공존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은혜 받은 것을 이유로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고 존재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대하면 우리 신앙은 무례하고 상식 없고 거칠기 짝이 없는 그런 저급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예수님을 믿고 강남중앙침례교회에 10년 이상 출석한 후 권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남편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매일 약주를 드시고 취해서 소리 지르며 집기들을 때려 부숩니다. 권사님이 남편을 보고 “이 마귀야! 이 사탄아!”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것이 바로 상식 없고 무례한 신앙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술 취해서 집에 들어와도 예수님을 믿는 아내가 남편을 욕하면 남편은 속으로 ‘우리 마누라 교회 나가더니 말만 늘고 욕만 늘었구먼. 예수 믿어도 아무 소용없네. 나는 술을 먹어도 마누라보다는 나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 취하고 들어와도 그 부인이 “여보. 오늘 약주가 과하셨군요”라고 말하면서 신발과 양말도 벗겨드리고, 발도 닦아 드리고, 아침에는 해장국도 끓여 드리며 잘 모시게 되면 아무리 술 취한 사람이라도 ‘역시 마누라는 교회 다녀야 돼. 마누라는 예수 믿는 여자가 훌륭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술 먹으러 가도 “이보게. 자네 마누라 예수 믿나? 안 믿지? 역시 마누라는 예수를 믿어야 되는 거야. 예수 믿는 우리 마누라는 내가 술 취하고 들어가도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라고 자랑하게 되고, 후에 자기가 병들어 약해지게 되면 “여보. 나도 당신이 믿는 예수님을 믿어야겠소”라고 말하며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불신자라고 해도 이처럼 예절과 상식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제가 전에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좁은 통로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서더니 갑자기 성경책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스튜어디스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통로를 막고 전도를 하는데 물론 ‘담대하고 믿음 좋은 분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저 사람처럼 전도했다가는 믿을 사람도 안 믿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기독교가 몰상식하고 무례한 종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우리는 불신자들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상식과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복음적인 양심이나 정직을 내세워서 사람들에게 상식이하의 행동과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전도하겠다고 사람들에게 갑자기 “여보시오. 내가 보니 당신들 안에는 귀신이 스무 마리나 들어 있소. 당신들은 지금 죽으면 지옥 갈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들을 향해 진노의 손을 들고 계시오”라고 말한다면, 이런 무례한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물론 불신자들이 지옥에 간다는 말은 맞긴 하지만 정직과 양심을 핑계로 이렇게 예절 없고 무례한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다 말하는 것이 정직은 아닙니다. 우리가 상식 수준 이하의 기독교를 보여주면 어떻게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특별은혜를 받았다면 더욱 상식과 은혜와 예절과 보편타당한 사회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3. 대항하는 백성들과는 싸우라

그렇다면 교회를 대항하는 불신자들, 하나님의 백성을 대항하는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앞서 싸우시고 그들을 진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암몬, 에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에게도 예절과 상식으로 대했습니다. “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대로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나로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나로 마시게 하라 나는 도보로 지날 뿐인즉”(신 2:26)이라고 예절을 갖추어 정중히 요청하였으나 헤스본 왕 시혼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신 2:30)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다”(신 2:34). 아모리 왕 시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는 길을 막고 방해하다가 결국 진멸 당했습니다. 바산왕 옥은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돌이켜 바산으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에드레이에서 싸우는지라”(신 3:1) 바산 왕 옥도 하나님과 이스랑레 백성을 대적하여 싸웠기 때문에 성읍 60개를 모두 빼앗기고 결국은 남녀노소 유아까지 모두 전멸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눈동자입니다.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불신자들과 섞여서 삽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그들에게 일반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사회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지 않는 사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5.31 지방선거에서도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지 않는 사람들이 당선되게 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가 당선이 되면 우리 사회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를 위해 주는 사람들과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살아갑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 백성들이 선할 때는 예절을 가지고 대하고 악할 때는 우리도 싸워야 합니다. 예절을 갖출 때도 있고 싸울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가나안 땅, 우리가 짓지 아니한 성읍과 우리가 쌓아두지 아니한 물건이 가득한 집과 우리가 파지 아니한 우물과 심지 아니한 과수원을 얻을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이방 사람들의 악함과 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을 쳐서 복종하며 믿음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아무개 때문에 어려워. 아무개 때문에 축복을 못 받는 것 같아”라는 불평은 그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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