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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 하나님(3) (신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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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마디로 말씀해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첫째 아버지의 개념입니다. 

1) 이방사람들, 특히 헬라사람들은 제우스를 신(神) 중의 아버지요, 인간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이 신을 아버지라고 말하게 된 것은 대체로 두 가지의 생각에 기인(起因)합니다.
그 하나는 부성(父性),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입니다.
그 둘째는 부권(父權), 아버지된 권한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보호하고 돌보아야 한다, 곧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우리에게 전해준 유대사람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개념은 성경에도 누누이 나타납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32장 6절, 예레미야 31장 9절, 사무엘하 7장 14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개념은 개인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국가의 아버지이지 한 개인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아버지, 큰 뜻에서의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2) 이스라엘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개념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가 있음을 말합니다.
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3:20절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뵈올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뵈오면 죽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어도 이 아버지는 아주 높고 크신 하나님이라서 우리 인간이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별되신 하나님, 우리로서는 뵈올 수 없는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② 둘째 절대적 권위자로서의 개념입니다. 절대적 무조건적 권위자로서    의 하나님입니다.
예레미야 18장 1절 이하에 토기장이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2절).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 보니, 토기장이는 흙을 주물러 그릇을 만들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깨뜨려버리고 다시 만들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마음대로 주관하십니다. 당신께서 뜻하신 바대로, 당신의 의도대로 하십니다. 크게도  만드시고 작게도 만드시고, 높게도 만드시고 낮게도  만드십니다.

우리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병듭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그야말로 기구하게 삽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평생토록 그늘 없이 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군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③ 셋째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욥기 38, 39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주관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며, 불가항력적인 능력을 행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고백입니다.
④ 넷째로 진노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인간이 죄지을 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홍수와 유황불로 심판하십니다. 지진이 나서 땅이 꺼지고 모든 생물이 죽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고 그 자리에 사해(死海)를 만드셨습니다.
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하여 두려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는 말을 쓰곤 했습니다.
<여호와>라는 글자는 있어도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발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쓰기는 <여호와>라 쓰고 읽기는 <아도나이> 곧 <주>라고  읽었습니다.
혹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불렀다가 벌이나 받지 않을까 하여 아예 부르기를 피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개념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 개념은 어떠한 것이냐, 이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아들).

곧 법적 관계에서의 하나님의 부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생명의 근원되심을 믿습니다. 내 생명의 시작이며, 생명의 진행이며, 생명의 목표임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가치판단에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부성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둘째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자녀),

곧 사람의 관계에서의 부성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자비 의 아버지를 믿는 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14:36절과 로마서 8:15절에 <아바 아버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요 20:1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아버지는 곧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보아도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보면  기도를 하면서 그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이러한 생각도 합니다. ①어려서는 <엄마, 아빠>라고 잘도 부릅니다. 하루 종일 <엄마. 아빠>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닙니다.
②그러다 좀 크면 <아빠>가 변해서 이제 <아버지>가 됩니다.
③그리고 좀 더 지나면 <아버님>이 되는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들면  또 달라집니다. <아버님> 할 때에는 이미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아빠> 할 때가 가장 좋은 것입니다. 가장 가깝습니다.
<아버님> 할 때에 어른들은 섭섭합니다. 일 년에 한번 볼까말까합니다. 괴롭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세상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달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은 죄가 가장 큰 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지런히 불러야 하겠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부를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길을 가다가도 돌부리에 채여도 <엄마>라 말고 <아버지>라 하십시오.

6․25 때에 군목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들은 전장에서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찾는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부르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군인들은 죽어가면서 <나에게 신선한 우유 한잔을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유를 먹고 자랐기에 마지막에도 그 우유생각 뿐입니다.
어머니가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아침저녁, 때마다 일마다 늘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연결시켜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8절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God is Love> 구속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말씀합니다.

헬라사람들의 개념으로는, 사랑은 네 가지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 그리고 형제 자매간의 사랑인 <스톨게>,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  그리고 성경에서 주로  말씀하는 <아가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5:43-48절에 자세하게 씌어 있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稅吏)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시고 선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십니다.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입장에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가 사람 중에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원수진 자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좋은 자식만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효도하는 자식만 사랑하고 불효한 자식은 미워합니까? 
불효막심한 자식도 자식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주시는 종적(縱的)인 사랑입니다. 횡적(橫的)인 사랑이 아닙니다. 위에서 밑으로 주시는 사랑입니다. 큰 자로서 작은 자를  사랑하심입니다. 아버지로서 자녀를  사랑하는 그 사랑 이상으로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정의는 이렇듯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적인 것입니다. 오늘을 보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을 저 앞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아버지의 사랑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섬세하신 아버지십니다. 개별적인 사랑을 빈틈없이 베푸시는 아버지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인 것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또 저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9-32절을 보십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물며 너희 생명일까 보냐 하십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개인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족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아버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소개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여럿이라고 해서 <도매금>으로 취급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열 손가락이로되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끊임없이 부르시고 무엇인가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받지 못해서 애타는 사람도 답답하지만 주시려 하는데도 못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더 괴롭답니다. 주시고 싶은데 주실 수가 없습니다. 주어서는 안 되겠으니 못 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안 주실 이치가 없습니다. 항상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3) 셋째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은 인격적 관계를 뜻합니다.

곧 나 개인의 아버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아버지를 믿는 다는 뜻입니다.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민족적인 아버지가 아니고 나 개인적인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하신 초월, 절대하신 권위, 불가항력적인 아버지, 진노의 아버지 뿐 아니고 나와 가까이, 나와 친히, 함께 하시는 아버지로 믿습니다.

결코 이방인이 말하는 추상적인 신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신부로서의 아버지(종교의식)도 아닙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나 만민 구원론자들이 말하는 만민의 아버지도 아닙니다.
오직 믿는 자의 아버지, 곧 신자의 아버지를 뜻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아버지입니다(롬 8:14-16, 요 1:12-13).

하나님은 용서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용서하는 것처럼, 돌아온 탕자를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그 아버지는 탕자의 지나간 과실(過失)을 묻지 않습니다.
저는 이 탕자 비유를 읽을 때면 이따금 본전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 녀석이 집을 나갈 때, 도대체 아버지는 왜 재산을  내주었는지 모르겠어요.
주지 않았다면 못나갔을 것 아닙니까? 그저 용돈 몇 푼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받아야 할 유산을 앞당겨 가불하겠다는 몹쓸 아들에게 왜 서슴없이 내주었느냐, 그 말씀입니다. 그리고 잇대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아버지는 분명히 참된 아버지로구나, 이렇게 말입니다. 재산 따위야 다 없애도 좋으니 부디 사람다운 아들이 되어서 돌아와다오,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는 그렇다 하고,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그 아들이 거지꼴 되어 돌아왔을 때, 아버지로서는 한마디쯤 할 말이 있었을 것 같은데 없어요. <그래, 가지고 나간 재물은 얼마나 남겨 왔느냐?> 한번쯤 물어볼 것인데 물어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우리가 부모 되어 본받아야 할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대개의 부모들이 이 대목에서 실패를 하고 맙니다.
<그래 이놈아, 혼자 나가 흥청망청 살아보니 어떻더냐?>
<그 많은 돈을 그새 다 날렸더란말이냐. 이 고이헌!>
<큰소리치고 나가더니 꼴좋다! 거지꼴이 되어서 무슨 염치로 돌아오누?> 이러쿵저러쿵 자식으로 하여금 낯을 못 들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에는 잔소리가 없고, 귀 아픈 <설교>가 필요 없습니다. 무조건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찾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Seeking God>입니다. 멀리서 팔짱끼고 대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 찾으십니다. 당신 스스로 나서십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라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스스로 희생을 치르십니다. 댓가를 치르시는 하나님!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요, 희생하시는 하나님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지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았다고 하는, 그런 단순한 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요구해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지 않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기도를 세 차례나 거듭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양보하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몸소 지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희생적 사랑, 그 아픔을 지불하시면서 계시해주신 공의로운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입니다.

①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전능! 이것은 폭군적인 전능이 아닙니다. 구속적(救贖的) 전능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여 의인 만드는 전능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는 사울을 위대한 사도로 만드는 전능이요, 순교하게 만드는 전능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적(震怒的) 사랑이 십자가 안에서 계시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십자가 안에 나타납니다. 그 능력이 십자가에 계시됩니다.

②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요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래서 전능의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전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③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 우리들 신앙고백의 제 1이 이것입니다.
3. 셋째 내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라고 했습니다(딤후 1:12).
개인적인 신앙고백이 바로 되어 <우리의 하나님>으로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개인 구원이 선결이요, 근본입니다. 정착한 개인 구원이 없이는 사회 구원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였습니다.
<너회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 2:38)고 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마 22:32),
지금 우리는 하나님 신앙 고백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가 믿는 개인적인 고백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상 그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똑똑합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인간적인 사고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입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제노파네스(Xenophanes)는 <만약 말이 손이 있어서 신을 그린다면 말 같은 신을 그릴 것이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코가 납작하고, 얼굴이 검은 신을 그릴 것입니다. 트라쾨아 사람들은 눈이 파랑코, 머리가 곱슬곱슬한 신을 그릴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그림을 보면 머리가 전부 금발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발이 아니고 검은 흑발입니다. 로마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크리스마스카드에는 마리아가 중국 여자의 옷을 입었습니다.
한국 크리스마스카드엔 요셉이 한국 사람들의 갓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히 어떻게 하나님을 모사하거나, 설명하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유명한 인류학자 웨이츠(Waitz)는 <초감각적 권력의 신앙에 대한 의심이 없는 곳은 없다>고 했습니다.
인류학자 라젤(Ra-tzer)은 <인종학은 종교 없는 종족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룻소(J. Rousseau)는 무신론을 주장하려고 영국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대서양에서 풍랑을 만나 파선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여. 당신이 계신다면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기도가 터졌습니다.
무신론자 볼테르 (Voltaire)는 임종 시에 <1-1>는 하나님과 인간에 게 버림받았구나.
<오. 그리스도 예수시여>라고 부르짖으면서 운명했습니다.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살아 계신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편의 계시(나타내 보여줌」에 의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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