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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과 시험에서 승리하자 (골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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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얼마 전부터 ‘다빈치 코드’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책이 나오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을 영화화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나라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상영금지를 위해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기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개봉하고 보니 재미없는 영화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호기심에 많이들 보고 있습니다.
이 소설과 영화는, 기독교가 신봉하고 있는 교리 중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성경의 권위, 예수의 신성,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본질, 사랑과 인간 존중이라는 근본과 그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건들을 외곡하고 그 결과 진리를 거짓으로 매도했습니다.
기독교를 진실을 은폐하는 사이비 종교단체로 희화됨으로써 그 신앙을 인생의 존재 근거로 삼고 있는 기독교단체와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신념과 감정과 내적 신앙을 무참히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정확한 자료를 통해서 그려낸 것이 아닙니다.
단지 외곡 된 자료와 그를 바탕으로 한 작가의 추측과 상상, 기획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에만 집착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집착하고 매달리게 되면, 큰 것,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소설과 영화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하되,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더 온전한 신앙을 위하여 나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더욱 더 근신하며 믿음의 줄을 든든히 잡아야 합니다.

1. 서서히 퍼지는 독을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의 역사를 보면 유혹과 시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역사 속에서 계속 있었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죄짓는 것을 우리가 다 막을 수 없듯이, 기독교가 이러한 소설과 영화를 다 막을 수 없습니다.
진리와 참 생명이 있는 것은 항상 도전을 받습니다.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유사한 이단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수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명품에는 항상 짝퉁이 있듯이, 성경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근거로 한 종교이기 때문에, 짝퉁인 이단들이 들끓기 마련입니다.

또한 특별히 거짓과 왜곡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다빈치 코드와 같은 소설들이 있었습니다.
‘왕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
‘예수는 결혼했는가?’
‘성혈과 성배’
‘인간 예수’
‘복음서의 여신’ 등은 그러한 부류의 책들입니다.
이 일은 계속 됩니다
새삼 지금의 일이 아닙니다.
초기 교회 때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계속 이런 논쟁을 보아 오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쫓음이 아니니라.”(8절)

골로새 교회 안에 영지주의 이단과 세상 철학이 들어와 골로새 교인들을 현혹했습니다.
이로 인해 성도들이 진리의 본질에서 벗어나 다른 진리를 이야기하고 그로 인한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붓을 들어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이러한 이단을 일깨우면서 이것들을 조심하고 경계하라고 가르칩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란 영지주의 철학과 세상 철학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란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들과 마귀 혹은 종교적 지식의 미숙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과 거짓과 왜곡된 이야기들로 인해, 교회의 성도들에게 침투해들어와 영적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 귀에 들려지고 우리 눈에 보게 될 때 그것은 마치 우리 속에 독과 같은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점입니다.

‘다빈치 코드’가 무서운 적이 되는 것은 이것이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왜곡된 내용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으로 알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어려서 아직 진리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어 신앙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내용이 알게 모르게 신앙 있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몸에 퍼져가는 독과 같이 퍼져 들어가 때로는 우리의 영적인 삶을 약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비록 이것을 무시한다고 하지만, 은연중에 재미있게 읽은 그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고, 그이야기로 인한 흥미와 줄거리의 영향을 받아 알게 모르게 거기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대기오염이나 중금속 등으로 인한 폐해를 직접적으로 잘 느끼지 못합니다.
서울 시내에 나가면 공기가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지만 이것이 내 몸 속에 직간접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합니다.
음식을 통해, 공기를 통해 우리 몸에 중금속이 쌓이고 그로 인해 우리 몸이 병들어 간다는 사실을 못 느끼는 것이죠.

그러나 알게 모르게 이러한 것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이 병들고 약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원인에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러한 원리와 같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우리의 몸을 더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선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해야 하듯이 영의 양식인 말씀을 항상 먹고 영적인 훈련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체력을 길러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공고히 해 나가야 합니다.

2. 이 시대에 우리는 공고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공고하다는 말은 ‘굳고 흔들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혹의 소리가 들려오고, 비 진리의 소리가 밀려올 지라도, 단단하고 요동함이 없이 굳센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주 안에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6절)
우리는 예수를 주로 받았습니다.
곧 그분과 그분에 대한 말씀 들었고 알았습니다. 
이것을 더 온전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말씀의 지식을 온전히 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신앙’은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신앙 =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
신앙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설득력 있는 이성’입니다.
감정적인 신앙은 그 감정이 무너지면 흔들립니다.
기적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논리 가운데 서 있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종교개혁이 성공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만 있었고 [칼빈]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과연 성공했을까? 라고 반문을 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했고, (물론 그 이전부터 개혁의 바람이 조금씩 일어났었습니다.)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라는 ‘불붙는 이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성 그 자체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을 행하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삶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어떠한 혼란과 혼동으로 부터도 자유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다 말씀하신 후, 마지막 결론으로 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바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위에 지은 집 비유입니다.
거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으니....”
이 집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위에 지은 집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큰물이 불어나면 곧 무너지고 맙니다.
쓸려 넘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말씀을 듣고 보고 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힘쓰십시오.

2) 그 안에 뿌리를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신앙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자라가야 합니다.
본문 7절에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그랬습니다.
기초가 든든한 빌딩은 웬만한 지진에도 끄떡없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기초가 부실할 때, 뿌리가 얕을 때, 넘어집니다.

태풍이 몰아치게 되면, 가끔 강풍에 넘어진 길거리의 나무들을 보게 됩니다.
나무는 큰데 길가에 쓰러져 있는 가로수를 보면 새삼 느끼는 바가 큽니다.
뿌리가 얕거나 지만이 약한 나무는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뿌리도 깊어야 하겠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지반이 든든해야 합니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초대교회가 핍박과 유혹 속에서 견고하게 서서 신앙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이게 된 이유는 바로 신앙의 뿌리를 그리스도 안에 깊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영적인 뿌리를 내리십시오.
뿌리를 내릴 때 견고히 설 뿐 아니라 성장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성장하고 결실을 맺습니다.

오늘 말씀에 “세움을 입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곧 “자란다, 성숙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여기에 자라갈 때 우리는 청년, 아비의 신앙으로 가게 되고 비로소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의 신앙은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아직 분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호기심이나 유혹 속에서 영적인 미아가 되기 쉽습니다.

******한 방송사에서, 미아발생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에 대한 조사와, 5세 이하의 아이들에 대한 실험을 했었습니다.
미아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 어디겠습니까?
사람들은, 놀이 공원, 지하철역 등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앞 등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이를 가장 많이 잃어버리는 곳은, 집 앞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시간 개념이 없고 호기심이 많아 그 호기심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 어디로 자신이 벗어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실험을 했습니다.
공원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아이에게 10분만 기다리라도 하고 어머니 홀로 화장실 간 사이, 아이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어떤 호기심이 나타나면, 그쪽으로 움직이고 맙니다.
그 움직임이 계속 됩니다.
아이를 좇아가 보니 어머니가 기다리라는 화장실에서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길이 엇갈려 결국 미아가 되고 맙니다.

아이에게 십분 이라는 시간 개념은 어른들의 몇 시간입니다.
아동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아이에게 1시간은 한 달 이상의 시간과 같고, 아이에게 한 달은 영원의 시간과 같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이입니다.

아이의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되고 맙니다.
열매를 낼 수 없을 뿐 더러 분별력이 없어, 세상의 유혹과 호기심에 끌려가고 맙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입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감사함이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7)
긍정과 감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귀가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향력 있는 일을 하게 됩니다.

***** [톨스토이]를 변화시킨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지식인이 아닙니다.
농촌에서 농사짓는 어릴 적 친구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어려서는 신앙생활을 했지만, 청년이 되고 부터는 세상의 출세를 향해 달려가느라 신앙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 ‘모스크바’의 사교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생활 역시 그를 만족케 하지 못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작품을 써 돈을 벌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공허함 속에서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방황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 시골의 어릴 적 친구를 찾게 되었습니다.
비록 농사지으면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매우 밝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한 친구에게 자신의 고민을 말하면서 ‘자네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고 물었을 때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네.’
[톨스토이]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서 비로소 자신이 살아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와 쓴 소설이 바로 ‘부활’입니다.

감사의 사람에게는, 마귀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마귀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은, 찬송과 감사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사람은,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골 3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3. 우리는 이 기회를 회복과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통해 방어로 그칠 것이 아니라, 전도의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번 우리 월드컵선수들이 도고와 싸울 때에 전반전에서 한 꼴 지고, 전력도 약했습니다.
경기 전날까지도 감독문제, 선수들의 사기 문제가 안 풀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에는 도고와의 경기에서 삼 사 점정도 이겨 놀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러더니 후반전에 들어와서, 전술을 바꿔서 안정환 선수를 넣고, 수비위주가 아니라, 공격 위주의 경기를 펼치면서,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통쾌한 경기였습니다.
내일 있을 경기에서도, 그렇게 멋진 경기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입니다.
복음을 바로 알리고 전함으로, 전도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더욱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처럼 사회에서 기독교적 관심이 이토록 높아졌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빈치 코드’로 인하여 우리 사회에 기독교에 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진실에 대해서 증거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와 관련해서, 아니면 다른 의문점들을 통해 질문하거나, 논쟁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겸손히 내가 왜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증거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벧전 3:15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이러한 거짓의 진실과 진리의 생명력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한다면 오히려 전도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항상 어떠한 유혹과 시험, 핍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항상 우리에게 위협입니다.
이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은, 이 의미를 바로 알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점점 성숙된 삶을 지향하면서, 감사함이 넘치는 생활을 통해, 힘과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도고와의 경기를 승리로 마치고 난 선수들 중에, 네 명의 믿음의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어깨를 겪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우리 모두도, 그렇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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