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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난은 어찌하여 (눅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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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災難- 뜻밖의 변고로 받는 곤란)은 어찌하여(눅13:1~9절)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미국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의 신학부 교수였던 ‘헨리 나웬교수’가 쓴 ‘상처 입은 치유 자’라는 책 가운데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네 왕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전 세계를 탐색하여 특수한 과학을 배운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왕궁을 떠났습니다. 오랜 세월 후에 네 왕자가 다시 한 곳에 모여 서로 배워 온 과학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첫째 왕자가 자랑합니다. “나는 한 조각의 생물의 뼈만 있으면 거기에 붙일 근육을 만드는 과학을 배웠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둘째가 “나는 뼈에 근육이 붙어 있다면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는 기술을 배웠노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셋째가 “나는 근육과 피부와 털만 있으면 사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을 배웠노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막내 왕자가 “나는 사지만 완성되어 있다면 거기에 생명을 불어 넣는 기술을 배웠노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네 왕자는 자기들이 배워온 기술을 실험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어떤 뼈 한 개를 발견하고는 거기다 각자가 배워온 대로 근육을 붙이고, 피부와 털이 나게 하고, 사지를 만들고, 그리고 생명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 네 형제들은 그 뼈가 '사자의 뼈''인 줄도 모르고 자기들의 기술과 힘만 믿고 한껏 과시했습니다. 그러자 사자가 숨을 '후'하며 토한 후 일어나더니 그 형제들에게 달려들어 모조리 물어뜯어 죽인 후 유유히 숲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의 능력이나 과학문명의 힘을 믿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는 방목하는 소떼들이 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그 소떼들의 머리가 한라산 정상 쪽을 향하여 풀을 뜯고 있으면 날씨가 좋고, 산 아래쪽을 향하여 풀을 뜯고 있으면 비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라산 기슭에 새들이 낮게 날면 비가오고, 높이 날면 날씨가 좋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상대가 한라산 소머리를 보고 일기 예보를 한다면 틀림없을 것인데, 자존심 때문에 못하는 모양이라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그토록 자랑하고 있는 과학지식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보십시오. 지난 주간에 집중 폭우로 인하여 전국이 난리 아닌 난리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이어서 강원도에 지난 27일부터 내린 2차 집중폭우로 25마을 주민 1059명이 긴급 대피했습니다. 강원도 ‘재난 안전 대책본부’에 따르면 28일 4시 당시 이번 폭우로 3개 군 44개 마을 1845세대 4738명에게 대피령이 내려진 가운데 2개 군 25개 마을 407세대 1059명이 인근 학교와 마을 회관 등으로 긴급 대피한 것으로 잠정집계했습니다.

이번 수해로 경기도에서도 안성천 일대에서만 주택 400여채가 침수되거나 파손됐습니다. 600여 명의 이재민도 생겨났습니다. 제방이 무너지면서 피해가 컸던 경기도 안성천 일대는 그야말로 폐허로 변했습니다. 대피했다 돌아온 주민들은 물에 젖은 가재도구들을 끌어내며 한숨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농경지도 8천 헥타르 넘게 물에 잠겼습니다. 폐허로 변한 보금자리를 눈앞에 둔 안성천 주민들, 평온한 삶을 되찾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6년 6월 28일부터 이틀간 충북도내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3명이 숨지거나 실종되고 주택 249채가 침수되거나 주저앉아 335명의 이재민이 발생 하는 등 피해가 잇따랐습니다. 이번 폭우는 금광면 무려 358mm, 대덕면 239mm가 쏟아져 안성천 지류 조령천과 월동천 등 2곳의 제방이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유실, 가옥 침수피해가 커졌습니다.

해마다 지리산만 해도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실종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더욱이 가슴 아픈 것은 이들 모두가 휴가를 즐기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리라고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야말로 기습폭우, 집중 호우로 이한 재난이 해마다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마다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과학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닙니다. 중국의 양자강에도 수해[水害] 가 일어나면 둑을 폭파하고, 땜을 폭파하는 등 별수를 다 써 보지만 속수무책입니다. 해마다 계속 희생자 수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도, 구라파도,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폭우 아니면 폭염으로 인해 세계가 아우성입니다. 과학자들은 ‘엘니뇨현상’ 영향 때문이라고들 이야기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일련의 현상들에 대하여 어떤 분들은 극단적인 발언까지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그렇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2002년도에 큰 수해가 있었고, 2006년에도 '붉은 악마'를 외쳤기에 큰 수해가 생겼는데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이런 발언은 참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 피해를 입지 않은 우리는 그들보다 낫다는 얘기가 되고, 나는 그들보다는 의롭다는 얘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회주의 국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산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저들에게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못 믿어서 이렇게 못살고 당신들은 잘 믿어서 그렇게 잘사는 것이냐?" 는 것이지요.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는 아무리 잘 믿어 봐도 별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마치 자신들만 잘 믿어서 축복받은 것인 양 생각하는 것을 저들은 굉장히 역겨워 하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다보면 '복의 개념도 다분히 물질적인 것이 되기 쉽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을 물질로만 계산하려고 드는 실수에 빠지게 됩니다.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물질로 계산하려는 잘못을 범하고 또한 자칫하면 상대방을 정죄하고, 자신을 의인으로 몰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문맥으로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시간은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우리는 '세기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말론적인 때를 살아가기 때문에 크기를 달리할 뿐이지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말세의 징조들이 점점 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언가는 아닙니다만 앞으로도 계속 재난들은 계속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대형사고가 터졌느냐? 왜 이런 천재지변이 일어났느냐?'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들을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며, '주님께서 이런 사건들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가슴 아픈 사건들이나 종말론적인 징조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사건을 당한 당사자들의 문제가 아닌 오늘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죽은 자들의 문제가 아닌 산자들의 문제입니다. '살아있는 우리는 마땅히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사건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재난에 대한 주님의 시각을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과, 이 사건에 대한 주제를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12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말씀 입니다. 12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종말론적인 교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13장에 넘어와서는 회개를 촉구 하십니다. 회개에다 그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제 보세요. 예수님이 드신 역사적인 두 가지 사건은 이렇습니다.

먼저, 갈릴리 사람들의 살해 사건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사건들 즉 식민지 통치자인 로마 총독과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생겨나는 인명 살상 극은 당시에 흔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 명 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虐殺)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3절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1년에 세 번씩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물을 드리며 절기를 지켰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데, '빌라도가 군사들을 보내어 그 자리에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제물에 피가 섞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빌라도와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안티파스’ 사이에는 정치적인 알력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이었다고 합니다. 정치적인 문제에 죄 없는 백성들이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왜 저들이 죽어야만 했습니까?

또 한 가지 사건은 4절을 보면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흔’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습니다. 본문에서 말해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보셨으며,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4절에서 저들이 사건을 당하지 않은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참사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저들이 그런 참사를 당해야만 했습니까? 저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도 아니라면 왜 하필이면 저들이 그런 재난을 당해야만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님은 이 사건들을 통하여 산자들에 대한 회개를 촉구 하실 뿐이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회개에 대하여 몇 가지로 교훈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재난을 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계속되는 전 국토에 쏟아진 폭우로 인한 수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시각으로 주님처럼 접근하며, 해석해야 합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Ⅰ. 진정한 회개(悔改)의 시작이 있어야 합니다.

두 사건의 강조점은 2절, 4절에 있듯이 “죄가 더 있는 줄로 아느냐?"와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이 질문이 품고 있는 대답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 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죄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과 우리가 꼭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회개는 시작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회개(悔改 repentance/conversion)'는 '길을 바꾸다.' '돌아오다.'를 뜻하는 헤브라이어<?b>를 사용하여 악을 피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향하는 행위, 즉 생활방식을 바꾸어 생활 전체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행위를 뜻하였습니다. 후기에 와서 회개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행위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겼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 귀의하여 실제 생활의 개선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피스트레포(epistreph?)>와 '내적 방향전환을 나타내는' <메타노에오(metanoe?)>를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흔히 우리는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죄가 더 있어서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인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병원에 세 번 수술해서 누워있는 여 집사님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심방 갔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나 하고 올 일이지, 그 권사님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니? ‘얼마나 죄가 많았기에 남들은 한 번도 안 받는 수술을 세 번씩이나 받았느냐? 이번 기회에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집사님이 누워서 들어보니 기분이 보통 나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래서 ‘이건 뭣 때문에 와서 불난 집에 부채질 하나' 싶어서 한마디 했습니다.

“그런 당신은 얼마나 죄가 많아서 남의 집에 시집와서 남의 대를 끊어 놓았소." 하고 쏘아 붙였답니다.

심방 갔다가 ‘장이야 멍이야' 옥신각신 한바탕하고 왔습니다. 우리는 남이 당한 일에 대해서는 쉽게 ‘죄 문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중심으로 제자들 간에도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 입니까? 본인 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본인도, 부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질문의 내용을 달리할 것입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라는 그 질문을 바꾸어서 주님의 시각대로 “왜 탑이 내 위에 무너져 내리지 않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왜 빌라도가 나 아닌 갈릴리 사람들을 죽였을까?"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남의 죄가 아닌 나의 죄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곧잘 하는 질문이 “하나님은 왜 저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각대로라면, “왜 하나님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필이면 나를 구원하여 주셨을까?"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저들과 나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죄인인데 말입니다.

오히려 저들보다 더 악하면 악했지 결코 의롭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이런 자세에서 부터 진정한 회개가 가능해 집니다. 문제는 저들보다는 내가 낫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진정한 회개를 막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눅18장에 나오는 교만한 바리새인의 자세보다는 오히려 본문에 나오는 과원지기와 같은 마음이 필요 합니다. ‘열매가 없는 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책임인양 생각하는 그 자세’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두루 파고 걸음을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회개가 있을 뿐 아니라, 모든 문제의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마치 남이 회개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보니까 정치가들이 회개해야 한다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예외인양 생각하고 있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시끄러운 것은 ‘나는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개 때문' 이라는 것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외에 보여 진 재난이나 수해나 고통이나 사고나 어려움을 보고 회개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둘째. 회개에도 때가 있슴을 알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보세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포도나(시 80:8-11; 사 5:2) 무화과나무(렘 24:3; 호 9:10)로 비유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포도원에는 여러 가지 과실수들이 함께 심어졌습니다(왕하 18:31;미 4:4).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주인의 기대에 어긋나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를 심은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하며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참된 회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실수(果實樹)가 과실을 맺지 못하므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상실했으며, 다른 하나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땅만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 쓸모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는 명령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찍어버리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했을 때 여기서 '찍어버림'은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의 징벌의 수준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며(Marshall),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 가해지는 심판의 최후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마 3:10; 7:19; 21:18-20).

그러나 과원지기를 보세요. 마치 멸망 받아야 할 소돔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렸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키며(창 18:22-32),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자적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는 장면처럼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걸음을 주리니"라며 간청을 합니다.

결국 과원지기로 말미암아 심판이 유보 되었습니다. 심판이 없어 진 것이 아닌 유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3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금년 한해 또 참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인내하심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삼풍백화점 참사 가운데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분이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보너스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화점이 무너질 그때 자신도 죽었어야 했는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은 덤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런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은 우리까지도 덤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만약에 나의 행위대로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행하셨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 없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하나님의 오래 참아 주심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여기 서게 되었고, 그리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죄를 짖는 그 현장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무슨 얘긴지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당장에 벼락을 맞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아 주셨고, 인내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그 큰 인내와 긍휼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이야기 하고, 사랑을 얘기 합니다만 그 사랑, 그 긍휼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반대로 이야기하면, 지금이야말로 긍휼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고후 6:2절에서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면서 초청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재난이 임하지 않은 것은 나로 회개 하라는 기회로 알고 은혜에 동참하는 결단이 이루어 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경고, 이런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선용하지 못한다면 그때에는 달리 방법도,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망하고, 나도 망하고 다 망한다는 사실입니다.

13:9절에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라고 분명히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도록 유보(留保)해둔 심판까지의 기한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때가 기회가 지나기 전에 회개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셋째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9절 말씀과 연결되어지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회개란 죄의 문제를 뉘우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이에 합당한 열매 문제입니다. 과원지기는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상태에 달린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해 주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줌으로써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회개를 하느냐 안하느냐의 결정은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두고 설명해 봅시다. '가룟 유다는 뉘우쳤고,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뉘우침에서 한 걸음 나아가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눅 3:8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칩니다. 바울도 행 26:20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문제에 대해서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모델링은 누구입니까?

눅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회개'의 경우입니다.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놓고 구체적으로 회개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때에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형제와의 관계에서 뒤틀린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잘못했습니다." 했으면, 이제는 본인 당사자를 찾아가서 ‘미안합니다.'라는 사과 정도는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개 했으면, 사람 앞에서도 회개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 입니다.

욥을 괴롭혔던 그의 세 친구를 향하여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나에게 제사 드리는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을 찾아가서 사과하라는 것입니다.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면 내가 그 기도를 받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감상적인 눈물로 회개가 이루어진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회개에는 열매가 맺혀져야 합니다.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의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분명한 열매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은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어서 망한다는 사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어서 찍힘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로마서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이냐? 죄 없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32:1절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은 죄 사함의 복입니다. 종말론적인 징조들이나 여러 가지 재난과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 이와 같은 때에 우리 가정과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회개하는데 있습니다.

저는 이번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촌에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재난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되었구나. 나라고 그 자리에 있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미지의 삶을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지난 한 주간 무슨 생각들을 했습니까. 수해의 현장에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으로 인해서 감사한 것입니까? 다행으로 생각한 것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의 옷깃을 여미는 시간,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바로 믿지 못해서, 바로 살지 못해서 이런 사건들과 재난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책임의식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죄가 아닌 바로 나의 죄, 우리 민족의 죄를 생각하면서 참회 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형 참사, 대형사건, 대형 재난들을 여러 번 겪다보니 어지간한 사건에 대해서는 무감각해 졌습니다. 뭔가 거기에 뼈아픈 메시지가 있고, 하나님의 음성이 있건만 우리는 무감각해 졌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인데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영국 황실에는 '휘핑보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왕자를 때릴 수 없으니까 왕자와 나이가 비슷한 친구를 데려다가 왕자 옆에 앉히고, 왕자가 공부를 하지 않거나, 성적이 떨어질 때에 또는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는 그 친구가 대신 매를 맞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회사로 말하면 '술 총무'와도 같습니다. 사장이 손님 접대하면서 계속 술을 마실 수 없으니까 술 총무를 따로 두고 대신 마시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소년은 왕자 대신 종아리를 맞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합니다.

자, 보십시오. 왕자는 자기 친구가 매를 맞을 때에는 깨달아야 합니다. 왜 저 친구가 매를 맞는지를... 그런데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어, 저 친구 또 매를 맞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보지?"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왕자요, 구제불능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빨리 깨닫습니다. 나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에스라 9, 10장에 보면, 에스라는 온 민족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데, 마치 자기가 지은 것인 양 울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의 그 마음, 그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다시 한 번 살필 수 있는 시간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나 한 사람 한사람의 겸허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이 이 민족 가운데 함께 하실 수 있기를 중보 하는 기도 자, 사랑의 실천자들이 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기도]

긍휼이 풍성하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도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구합니다. 계속되는 수해의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과 지역이 많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어 주옵소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바로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여,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이 민족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구원받은 저희들이 먼저 정신을 차리게 하옵소서. 저희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재난을 보고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교훈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지금 회개하오니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무엇보다 저희들이 근신하는 자세를 가지고 깨어 있게 하시고, 빛을 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움을 당한 이웃과 민족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서 일어설 수 있게 하시옵소서.

지금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우리 형제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신속한 복구가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어려움에 동참하는 마음과 헌신이 있도록 역사해 주옵소서.

고난의 현장에 찾아오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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