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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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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1. 섬김의 공동체

우리 교회의 비전 가운데 하나는 “봉사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이웃을 적극적으로 돕는 교회가 되는 것이죠. 봉사의 삶은 성도와 교회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2.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1)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걸고 넘어지려는 술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질문으로 되 물으셨습니다. 그는 전문가답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요약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한 것으로 정말 100점 짜리 대답이었습니다. 과연 율법의 전문가다운 대답이었습니다.

이 명쾌한 답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 예수님은 애초 자신에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리까?”라고 물었던 그 사람에게 그가 대답한 그대로만 산다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계이자 율법 전문가들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율법이 진리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안다고 해도 율법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만 한다면 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 속에는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질문을 한 그 사람이 사실 그대로 행해본 적이 없기에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도 알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2)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율법과 자신의 이러한 한계도 파악하지 못한 율법사는 예수님의 칭찬에만 고무되어서 질문을 하나 더 합니다(29).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 사람은 율법을 아는 것에는 결코 남에게 뒤질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대로 살아보려고 진지하게 노력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해 보았다면, 어떤 인생도 율법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우리의 이웃은 …

이런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대답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어떤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미터 높이에 있는 도시이며, 사해에서 가까운 여리고는 해면보다 400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30Km 거리이지만, 해발의 높이 차이가 자그마치 1,100 미터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아주 심한 급경사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길도 아주 나빠서 마치 채석장같이 돌과 바위 투성이인 길이요, 또 광야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터널처럼 좁게 나 있으며, 심하게 꾸불꾸불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길은 통행량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으로 오고 가는 순례자들과 성전 예배자들, 그리고 여리고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는 오아시스가 있어 각종 과일과 농산물이 풍요롭고, 요단강 동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군사 및 경제의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통행하는 사람들이 많고 게다가 돈을 가진 상인들이 많이 다니는 길인데다가, 험하고 외진 광야길이다 보니 강도들에게는 안성마춤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길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통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유대인은 혼자 이 위험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죽도록 두들겨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웃이 필요한 것이죠. “마침” 제사장 한 사람이 거기를 지나가다가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제사장은 늘 성전에 머물면서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하는 사람이요,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니,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누구보다도 잘 살펴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은 사태파악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상태로 보아 아직 주변에 강도들이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주변을 살핀 후에 빠른 걸음으로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잠시 후, 레위인 한 사람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이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레위인 역시 율법사가 답한 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정신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제사장 다음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죽어가는 그 사람을 그대로 버려 둔 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본문 31절과 32절에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 둘 다에게 똑 같이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그들은 한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과,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충분히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했고, 그래서 아주 신속하게 지나가 버렸습니다. 율법의 전문가로서 이웃 사랑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달달 외우고, 그것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때로는 율법대로 살지 않는 백성들을 향하여 책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않으면 그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때에 맞추어’ 자신들이 지나가게 된 것이 정말 다행하고 감사한 일로 여겨질 것임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서로 못 본척하고,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상황에서도 피해가는 사이들입니다.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말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인간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개 돼지만도 못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이 볼 때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이 떠들면 ‘어디서 강아지가 짖는구나’ 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유대인들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길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유대인을 만나면 어떤 생각이 했겠습니까? ‘그 참 잘됐구나!’, ‘고소하다’, ‘보기 싫은 유대인 하나 줄었구나’, ‘강도들이 이럴 때는 쓸만하단 말이야’ 이러면서 “보고 피하여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그 사람의 심장이나 내장이 찢어지듯이 아픈 것을 뜻합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지금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너무나 괴로워했습니다. 그가 원수 그 이상인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를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단계의 조치를 취하여 그를 돌보았습니다.

첫 단계로 먼저 그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당시 진통제로 쓰였던 기름을 발라 아픔을 없애고,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 소독을 한 후에, 싸매어서 지혈을 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단계로 그 사람을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자신은 나귀를 끌고서는 쉬지 않고 걸어서 여리고 주막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여리고가 원래 자신의 목적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치료할 목적으로 하루를 더 머물면서 돌보았습니다. 그 다음 단계로서 그는 자신의 목적지로 가면서 여관 주인에게 계속적인 치료를 부탁합니다. 예정한 시간에 목적지에 가지 못해서 중요한 약속을 어겼을 수도 있고, 사업상의 손해를 입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관 주인에게 당시로서는 거금인 두 데나리온, 노동자의 이틀 치 품삯을 주면서 ‘돈이 더 들면 나중에 갚겠노라’ 하면서, 다시 돌아 올 것을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이 예화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의 진정한 이웃은 같은 동포나 이웃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웃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쉽게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의 이웃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지금 강도 만난 사람,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 지금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내가 중심이 되어 도울 사람, 혹은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입장에서 내가 좋은 이웃이냐 아니냐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이 볼 때 좋은 이웃입니까? 나쁜 이웃입니까?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이웃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삶의 강도를 만나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강도 만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가난이라는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나 혹은 병이라는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애라는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버림받거나 이혼을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힘만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의 기쁨과 평안을 잃은 사람들, 가정이 무너질 위기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짓고, 세속적인 것을 귀하게 여기고, 육신적인 것을 영적인 일보다 앞장세우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의 강도 만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그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아파트 단지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할머니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갔고, 경찰들이 사고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들이 찾아간 할머니의 아파트는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것들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건강상의 이유일지도 몰라 보험증에 기록된 병원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에 비해 건강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경찰관은 할머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수첩을 펼쳐보던 경찰관은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는 낮은 목소리로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의 수첩엔 365일 동안 똑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오지 않았음.”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아파트에 …” 어느 누구도 할머니를 찾지 않는 지독한 외로움이 할머니를 죽게 한 범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도와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가 누구든 지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지금 중부 지방의 집중 호우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전 거창 일대와 지리산 자락에서 물난리를 만난 분들이 있습니다. 북한도 유례가 없는 홍수 피해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들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그들을 돕는 사람이 바로 그들의 이웃입니다.

4)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

여러분, 혹시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타인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거나 본 경우, 자신이 크게 위험하지 않으면 타인의 위험을 제거할 의무가 있다.”

이 법은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포르뚜깔, 스위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등의 유럽 국가들이 오래 전부터 헌법에 이 조항을 두었했습니다. 프랑스 형법 제 63조 2항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조해 주어도 자기가 위험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구조해 주지 않은 자는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 혹은 360프랑 이상 1,500프랑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독일 형법 제 330조 C항 “도움이 필수적이고 상당히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 도움을 주지 않은 자는 징역 1 년 이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폴란드(1932), 러시아,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 같은 옛 공산주의 국가들의 당시 사회주의 형법에도(1960) “만약 …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위험이 없는데도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나 혹은 관계기관 … 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6개월 … (이내의) 노동을 하거나 … 처벌받을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중국 형법(1929) 제 15조와 일본 형법에도 이것을 유기죄(遺棄罪)로 취급하여 ‘구조 의무가 있는 자가 구조를 유기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구조 의무가 없는 자가 유기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돕거나 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법적 제재를 가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법이 없는 나라는 우리 나라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를 돕지 않으면 범죄자가 됩니다. 국가가 그를 범죄자로 볼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그런 사람을 범죄자로 보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섬기는 성도, 봉사하는 교회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은 “이웃을 섬기는 봉사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과, 우리 이웃에게 가장 필요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을 돌보는 것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미국인이 실제로 겪은 일인데요. 어느날 밤, 그는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치는 동네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 수풀에서 한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떤 소녀가 치한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망설였습니다. ‘뛰어가 도와 줘야 할까? 경찰에 신고를 먼저 해야 할까?’ 그가 잠시 망설이고 있는 사이, 소녀의 비명소리는 점점 더 다급해지고 있었습니다. 빨리 행동을 취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일단 소녀를 ‘구하고 보자’고 생각을 하고서는 용기를 내어 그 수풀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치한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한참을 싸우던 치한은 도망을 쳤습니다. 치한이 도망한 후, 그는 소녀에게 “걱정 말아요. 이젠 안전해요”라고 위로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 기절할 뻔했습니다. “아빠! 아빠 맞아요?” 수풀 속의 소녀는 바로 그 사람의 막내딸 캐서린이었습니다. 지금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은 결국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을 돕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을 적극적으로 돕고 섬기면서 사십시오! 그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그들을 도움으로서 그들에게 위로와 때로는 생명과 그리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웃을 돕는 길은 여러분 자신을 돕는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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