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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행복하려면 이런 사랑을 하자 (요일 3: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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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 아침에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젊은 형제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외로움과 지친 모습으로 그리고 근심의 빛이 가득한 절망한 모습으로 혼자 외롭게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우리 교회의 형제와 자매들은 잔치가 있었는지 음식을 나누며, 차를 마시며 여유 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형제는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아주 잘 아는 형제였기 때문에 저를 찾아 온 것입니다. 저는 그 형제를 맞이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비가 오고 있는 문 밖에서 그 형제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에 힘을 잃어 버린 상태에서 말하기를 자기는 너무 삶에 지쳐 버려서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최선을 다해 우리의 인생이 고통 중에 있어도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능력인지에 믿음을 잘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목이 쉬도록 그를 붙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의 귀가 겨울에 추위를 막아 주는 귀마개와 같은 두꺼운 덮개로 막혀 있었습니다. 저는 붙들고 그에게 더 자세히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외국인에게 붙들려 어느 방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몰몬교 선교사였습니다. 저는 그를 붙들기 위해 소리를 치면서 안돼라고 했지만, 그는 내가 손을 뻗어 붙들기 전에 그만 그 문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잠을 깨었고, 그 꿈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납니다.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 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진실로 저로 인해 행복해 지기를 원합니다. 진실로 몸된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서 가정이 행복해 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물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일까요? 그것도 행복의 한 조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권력이 있다고 행복해 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에멧트 팍스라는 분이 사랑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고,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으며,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건널 수 없는 해협도 없으며,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는 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 지도,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거대한 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입니다. 충분히 사랑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분의 말대로 충분한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힘들고 어려운 매듭들을 모두 녹여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땀흘리며 수고하는 이유의 근본은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벌기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고, 손과 발이 부릍트며 얼마 안되는 돈을 벌기 위해 부업에 매달리는 것도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수고나 땀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히려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기뻐할 사람들과 행복해할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우리가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게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땀을 흘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늘 행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크고도 넓고, 깊은 사랑을 우리가 받았고, 그분의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행복한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헌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귀신에 붙들린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가복음 5장에는 귀신들린 거라사인의 어느 사람에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죽은 사람들이 거하는 무덤에 함께 거하고 있었습니다. 산자가 죽은 자들과 함께 거하니 행복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밤이고 낮이고 소리를 지르면서 산을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돌로 자기 몸을 치면서 스스로 자기를 학대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묶어 둘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했고, 가까이 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외로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녔고, 머리를 풀어져 있었고, 상한 몸으로 멍들고 피가 흐른 핏자국이 몸의 여기 저기에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귀신들린 사람이 바로 영적으로 볼 때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젊은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밤 거리를 해매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배꼽도 내놓고, 치마도 짧게 입으면서 더욱 몸을 드러내고, 밤낮 벗은 몸으로 다니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몸에 구멍을 이곳 저곳 뚥고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부모가 그들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묶어 둘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즐거운 것같아도 미친 웃음이며, 의미가 없는 인생일 뿐입니다.

  이런 삶이 어디 젊은이들에게만 있는 것입니까? 30대나 40대나 50대 심지어 60대를 넘어 7-80대에도 인생의 공허함과 마음의 멍자국과 핏자국을 이곳 저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자신들의 한을 풀 수 없기 때문에 술과 마약과 섹스로 풀려고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더 쌓이게 할 뿐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귀신과 마귀와 어둠의 영들에게 붙들려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2:14-15절에는“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와 세상에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리와 참된 행복을 알지 못하는 영혼이 눈 먼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함이며, 인생의 무거운 짐에 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명기 33:29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16절에는 분명히“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은 이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32절 말씀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4:19절에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 가도록 하기 위해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풍성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면서 구원하신 그 하나님과 우리의 생활에서 필요를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크게 느낄 때 우리는 어떤 삶의 환경 속에서도 늘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께서 우리가 염려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이제부터 행복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할 때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14절과 15절에서 보듯이 우리 자신들 속에 미움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엄청난 중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또한 공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손에는 엄청난 수의 병균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면서 우리들의 생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기는 5분만 들이키지 못하면 우리는 죽거나 혹은 식물인간이 됩니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면 죽음에 이르는 대형사고가 발생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은 병균을 무시하면 수천 수만명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실은 우리 속에 있는 자리 잡고 있는 미움이라는 마음입니다. 시기와 질투와 남을 무시하는 이러한 미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성경은  살인 자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칼과 창으로 사람을 찌르고 죽여야만 살인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 마음에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죽이는 살인적 행동이라고 했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당연히 우리 속에서 미움의 마음을 지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는 말을 피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칭찬과 권명과 위로의 말을 해야 합니다.

  어느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쓴 글에 64번과 65번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과거에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키순서로 번호를 정했는데, 난 약간 큰 키라 약 70명 중 64번이었습니다. 우리반은 남자들 뿐이라 누구의 주먹이 센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친구들은 서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주먹질을 하기도 했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65번인 내 짝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내 짝은 반에서 힘 깨나 쓰는 녀석이었기에 약간 겁이 났지만 용기를 내어 냅다 주먹을 몇 번 날렸습니다. 65번은 맞더니 당황해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움인지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주먹 한 번 못 날리고 억울하게 몇 대 맞은 65번은 분해서인지 수업 시간 동안 '너 죽었다'는 듯이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더군요. 솔직히 전 몹시 떨었습니다. 수업 종이 울리면 보나마나 맞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어떻게 수업 40여분이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종이 울리자 65번은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난 속으로 "난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손을 내밀더군요."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우리 사이 좋게 지내자." 의외였습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전 맞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 전 가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분이 가득하고 억울함을 느낄 때면 가끔 65번이 생각납니다. 그때 65번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상처 준 사람들에게 손 내밀지 못하는 나로서는 지금도 나에게 손을 내밀던 짝의 그 용기가 부럽기만 합니다.

  행복은 미움에서 벗어사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결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들이 미움의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야 합니다. 17절 말씀에는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받는 것에 있지 않고, 나눔에 있습니다. 받는 사람은 기쁘겠지만 주는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어느 날 희귀한 혈액형을 가진 아이가 급히 수술을 하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피가 모자라 생명이 위독해지게 되었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지만 그 혈액형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식구들 중에서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을 검사했는데, 그 아이의 어린 동생이 같은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워낙 시간이 촉박한지라 어린 아이지만 급한 대로 수혈을 하고자 했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애야, 지금 형이 몹시 아프단다. 어쩌면 하늘나라로 갈지도 모른단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네가 너의 피를 좀 형에게 주어야겠다. 좀 아프겠지만 형이 다시 살수 있단다. 어떻게 하겠니?”아이는 한동안 말이 없이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수혈이 끝나고 모든 주사 바늘을 뽑았는데도 그 아이는 눈을 감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애야 다 끝났다. 근데 왜 눈을 감고 있지?”아이는 말했습니다.“하늘나라에 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랬습니다. 그 아이는 헌혈을 해본 적이 없기에 자신의 몸에서 피를 뽑아서 형에게 주고나면 자기는 곧 죽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사가 또 물었습니다.“애야 그럼 넌 네가 죽는 줄로 알면서도 왜 형한테 헌혈을 한다고 했었니?”아이가 말했습니다.“네, 저는 형이 좋거든요”곁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아무 말을 못하고 울고만 있었습니다.

  사랑은 나눔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재능을 나누기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물질을 나누기 원합니다. 나눔으로서 여러분은 행복해 질 수 있고, 나눔으로서 누군가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나눔으로서 여러분은 자신들이 진리에 속해 있는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말씀을 들었으니 이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헌신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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