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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키시는 하나님 (시 121:4~8, 살후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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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인도 아크발 황제 때에 베발이라는 대단한 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황제가 어전에 나오더니 벽에 줄을 쫙 그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그대들은 내가 이 벽에 그어놓은 줄을 짧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 단, 이 줄에 절대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일체 손을 대지 않고 이 줄을 짧게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그 줄을 짧게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해 보입니다. 손도 안대고 하라니 더욱 난감하니다. 손만 대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 베벨이 돌연히 나섰습니다. 그는 벽 쪽으로 성큼 다가가더니 그 줄 바로 밑에 다른 줄을 하나 그었습니다. 조금 더 길게 줄을 하나 그은 것입니다. 다른 줄이 조금 길어지니 위에 줄은 상대적으로 짧아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의 능력이란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 강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세상의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크신 주님은 위대하시고, 영원하시고, 절대적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재하십니다. 그래서 졸지도 않고 지키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합니다.

  낙타의 눈은 참 신비하게 생겼습니다. 어떤 이는 낙타를 보면 창조의 신비를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낙타를 사막의 배라고 부릅니다. 낙타는 모든 것이 사막에서 여행하고 견디기게 가장 적절하게 창조되었습니다. 눈썹과 눈두덕은 길고 두껍습니다. 그래서 사막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와도 낙타는 눈을 감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눈동자는 겹겹이 보호장치가 있습니다. 눈썹이 눈의 보호장치입니다. 눈물이 눈의 보호장치입니다. 눈꺼풀이 눈의 보호장치입니다. 눈꼽도 눈의 보호장치입니다. 눈은 본능적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지키시는 하나님은 본능적으로 백성을 지키고 감싸십니다. 애굽사람을 수장하고 이스라엘을 지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내가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키심을 체험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이사야 43:6에는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 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시편은 다윗의 시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체 150편 가운데 다윗의 시는 73편입니다. 모세의 시가 하나 있습니다. 아삽의 시 12, 고라의 자손의 시 11, 솔로몬의 시 2, 에단의 시가 하나 그리고 작자를 알 수 없는 무명의 시가 15개입니다. 오늘 다윗의 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받기를 바랍니다.

  6월은 보훈의 달입니다. 국가를 위해 목숨를 바치고, 땀흘려 수고한 애국지사를 기억하고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달입니다. 요즘은 애국과 매국이 혼돈되는 시대이기에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기피를 인정하여 군대에 가는 사람들만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다윗을 통하여 우리 나라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이 보훈의 달에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지키십니다.

  시편 121:7에는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은 부분적인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일을 하나님은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 전재이 모든 것을 지키시게 합니다.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는 하나님은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가난을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삶의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지키심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 때도 독일군이 해안을 봉쇄하고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은 독일군이 방심하고 있는 쪽으로 상륙하였습니다. 반대편이 뚫린 것입니다. 인간의 지킴은 상대적이며 부분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키심은 절대적입니다. 모든 것을 온전하게 지키십니다.

  말라기 1:11에는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가 하나님의 구역입니다.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이 주인인 나라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온몸에 걸쳐 있는 수백만 개의 엄청난 고통 감지기망(network of pain sensor)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보호 욕구에 정확히 맞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감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것은 본능적인 동작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대신 보호하고 지키고 생명을 버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부하를 위하여 수류탄을 안고 산화한 부대장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구하기 위하여 몸을 던진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항상 버릴 수 있는 사랑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덮어주다란 동사에는 덮거나 가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동사의 명사형 동의어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바로 지붕(roof)이나 피난처(shelter)와 같은 단어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6개의 중요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찬양(praise)입니다. 둘째는 우선권(priorities)입니다. 셋째는 공급(provision)입니다. 넷째는 용서(pardon)입니다. 다섯째는 보호(protection)입니다. 여섯째는 찬양(praise)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문에서“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 봉쇄정책으로 비료와 농약을 수입하지 못하여 할 수없이 유기농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세계적인 유기농업의 메카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2:9에는 “그가 그의 거룩한 자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라고 합니다. 거룩한 자는 이길 사람이 없는 하나님이 친히 지키십니다.

  “Dirty is out of the place”란 말이 있습니다. “더러움이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란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리를 떠나기 쉽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여 더러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가 위험한 자리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거기에 계셔서 지키십니다. 우리가 타락한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앞에 계셔서 지키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라고 합니다. 시편 17:5에는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의 찬송을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시간에 지키십니다.

  시편 121:8에는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키시려고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주무시면 지키지 못힙니다. 자녀가 위험을 당할까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선다씽은 하나님을 인도의 오랜 관습에 빗대어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체벌할 때에 밤새 숲속 나무에 묶어둔다고 합니다. 아들은 어둠과 공포 가운데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을 묶어둔 나무 멀리서 아버지가 숨어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밤새 지켜보며 함께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께 마음 조리며 졸지 않고 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광주의 한 목사님을 어느 세미나에서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을 저를 잘 알고 있었는데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자녀가 넷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즘에는 자녀가 넷이라는 것이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여 “목사님, 대단하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알고보니 둘은 낳고 둘은 입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올해 하나 더 입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는 것만 하더라도 좋은 목회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이들이 잠을 잘 때 밤에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해주면 아이들이 알고 깨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자나 양자나 똑같이 사랑해주면서 느끼는게 많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밤을 지켜주는 목사님의 사랑과 정성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은 이런 사람의 사랑과 정성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모든 시간이 하나님이 지키시는 시간입니다.

  어느 글에 보니 독도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은 한 숨도 못자는 국가이고, 일본은 일(잃)어봤자 본전인 나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독도를 지키기 위하여 어쩔줄 몰라 합니다. 하나님이 지키실 텐데 좀더 의연했으면 좋겠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고 우리 땅을 하나님은 친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 어느 부인이 남편과 아들을 함께 전쟁에 보냈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은 죄다 부정적인 말밖에 없습니다. “죽었다, 다쳤다”는 말만 계속 들려옵니다. 자신의 남편과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궁금했지만 이 부인의 태도는 다른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얼굴 기색이 변하지 않습니다. 걱정 없이 평안하게 잘 잡니다. 사람들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그 분인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고 깨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는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깨어 있으마, 너는 자렴’. 그래서 저는 기도하고 그리고 잡니다. 하나님이 깨어 계시는데 나까지 깨어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여러분, 열처녀의 비유를 아시지요? 혼인잔치의 열 처녀 가운데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는 기름도 준비하지 않고 잠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기름도 준비하지 않고, 신랑도 오지 않았는데 잠이 올 수 있습니까? 잠이 오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잠이 옵니다. 심지어 전쟁 때는 군인들이 행군하면서도 잔다고 합니다. 서서 걸어가면서도 잠이 온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주무시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키려고, 함께 깨어 있으려고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다.

  잠을 자서는 안 되는 환경에서 어떻게 잠들 수 있습니까? 요나를 보세요. 요나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지 않고 엉뚱한데로 가면서 풍랑 가운데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정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사적인 기도를 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위급해도 쏟아지는 잠을 쫓지 못해 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17에는 바울이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키시고 구원하십니다. 실제로 다니엘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사자의 굴 속에서 함께 계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불 풀무 속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이 친히 그 속에 들어가셔서 지켜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들여다 보니 풀무 속에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 속에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3에는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합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남아프리카의 훌륭한 목회자이었던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의 시련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첫째는 나를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둘째는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은 시련을 축복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넷째는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따라 나를 시련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결국 나는 지금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훈련과 연단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동안 시련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찬송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이런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양은 방어 능력이 전혀 없는 짐승입니다. 송곳니도 없고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물어 뜯을 줄도 모르고 빨리 달리는 재주도 없습니다. 모든 짐승 가운데 공격용 무기도, 방어용 무기도 없는 가장 무방비의 짐승이 양입니다. 그래서 운동경기 팀 가운데 양을 마스코트로 하는 팀이 없습니다. 라이온스, 타이거스, 이글스, 자이안트, 유니콘스, 이런 것은 있지만 양은 없습니다. “야, 야, 우리는 양! 이겨라. 우리는 양, 무적의 양” 이런 구호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양은 약하디 약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지켜줘야 하고 목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지키십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삶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지만 우리 무리의 악을 담당하십니다. 우리를 지켜 악에게 삼키우지 않게 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개인, 국가, 민족을 하나님은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누구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지키심, 큰 손길이 우리 나라에 함께, 우리 가정과 개인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이방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새로운 세기에 세계의 당당한 중심국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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