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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국] 지켜야 할 가치 (왕상 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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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에는 이스르엘 땅에 사는 나봇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악명 높은 아합왕이 자기 왕궁 근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것을 빼앗습니다. 2절에 보면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왕의 제의를 나봇은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습니다. 3절에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고 한 말이 이유입니다.

이처럼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나봇의 행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상대는 권력을 쥐고 있는 왕입니다. 또 그보다 좋은 밭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많은 돈을 주겠다는 좋은 조건이 제시되었습니다. 만일 여기 불응하면 목숨이 날아갈 것이 뻔히 보입니다. 사실 그 일이 있고 나서 곧 바로 이세벨은 폭력배를 보내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그 밭을 빼앗아 아합에게 바쳤습니다(11-16절). 그는 결국 목숨도 잃고 포도원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억하시며 기록으로 남겼습니다(19절).

6월은 우리 민족 수난의 달로써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된 분들과 교회에서는 신앙 진리를 파수하기 위하여 순교하신 분들을 기념하며 그 업적을 되새기는 계절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될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 나봇의 포도원

나봇이 왕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만큼 그 포도원의 가치가 절대적이었겠는가라는 물음에도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사자인 나봇에게는 포도원이 단순한 물질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 분명합니다.

(1) 신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포도원으로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5:7에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의 경우 예수님께서 자기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하였습니다(요 15:1-5).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나봇의 포도원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 가치를 인정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합왕은 그것을 농사짓는 토지로만 생각하여 돈으로 사겠다고 하였지만 나봇은 그런 차원에서 거래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똑 같은 대상을 놓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치를 평가하는 경우와 세상적인 안목으로 그것을 논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2) 열조의 유업이기 때문입니다.

나봇이 아합왕의 요구를 거절한 직접적인 이유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업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3절에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찌로다”고 하였습니다. 나봇이 내세우는 “열조의 유업”은 그에게 있어서 가문의 정통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유대인들은 열조로부터 이어지는 신앙과 전통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습적으로 받게 되는 언약과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은 그의 아들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져 열 두 지파에 이르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신 7:6-8).
그런 의미에로 야곱은 자기 아비 이삭이 빌어주는 축복을 받기 위하여 에서를 제치고 그것을 쟁취하였고(창 27:18-29), 훗날 그도 죽기 전에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빌었습니다(창 48:13-20).
이와 같은 유대인의 전통에 비추어 나봇에게는 열조에게서 물려받은 그 포도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정통성으로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입니다.

나봇은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조상으로부터 분배 받은 토지를 사고파는 경우 율법의 규정을 적용하게 하였습니다. 레위기 25:23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25절에는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법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왕이라도 자기의 권력으로 이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에스겔 46:18에 “왕은 백성의 기업을 취하여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할찌니 왕이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Ⅱ. 지켜야 될 가치가 있는 것

사람마다 나름대로 최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올인 합니다. 나봇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포도원에다 자기 인생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에게 발견되기 위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포기해 버렸습니다(빌 3:7-9). 이처럼 모든 것을 걸고 지킬만한 가치를 붙든 사람은 거기서 얻는 행복에 도취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길만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가장 존귀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6:26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2:16-21에 보면 엄청난 재물을 쌓아 두고 만족해  하는 부자에게 그날 밤 그 영혼을 거두어가면 쌓아 놓은 재물이 뉘것이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습니다. 이 생명을 지켜 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마 20:28).

(2) 조국(祖國)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나라가 없는 설움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히고 바벨론에서 유랑 생활을 할 때 그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당시 그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애타게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시편 137:5-6에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고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나라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였던 에스더는 하만의 모해로 유대인이 모살당할 처지에 놓였을 때 자기 몸을 던져 그 백성을 위기에서 구출하였습니다(에 4:16). 조국이 무너지면 개인의 희망도 가족의 안녕도 보장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지키고 민족을 구하기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 하는 사람을 애국자라고 합니다.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번영과 내일의 희망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3) 믿음입니다.

옛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 죄로 풀무 불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왕은 지금이라도 신상에 절을 하면 살려주겠고 그렇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지겠다고 위협했으나 그 소년들은 끝내 신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고 풀무 불에 들어가므로써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단 3:18).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살아간 선진들의 자취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모두 믿음하나 지키기 위해 제게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35-38에 보면 이들이 믿음 때문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결박과 옥에 갇히는 일이며, 돌로 치거나 톱으로 켜서 죽이는 죽음도 당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과거 우리의 선진들도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태양신과 맞서서 감옥에 투옥되거나 순교를 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들과 싸웠고, 그들이 저지른 6, 25동란으로 엄청난 박해와 학살을 당했으나 죽음으로 진리를 파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흘린 피가 살아서 말한다고 하였습니다(히 11:4).

Ⅲ. 가치를 부정하는 세대

타락한 인간이 겪게 되는 큰 불행 중 하나는 지각이 마비되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롬 1:21-23). 곧 가치관의 전도(顚倒)를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앞서간 선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준 것을 오히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폐기처분해 버리는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나봇의 경우를 도저히 용납 못하는 현상인 것입니다.

(1) 역사의 무지 때문입니다.

성경은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후세 사람들에게 거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0:6). 지혜로운 민족은 선인들의 역사를 살피고 거기서 올바른 교훈을 찾게 됩니다. 모세는 광야역사를 회고하면서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신 32:7). 선조들이 살아온 역사적 배경과 그 시대의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 오늘의 시각으로 평가하며 단죄하는 것은 무지한 소행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선진국 대열에 들게 되고 경제 지표(GDP)10위권에서 엄청난 국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앞서간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의 덕분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초토화 된 나라를 일으키고,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며 오늘의 풍요를 가져오게 한 선인들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우리가 간직해야 될 정신적 가치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2) 불신앙적인 현상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신 33:29). 그러나 똑 같이 출애굽의 감격을 체험한 사람들 중에도 그것을 자기들 노력과 인위적인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11:4에 이들을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와 탐욕을 품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고 그 방법도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고 백성을 선동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자들입니다(출 32:1-4).
그들은 다수의 목소리를 내며 폭력을 무기로 삼아 하나님의 나라를 전복하려고 일을 꾸몄습니다. 그들 때문에 가나안 운동을 지연시켰고,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결국 자기들도 망하고 백성들도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 17:5에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내일에 대한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나봇처럼 올바른 가치 기준을 가지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지켜내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의 사촌 하나멜은 매우 영리하고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망하게 되는 것을 보고 예레미야에게 찾아와서 아나돗에 있는 자기 밭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은 십칠 세겔을 주고 그 밭을 샀습니다(렘 32:7-15). 똑 같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밭을 팔아 돈을 챙겼고, 다른 사람은 돈을 주고 밭을 얻었습니다.

하나멜은 열조의 땅을 팔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고(레 25:23), 예레미야는 형제가 가난하여 기업을 내어놓게 되면 그것을 물어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레 25:25). 하나멜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면 희망이 없다고 보았고, 예레미야는 포로에서 돌아오고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이 있는 사람은 버릴 것과 지킬 것을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라의 정체성과 신앙의 정통성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될 가치가 있습니다. (손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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