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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을 얻는 자의 행복(1) (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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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을<자격증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일정한 자격을 인정해 주고 이왕이면 그 분야에서 자격을 가진 사람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에든지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자격증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도 자격증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좀 우스운 일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생활체육 축구 3급 심판 자격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3년 전에 어렵게 땄습니다. 40대의 기준은 50m를 8초 이하에, 200m를 34초 이하에, 2,400m를 12분에 달려야 합격입니다. 그리고 필기시험에도 합격해야합니다. 이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시합에 심판을 보면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심판이 판정을 내린 대로 따라야하는 것입니다. 자격증이라는 것이 이렇게 인정받는 시대에 누구든지, 무슨 자격증이든지 따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생각해보십시다. 예수 믿는 자격증은 있을까요?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 여러분은 그 자격증을 가지고 예수 믿고 계십니까? 만약에 예수 믿는데도 자격증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격증을 딴사람만 예수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우리 중에 누구도 이런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착각하기를 목사, 장로, 권사와 같은 직임이 마치 예수 믿는 자격증쯤으로 생각합니다만 이건 크나큰 오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이 하던 짓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로 자부했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취급했습니다. 자기들이 가르치고 자기들의 요구대로 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을 믿는 자격증이 주어지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자격도 없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도 요구하기를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표적, 즉 자격증을 보여 달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변에도 예수 믿는 자격증, 즉 믿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내가 예수 믿는 자격증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기 위한자격증은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에 걸 맞는 자격증 아닌 자격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예수 믿는 사람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고 난 후에 우리가 따야할 자격증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기로 한 이상, 이제부터라도 예수 믿는데 걸 맞는 자격증을 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런 자격증을 가진 우리들을 보고 자신들도 예수 믿는 자격증을 따고 싶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잘 아는 팔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 믿는 우리들의 자격증에 대한 공부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정말 내가 예수 믿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이 말씀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예수 믿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로 거듭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상식이나 세상의 지식,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끝까지 충실하여 예수 믿는 자격을 누리는 삶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예수 믿는 자격증에 가장 중요한 것이 천국을 소유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예수를 믿는 자만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에 보면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이 복이요, 빈곤 속에 행복이 있다는 말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곧 그 누구도 가난을 좋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가난을 어느 정도 경험해 보셨습니까? 배고픈 경험을 어디까지 해보셨습니까? 사람은 배가 고프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슬퍼집니다. 여러분, 배가 고플 때 가장 예민한 부분은 어디입니까? 코입니다. 배고플 때 길거리를 지나가면 배가 꼬르륵거리기 전에 멀리 있는 음식점에서 풍기는 냄새가 그렇게 사람을 못 견디게 만듭니다. 그래서 배고픈 자의 심정은 아주 절박하면서도 배고픈 자의 생각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 순간에는 먹는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도 먹고 싶은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 까지도 다 아는 성경의 비유가 있습니다. 눅15장 탕자의 비유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집을 버리고 도망 나갔던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동기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눅15:17절에 보면“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하는 탕자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만큼 사람에게 먹는 것은 절박한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몇 끼를 굶고 난 후에 한 끼의 밥을 놓고“아! 정말 기가 막히다.”하는 만족감을 맛보실 때가 있지요? 신학교 처음 들어가서 기숙사 생활을 할 때 학교 식당에서는 토요일 날 점심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때 처음 교육전도사로 봉사하면서 받은 사례비라고 해봐야 5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교회에서 학생들 떡볶이라도 사주고 나면 1달을 버틸 수가 없죠. 그래서 토요일마다 밥을 사먹는다는 게 형편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토요일이면 양복을 입고 시내를 헤맵니다. 왜요? 토요일 예식장 앞에 가면 밥을 먹을 수가 있거든요. 멀쩡하게 양복입고 몇 몇 선배들과 함께 예식장 신세지고 하루 종일 견디곤 했습니다. 그 때의 그 한 끼란 정말 종일을 지탱 할 수 있는 행복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선배들과 통화하면서“그때 결혼한 사람들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배고픔이란 이렇게 사람을 단순하게 만듭니다. 체면도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어떻게 해서든지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헤매고, 방법을 생각하고, 노력을 다합니다. 그런 심정으로 오늘 말씀을 대해야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내 속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굶주림으로 살아가느냐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물질로 가난한 것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심령의 가난>이란 바로 이<영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채워도 채워도 더 채우고 싶어 배가 고픈 사람, 영적 허기 감을 느끼는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예수 믿는 자격증인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늘 영적으로 허전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허전한 사람은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낮에도 나오고, 저녁에도 나오고, 그러고도 배고파 새벽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배고픈 겁니다. 언제든지 가난한 것이지요.

또 하나 생각해 봅시다. 늘 배고프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소화가 다됩니다. 그래서 빨리 배가 고파지는 것이거든요. 아침에 먹은 한 끼가 종일토록 소화가 안 되어서 배 속에 남아있으면 그건 어디가 탈난 것입니다. 병원에 가봐야 돼요. 참 재밌는 이야깁니다 마는 거지는 소화불량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배고픈 사람의 대명사 하면 거지를 떠올립니다. 먹고 돌아서서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을 보고“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냐?”고 핀잔을 줍니다. 이처럼 거지는 아무리 먹어도 소화 안 되는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먹고 또 먹고 먹을 것만 있으면 다 먹어치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늘 배고파한다는 것은 영혼이 근본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건강해야 무슨 말씀이든지 먹을 수도 있고 소화도 시킬 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설교를 잘못 듣고 소화를 못시켜서 일주일 내내 그 말씀이 자기를 욕하는 말씀이다 하고 있으면 그건 병이지요.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의 허물과 부족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께 은혜와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더 이상 자기에게는 영혼의 양식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계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며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하고 우쭐댔지만 주님께서 보실 때는 정말 가난하고, 가련하고, 곤고했습니다.

세계 국가 중 54개국을 대상으로 어느 나라 사람들이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지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제일 못사는 나라, 최고로 천재지변이 많은 나라인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1위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제일 잘산다는 미국이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46번째입니다. 한국이 23번째였습니다. 이 결과는 잘산다는 것과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원래가 없었기에 1개만 생겨도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사람은 얼마를 더 가져야 만족한다고 말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가난한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다면 한 말씀 한 말씀이 행복이요,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여서 잘 소화하고 또 다른 은혜에 갈망하는 심령의 가난이 예수 믿는 사람의 자격증이며 동시에 천국을 소유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원하시는 것은 의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열매가 얼마나 있느냐도 아닙니다. 그 이전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주님! 내 심령이 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시옵소서!”하고 항복하고 나오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 두는 것은 빈부귀천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습니다. 종족구별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심령이 가난한자가 되기만 하면 천국을 소유하는 주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10년 다녔건, 20년 다녔건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신령한 은사도, 천국을 소유하는 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자격증은 더 더욱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속지 마십시오. 천하영광을 다 보여주며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하는 사탄의 말에 속지 마시기 마랍니다. 재물에 너무 배고파 허덕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재물자체는 죄악도 아니요, 재물을 많이 가지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는데 장애가 되고, 영적 가난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지도 못하고 예수 믿는 자격에 결격사유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 불행입니다. 예수 믿는 자격증인 천국소유의 행복이 여러분의 것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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