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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삼상 30:21-31, 롬 15:1-7, 마 18:3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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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 기독교 여러 교단 가운데서 가장 왕성하게 발전한 교파가 장로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장로교”로 통할 만큼 일반화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부활절 날 처음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선교사가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의 아펜셀러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한 날 한시에 한국 땅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그 후 교회의 성장에 있어서는 감리교가 장로교를 결코 따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한국 장로교의 성장은 세계 장로교 가운데 성공적으로 발전한 모델케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선교 역사를 연구하는 서양 학자들은 한국 장로교의 이런 발전을 보고 “선교 역사상 기적”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급속도로 성장한 만큼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교단의 난립 현상입니다. 우리가 속한 통합 측과 합동 측, 고신과 기장 등 굴지의 장로교단을 제외하고도 장로교 간판을 달고 있는 교단이 수십 개에 달하고 있습니다. 교단이 분열할 때마다 적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한국에 가니까 예수와 그리스도가 서로 싸우더라”는 부끄러운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맨 처음 교단 분열을 시도한 것이 고려 파였습니다. 여기서 “고려 파”라고 하는 것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교단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교단도 정식 명칭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입니다. 그럼 왜 그들이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교단을 만들었습니까?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의 기독교는 심각한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산의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등을 위시한 소위 출옥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일제의 천황 숭배나 신사참배를 목숨 걸고 거부하여 감옥에 간 분들입니다. 그런데 막상 해방이 되고 교회가 재건되는 과정을 보니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에 앞장서거나 거기 동참했던 사람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출옥 성도들이 볼 때 적어도 저 사람들은 교권을 장악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근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이래서 출옥성도들 중심으로 새 교단이 만들어 졌으니 이것이 “고려 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먼저 당시 소위 교권 파들이 마땅히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습니다. 최근에 한국 기독교 안에서도 소위 “과거사”가 문제되는 것은 그분들이 그때 회개하지 못하고 자리에만 연연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 출옥성도들입니다. 물론 목숨을 걸고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들이 볼 때 현실이 한심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때 밖에서 교회를 지키고 양떼를 먹이려고 발버둥쳐야 했던 사람들의 형편도 헤아려주는 아량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 초대 목사님이신 이 원영 목사님도 역시 출옥 성도이십니다. 그러나 고려파의 끈질긴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냥 교단에 남아서 나중에 총회장을 역임하시고, 바로 그 총회에서 일제 때 했던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서로가 다른 지체를 향하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성령도 한 분, 주님도 한 분,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 “힘써 지키라”고 한 것은 영어로 “Do your best”입니다. 그 어떤 명분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일을 합리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15:1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교회의 화평과 하나 됨을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2. 오늘 사무엘 서 본문을 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이 전개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과 그 군인들이 자기들의 근거지를 침략하고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고 모든 물건을 약탈해 간 아말렉을 응징하기 위하여 아말렉을 추격하여 마침내 승전하고 모든 것을 회복하여 개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이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도중에서 회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다윗의 군인들이 승전하여 개선하게 된 이 마당에 노략물을 분배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22절에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자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우리의 출옥성도들과 교권자들과의 관계와 방불합니다. 공을 세운 사람들이 그 공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들처럼 행동하지 못한 사람들과 사이에 금을 그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열 번 지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지당함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렇게 한다면 결국 다윗 공동체는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공과를 따지는 문제로 분열한다면 앞으로 다윗의 진로에 말로 할 수 없는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들의 공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하나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정신은 나중에 왕이 되어서도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을 통하여 민족 화합과 통일을 시도한데서 극명하게 들어났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1) 여기서 다윗은 특별히 “나의 형제들”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형제라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해야할 관계이지 공과를 따져서 정죄한다든지 배제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해야할 우리 서로간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서로 형제가 되었습니다. 아까 롬15: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자기 기준에 의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라 그 말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 성전 건축이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믿음과 합심협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높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소위 “win-win”이 우리가 가는 공동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승리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증거해야 합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분에서 그렇게 공과를 따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비열한 사람들(mean-spirited men)”이라고 했습니다. “troublemaker”라고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기준으로 공과를 따지고 편을 가르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오직 비열한 사람들, 말썽꾼들만이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우리는 서로 간에 항상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2) 뿐만 아니라 다윗은 그 승리가 자기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굳이 공을 따지자면 그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쟁에 끝까지 참여한 자기들만의 공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잊게 되고, 형제 된 이웃을 정죄하게 되고, 그리고 하나 되어야 할 공동체를 찢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빚진 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내 빚을 갚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형제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이 마치 재판관과 같습니다. 눈의 티를 보고 왈가왈부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일백 데나리온에 지나지 않는 허물에 대하여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용서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런 우리를 “악한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만 달란트 탕감을 취소합니다. 재수감을 명합니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신앙과 교만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그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3. 그러나 다윗의 포용과 아량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26절 이하에 보면 다윗이 시글락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을 유다 여러 고을에 두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기 보면 북쪽의 벧엘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라못에 이르기까지 무려 13개의 성읍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30절 마지막에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증거 할 때 온 땅에 두루 선물을 보냄으로 “여호와께서 이루신 큰 일”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될 때 온 이스라엘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그를 추대하고, 강력한 통일 왕국을 이룬 이면에는 이와 같이 사랑의 씨앗을 뿌린 배경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에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씨를 뿌리라고 했습니다. 비록 씨를 뿌리러 나갈 때 일기가 불순해도 일단 뿌리고 나면 마침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말처럼 정말 우리 교회에 새 성전을 이루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승리와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공과운운” 하겠으며, “내로라”고 자기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더 겸손해 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놀라운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주셨는데 이 복을 우리끼리만 누리려고 한다면 주신 이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온 유다 땅에 그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큰 일을 이루셨다고 하는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되 저와 여러분 곧 그때 거기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누가 가겠느냐?...누가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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