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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폐하러가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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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관지 목사

성도 여러분, 설 연휴, 즐겁게 잘 보내셨습니까?
한국 사람들에게는 설과 추석이 양대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도 양대 절기가 있습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성탄절과 부활절입니다.
성탄절과 부활절은 너무 중요한 절기이기 때문에 그 앞에 각각 준비하는 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는 기간은 대림절입니다.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은 사순절입니다.
운동선수들은 훈련을 열심히 해야 우승할 수 있습니다.
수험생들은 수능고사 준비를 잘 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대림절을 잘 보내야 기쁜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을 잘 보내야 감격적인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 수요일부터, 9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성도가 있는데 이 성도는 매년 사순절이 되면 ‘나는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뜻으로 사순절이 끝날 때까지 커피를 마시지 않겠습니다.’ 하고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나는 TV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인데 사순절 기간에는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TV 보는 시간을 줄이고 있습니다.’ 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요즘 ‘TV를 끄면 가정이 보인다.’ 이런 표어를 내걸고 TV를 보지 않거나 TV 보는 시간을
줄이는 캠페인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성도는 ‘TV보는 시간을 줄이면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이 보인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사순절 기간에는 데이트를 절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사순절 기간에는 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화려한 옷도 입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산상보훈의 키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해야 산상보훈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문제에도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교훈들을 얻고, 그것을 이제 시작된 중요한 절기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이 구약의 완성자이심을 알아야합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산상설교가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실로 폭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17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구약성경의 율법서들을 말합니다.
선지자는 구약성경의 예언서들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또 한 부분, 성문서가 있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서와 예언서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나 선지자를” 하는 것은 구약성경 전부를 말합니다.

구약의 문자적 기준으로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빵점짜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다. 나는 백점짜리이다!’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OX 문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는다.’ 여기에 O나 X 가운데 하나를 해야 합니다.
구약의 문자적인 기준으로 하면 주저할 것 없이 O입니다.
살인자 사(殺人者死), 사람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한다, 율법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O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X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모 표(△)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족하다. 개정되어야 한다. 또는 보충되어야 한다.’ 이런 뜻으로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 26절까지 그것이 왜 부족한지 설명하고, 어떻게 보충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구약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18절 앞부분을 보세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습니다.
20절 앞부분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이 장엄한 도입이요, 절대적 권위를 나타내는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폐한다”는 것은 파괴한다는 뜻입니다.
폐지한다, 효력을 제거한다 무효화한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유대의 남자 아이들은 태어나서 팔 일이 되면 할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또 정결예식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1절에서 24절까지를 보세요.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서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모세의 법, 율법,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구약 율법을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는 성경입니다.
그 신명기의 21장 23절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나무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저주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이 점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기준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17절 끝에 나오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너무 중요한 선언이기 때문에 여러 신학자들이 이 말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A. Schweitzer)는 의사이면서 음악가였고 철학자이면서 또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논문은 신학 연구의 역사에서, 특히 예수님에 대한 연구에서 신기원을 제시한 업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이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율법의 성취자라는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오신 자체가 예언자들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슐라터(A. Schlatter)라는 신학자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를 ‘행한다,’ ‘실천한다.’ ‘지킨다’의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 행하는 것이 예수가 이 세상에 온 목적에 속한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디벨리우스(M. Dibelius)라는 신학자는 율법의 진실한 의미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바, 곧 계명들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밝혀내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아스(J. Jeremius)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이 불완전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뜻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딜만(G. Dilman)이라는 신학자는 “폐하려”라는 말이 율법 속에 들어 있는 계명들을 무효화 시키는 뜻이라면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율법 속에 들어있는 계명들을 유효하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지금 이름이 나온 신학자들은 학문적 업적이 대단한 위대한 신학자들입니다.
지금 말한 신학자들의 해석을 다 암기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는 신약학 교실이 아니지요.
‘아, 대강 그런 뜻이로구나!’ 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구약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완성자이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저는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말을 이렇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여가 율법이라는 음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밥이나 서양의 빵 같이 중요한 음식입니다.
안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음식이 딱딱합니다. 맛이 없습니다. 찹니다.
먹다보면 목에 걸리거나 소화가 안 되는 들것이 많습니다.
‘이것을 다 먹어야 한다.’ 하면서도 다 먹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율법은 다 지켜야 한다’ 하면서도 다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음식 맛없어!’ 하고 내다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 조미료를 치셨습니다. 맛이 있게 만드셨습니다.
사랑이라는 연료로 덥게 만드셨습니다.
누구나 맛있게, 다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다 드셨습니다.

지리산 남쪽 기슭에 화엄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절인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6․25 때 공비들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해서 양민들을 괴롭혔습니다.
전투경찰이 공비들을 토벌하는데 상부에서 현지 전투 경찰대장에게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했다고 합니다.
공비들의 은신처가 되기 쉽고 관측과 사격에 지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문화재 보호보다 공비토벌이 급했던 것 같습니다.
현지 전투경찰대장은 사찰을 불태우기는 마음이 내키지 않고, 명령을 어길 수는 없고, 고민을 하다가 사찰의 문들과 창문들을 다 떼어서 불살라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부에다 ‘공비들이  더 이상 화엄사에 은신하기 어렵게 되었고 관측과 사격도 용이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보고 했다고 합니다.
명령을 어느 정도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어느 정도 지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지켰습니다.

우리는 ‘나는 율법이나 선지자, 구약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 완전하게 하기 위해 왔다, 완성하기 위해 왔다.’ 신약 성경 서두에 있는 이 말씀을 전제로 하고 신약 전부를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구약의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의미를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이 하신 일에 비추어서 읽어보면 구약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 성경의 신비를 열어주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둘째, 우리는 사랑의 위대함을 알아야합니다.

아까 ‘율법이라는 찬 음식을 예수님이 사랑으로 덥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율법이라는 차디찬 음식, 거의 냉동이 되어버린  음식을 녹이고 덥힐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연료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연료를 사용하셨더라면 이 율법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잡한 율법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하나로 묶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40절까지를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바울 사도도 이 점을 보충해서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은 복잡한 율법들을 아주 간소화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정신을 다 살렸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그만큼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즉위 초기에 군대를 거느리고 정복전쟁을 하는 중에 어느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 성에 밧줄로 복잡하게 얽매인 상자가 하나 있는데 누구든지 이 밧줄을 푸는 사람은 세계를 정복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밧줄을 풀려고 애썼는데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말을 듣고 칼을 뽑아 단숨에 그 밧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외쳤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푸는 것이나 끊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잡하게 얽힌 율법의 밧줄을 사랑이라는 칼로 끊으셨습니다.
우리를 그 속박에서 해방했습니다.
사랑은 그만큼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뜨거울 때 기독교는 살고, 사랑이 식을 때 기독교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사랑의 묘약’이라는  오페라가 있지요.  도니체티라는 사람이 작곡했는데 테너 아리아 ‘남 몰래 흐르는 눈물’로 유명한 오페라입니다.
몇 달 전에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이 오페라를 공연 할 때 저희 교회 호산나 찬양대 지휘자인 함석헌 선생이 그 사랑의 묘약을 비싼 값을 받고 파는 약장사 역을 맡아 아주 잘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의 묘약이라는 것은 사실은 가짜입니다. 포도주입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사랑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하는 정말 묘약입니다.
진짜 가운데 진짜입니다.

여러분, 구약 전체를 요약하고 완전하게 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하기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셋째,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모세오경에 나와 있는 계명은 모두 613개 조항입니다.
그 가운데 248개는 무엇을 하라는 긍정적인 계명이고 365개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적인 계명들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 몸의 뼈마디가 모두 248개라고 합니다.
무엇을 하라는 긍정적인 계명의 조항 숫자와 일치합니다.
일 년은 365일입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적인 계명의 조항 숫자와 일치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점에 대해 ‘248개의 뼈마디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은 일 년 365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613개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적인 조항이 더 많습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613개 조항을 압축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열 손가락을 꼽으며 기억하기 쉽게 하라고 십계명이 되었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십계명도 보세요, ‘하라’는 것은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둘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지 말라’는 것들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절하지 말라, 섬기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하라,’ 긍정적인 조항, 적극적인 조항과 ‘하지 말라’ 금지적인 조항, 부정적인 조항, 소극적인 조항이 이대 팔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강한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가장 긍정적이고 가장 적극적인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행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19절 뒷부분을 보세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냥 가르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행하며 가르치는” 행하면서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뼈아프게 들리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르치는 데는 명수였습니다만
그러나 행하는 데는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여자 속회 인도자들과 속장들은 수요일에 공과를 가지고 공부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개인적으로 공부하시겠지요.
그리고 금요일에 속회에서 가르치는데 그 동안에 공부한 내용, 가르쳐야 하는 내용을 하나라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더 실천하면 더 좋고 다 실천하면 더 더욱 좋습니다.
이번 주일은 여자속회 공과는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는 내용인데 인도자 여러분, ‘이것은 시험이다, 유혹이다.’ 하는 것을 만났을 때 기억하고 있는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세요.
그리고 속회에서 가르쳐 보세요.
훨씬 자신 있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자 속회 인도자와 속장님들은 금요일에 공부하고 그 다음 주일 수요일에 속회에서 가르칩니다.
실천할 수 있는 기간이 깁니다. 
그 사이에 공과의 내용을 하나라도 행하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간 남자속회 공과는  하나님의 백성은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선포(선전)해야 한다 인데 그 가운데 하나라도 실행하고 속회에서 가르치세요.
훨씬 자신 있게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토요일 오후마다 토월 약수터에 나가 전도하는 남선교회 회원들이 있습니다.
어제도 나가는 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속회 인도자와 속장님들은 다음 주일 속회에서 어깨 펴고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선포했으니까요.

교사들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공과 내용을 한 주일 전에 미리 살펴보고 그 내용 전부, 또는 일부를 지키려고 힘쓴 다음에 학생들을 가르치세요.
힘 있게, 잘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제가 설교할 때 유난히 강조하고, 힘 있는 어조 말하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있으면 ‘아, 유 목사가 지난 주간에 저 내용을 실천했구나!’  그렇게 아시면 거의 틀림없을 것입니다.

요즘 대학에서도 현장 경험이 있는 분들을 교수로 모시는 일이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적극적인 신앙을 가지세요. 긍정적인 신앙생활을 하세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좋은 일을 하는 것에 더 힘을 쓰세요.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자세로, 능동적인 자세로, 적극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사순절에 적용해 봅니다.
사순절 기간에 무엇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은 사순절 기간에 더 열심히 경건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더 열심히 읽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입니다.
전도에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봉헌생활에 더 힘쓰는 것입니다.
선행에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나눔과 섬김에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일일일선이라는 말이 있지요. 하루에 좋은 일을 한 가지는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일일이선, 또는 일일삼선, 그 이상이 되어야합니다.

올해 여자속회 공과는 교회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에 사순절에 대해 참 좋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뜻과 은총을 받아들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신비에 값지게 참여할 수 있는 기간이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가까이 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이 설명이 너무 은혜스러워서 수요일마다 실시하고 있는 여자 속회 인도자 교육 시간에 여러 번 반복했고 금요일 저녁에 실시하고 있는 남자속회 인도자와 속장 교육에서도 사용했습니다.
오늘은 모든 성도들에게 그대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한 번 같은 목소리로 읽으시겠습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뜻과 은총을 받아들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신비에 값지게 참여할 수 있는 기간이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가까이 해야 한다.

요즘 ‘공격적 무엇’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아무개 기업인은 공격적 경영을 해서 성공했다, 어떤 축구팀은 공격적 축구를 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무개 프로 기사는 공격적 바둑을 두어서 큰 차이로 이겼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여러분 공격적 사순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하면서 저의 목양교회 목회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 가지 제약들과 특수한 여건들 때문에 그 동안의 목회는 방어적인 목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 때문에 속상하는 일도 참 많았지만 또 그 때문에 교회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공격적 목회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구약의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한 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랑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2005년의 사순절이 위대하신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더욱 경배하는 사순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더욱 힘쓰는 사순절, 적극적으로 경건생활에 힘쓰는 사순절이 되기를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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