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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에는 그러나 이제는 (벧전 2: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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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요즈음에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아주 예민하다.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도 예민하다. 영토를 침범하여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도 불쾌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문제는 과거의 역사를 왜곡해서 가르친다는 내용이다. 지난 36년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기고, 땅도 빼앗기고, 가족도 빼앗기고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살아왔다. 치욕적인 과거의 역사를 사죄하기는 커녕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시기이었다고 망언을 한다. 지난 날에 우리 나라는 힘이 없어서 결국에 나라를 빼앗기고,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는 버림받은 민족과도 같았다. 다시는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같이 버림받으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이가 없으니 결국에는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이스마엘이다. 세월이 얼마 흐른 후에 아브라함과 부인 사라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이삭이다. 한 지붕 아래서 부인과 낳은 이삭, 그리고 몸종에서 낳은 이스마엘이 같이 산다. 그러니 그 지붕 아래의 식구들이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결국에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그 집에서 쫓겨난다. 그 집에서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 버림받은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한다. 마실 물도 떨어지고 굶어 죽어가는 아들 이스마엘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는 신세가 되었다. 버림받은 아픔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성도여! 버림받는 경험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같이 버림받는 사건은 지금도 계속된다. 영상을 잠깐 보자. 얼마 전에 일어난 뉴스이다. ........... 20년간 중풍으로 병상에 누워있었다. 부인이 남편을 구타한다. 결국에는 부인과 딸이 남편을 버리기로 작정을 한다.
왜 이 사람이 이렇게 비참하게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는가? 건강해서 돈이라도 잘 벌어다 주었다면 부인과 딸이 이 사람을 이렇게 버렸겠는가? 병이 들어서 짐이 되고 나니 이렇게 엄청난 일까지 계획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에서 버림 받은 자를 하나님은 택하여 주신다. 집을 짓다가 보면 가운데 토막은 쓰고 남는 부분이 있다. 버려지는 돌이다. 그러나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전에는 버림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택함받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축복이 임할 줄로 믿는다.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 양와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한 마리의 양은 버림받은 양이다. 죽어가는 양이다. 목자는 죽어가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에 두고 나선다. 세상의 논리에 의하면 이렇게 미련한 목자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멍청한 목자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계산에 둔한 목자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목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한 마리의 양이 버림받아 생명을 잃고 죽어가는 것에 둔다. 그러기에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 때문에 내가 버림받았다고 할지라도 주님 때문에 다시 택함 받는 은혜를 입게 되는 줄로 믿는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자이었다. 로마 정부의 재판에 의해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재판장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라고 소리를 치는 군중으로 바뀌었다. 예수님은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았다.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았다. 가장 믿었던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구원자가 되셨다. 전에는 버림받았으나 이제는 구원자가 되었다.

우리도 예수를 따라 살면 이렇게 된다. 전에는 버림받는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택함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로 믿는다. 윤형주씨는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하기 시작해서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장로 가수이다. 그런데 그에게도 연단의 시절이 있었다. 1975년 연예인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날 그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완전히 끝난 것 같고, 버리받은 것 같은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방 안에서 햇살 속에 놓여 있는 성경을 바라보게 되었고 성경을 읽어나갈 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셨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세상이 보기에는 구치소가 저주의 자리였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축복의 자리였다. "비록 밧줄에 묶이고 수갑에 채워져, 법정에 나가야 하는 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법이 나를 해방시켜 주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 선포가 내게 임하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죄 사슬을 끊으시고, 내 목소리의 주인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버림받기 쉽다. 병들어 약해지면 우리는 버림받은 괴로움을 경험하기 쉽다. 그러나 그 때에 예수님을 만나면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 나는 주님께 택함 받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될 줄로 믿는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은 곧 하나님께 긍휼을 얻은 자라고 말씀한다. 중동지방에 전쟁이 나서 급히 미국 대사관이 철수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서로 비행기를 타고서 출국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아무나 태우지 않는다. 미국 사람처럼 생겼다고 태우지 않는다. 영어를 잘 한다고 태우지 않는다. 미국에 많이 다녀왔다고 해서 태우지 않는다. 당신의 손에 지금 미국 여권이 있는가? 그것 하나만 확인해서 비행기에 태우는 장면이 머릿 속에 생생하다. 하나님에게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전에는 버림받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택함 받아 주님의 긍휼을 얻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긍휼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보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다.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버려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이 모습을 보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지나가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를 불쌍히 여겨서 가까이 다가간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 준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버림받은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자비요, 긍휼이다. 긍휼은 어찌할 수 없을 때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 돕는 은총이다. 죄로 인하여 버림받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빚을 많이 지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었다. 한 달란트가 20년간 받는 연봉이니 만달란트면 이십 만년동안의 받은 연봉이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엄청난 액수의 빚이다. 부인도 팔고, 아이들도 팔아서 이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이 빚진 자가 참아 주소서 내가 어떻게 부인과 아이들을 팔 수 있겠나이까? 임금이 이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서 긍휼을 베풀어 주었다.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긍휼하심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도저히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긍휼을 베푼다. 그리고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 이십만년동안의 연봉에 해당하는 빚이다. 얼마나 큰 돈인가?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긍휼은 어떤 긍휼인가?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 이 세상이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을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 병이 들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는 그 아픔,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그 아픔, 주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팔순 아버지의 임종을 앞둔 아들이 아버지를 위로하며 말한다. “아버님은 목사로 한평생 목회하시면서 교회도 많이 세우시고, 자녀 교육도 잘하시고, 선한 일도 많이 하시고….” 그러자 아버지는 힘겹게 손을 내저으면서 말씀하신다. “얘야! 다른 것 말고 예수 십자가 보혈, 예수님의 긍휼, 오직 그것만을 말해다오.” 그렇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이 세상 살면서 정작 필요한 것, 이 세상 떠날 때 마지막으로 구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 뿐이다. 긍휼은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찬송가 434장에 보면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갓난 아이들은 이 세상에 밥이 있는지 떡이 있는지 자장면이 있는지 모른다. 갓난 아이가 살 길은 오직 엄마의 젖에서만 찾는다. 우리가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엄마의 젖만 먹어야 사는 줄 알았는데 보니까 햄버거도 있고 김치찌개도 있고 떡국도 있고 이런 것도 있구나 하면서 초점이 흐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 주시는 메시지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우리 주변에 많은 것이 있지만 내가 살 길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긍휼하심, 바로 여기에 내가 살 길이 있음을 깨닫고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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