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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계신 하나님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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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기본요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아는 만큼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잘 알면 믿음이 좋고, 하나님께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면 믿음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증언합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첫 장의 첫 구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과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도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지혜가 무한하시며 불가능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우주도 시작이 있고, 인간들도 시작이 있고, 이 우주 공간에 시작이 없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작이 없으십니다. 영원하다 함은 존재의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존재는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시작이 없다 함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계신 자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 떼를 칠 때였습니다. 그가 호렙산 아래에서 양떼를 먹이는데, 하루는 산에 자생하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떨기나무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나무는 사그라지지 않고 여전히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모세는 그 놀라운 광경을 살펴보려고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때에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킬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묻기를 “하나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이처럼 스스로 계신 전능하신 분을 우리는 신(神) 또는 영(靈)이라고 부릅니다. 예로부터 인간들은 신들을 숭배해 왔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신을 섬깁니다. 유대인처럼 유일신을 섬기는 민족이 있는가 하면, 대다수의 민족이 다신을 숭배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섬겼던 신들은 제우스를 비롯해서 12명의 중요한 신들이 있고, 그 외에도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조상들 역시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과 같은 천체를 신으로 숭배했으며, 곰이나 호랑이, 닭과 같은 동물을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모든 천체와 산이나 강, 그리고 새와 짐승은 물론이고 곤충들조차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이런 종교사상을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4장 6절에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천지간에 신이라고 칭할 수 있는 존재는 성경에 계시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수많은 신들은 다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영이신 하나님 

그리고 신을 다른 말로 영(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고 하셨고,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물질로 된 몸을 갖고 있으나, 영은 물질로 구성되지 않고 육체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은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또 영은 어떤 공간적인 장소에 국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장 15절로 16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5)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흔히, 천사를 영이라고 부르고, 또 사람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사나 사람의 영은 지음 받은 유한한 영이지, 하나님처럼 영원하신 신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장소나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시편 139편에서 이같이 노래했습니다.

“7)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지 않으신 곳이 없으십니다. 이를 한자말로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곳에 임재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전 세계의 모든 예배 하는 처소에 임재 해 계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 

또한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이같이 노래했습니다. “2)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 전지, 전능하시며, 영원하시며, 무소부재하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신이시며, 세인들이 숭배하는 다른 신들은 하나같이 우상에 불과합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영은 죽음과는 상관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나 로마 신화, 또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서로 싸워서 죽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러한 신들이 인간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에는 생명이 충만하고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은 다 죽은 신들입니다. 저들은 살아있는 신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신들을 섬깁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섬기는 자들의 기도를 듣지 못합니다. 아무리  호소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지금 살아계시므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능력을 행하십니다.

올바른 신앙고백

예수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틴 북부 지방을 여행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대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자칭 하나님의 아들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도 거짓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씻어준다는 말도 믿을 수 없으며,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없고, 천국과 지옥 역시 지어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벌써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다 진리이며, 우리의 믿음은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은 초보적인 지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실로 기독교 신앙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하는 이유

그와 동시에,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믿어야 합니다. 만일 내 이웃에 수천억의 재산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다고 한들, 그가 나와 상관이 없다면 그의 부유함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 이치로 하나님께서 나와 상관이 없다면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하란의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지내면서 큰 부자가 되고나자 그만 외삼촌과 외사촌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야곱은 그들이 먼 곳에 양털 깎으러 간 사이에 자기의 가족과 가축 떼를 다 이끌고 야반도주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해들은 외삼촌 라반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쫓아왔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을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야곱을 만났을 때 라반은 말하기를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창 31:29)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라반은 감히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말하기를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창 31:30)고 했습니다. 그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우상을 일컬어 “내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오랜만에 고향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전부터 제가 기독교인인 줄을 알고 있었으므로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은 한갓 인사치레로 하는 덕담에 불과한 것이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한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합 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우상숭배자인 이방 여자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한 결과 하나님을 떠나 바알 숭배에 몰두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백성들은 두려워서 다 우상 앞에 절하고 섬겼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아합 왕을 만나 말하기를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무려 삼년반 동안 그 땅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백성들이 무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삼년 반 후에 엘리야는 아합 왕과 백성들이 갈멜산에 모인 가운데서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목숨을 건 대결을 했습니다. 엘리야가 이와 같이 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말도 대답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그러자 백성들이 대답하기를 “그 말이 옳도다”고 했습니다.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단을 쌓고 장작을 벌려놓고 소를 잡아 그 위에 올려놓고는 제단 주위를 돌면서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자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았습니다. 나중에는 그 규례를 따라 창과 칼로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해서 피를 흘리면서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녁 무렵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 기척도 없었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올려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물통에 물을 길어다가 단 위에 부었습니다. 통 네 개에다 물을 길어 세 번이나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열 두 통의 물을 부은 것입니다. 그러자 제물과 나무와 제단의 돌이 물에 흠뻑 젖었습니다. 제단 둘레에 파놓은 도랑에도 물이 넘쳤습니다. 그때까지 백성들은 묵묵부답인 채로 두 편의 대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가 앞에 나서서 하늘을 우러러 말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했습니다. 그 때까지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명색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고 하나님의 선민이었으나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과거의 출애굽 사건도 한갓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 곧 전설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이야기에 불과한 것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은들 그것이 그들의 신앙에 무슨 유익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의 기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사르자 다 엎드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엘리야의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자 용기가 솟았습니다. 마치 죽은 자처럼 무기력하던 백성들이 엘리야의 지시에 따라 바알의 선지자들을 붙잡아 기손 시냇가에 데려가서 칼로 죽였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던 상태를 벗어나서 하나님 편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조건

오늘날도 기독교인 가운데는 뜨뜻미지근한 신앙상태에 처해 있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떄는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또 어떤 때 보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아마 그런 신자들은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믿음은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의심을 내어버리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꾀를 내지 말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나의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나의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그렇게 부를 수 있도록 허용하신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는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자식은 서로에 대하여 알만큼 아는 사이입니다. 그런 만큼 둘 사이에는 신뢰가 깃들고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무늬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 내용이 그리스도인다워야 합니다.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길 때 가능하게 됩니다. 언젠가 어느 성도님이 말하기를 자기 시어머니가 권사님인데 이사 가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서 길일을 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름대로 변명할 말이 있는데, 그것은 “기왕이면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고 합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너무나 아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최초한 하나님의 살아 계심만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맺는 말

기독교가 타 종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만 타 종교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를 섬기는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는데, 타 종교들은 인격적인 교제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신들은 참 신이 아니고 나무 막대기나 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시몬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게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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