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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하라.(갈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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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최불암 씨가 연예인 대표로 통역관이 되어서 월드컵 때문에 한국을 찾은 펠레를 마중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탄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최불암 씨는 펠레에게 다가가서 혹시 칠레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도 최불암 씨는 펠레가 칠레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어 칠레?"
그러자 펠레는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는 줄 알고, "아임 펠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최불암 씨가 갑자기 얼굴을 아주 험악하게 구기면서 한마디합니다. "뭐? 날 팰래?"
최불암 씨의 말에 펠레는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줄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음-, 펠레"
순간 자신을 팬다고 생각한 최불암 씨는 두 주먹을 힘차게 쥐어 보이면서 펠레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너 맞을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축복 가운데 하나가 저는 웃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웃음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얼굴에서 웃음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여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저는 영국의 수상을 지냈던 처칠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1차 대전 때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의 참호 속에서 처칠은 부하 장교들에게 이렇게 명령을 했다고 합니다. "좀 웃어라. 그리고 부하들에게 웃음을 가르쳐라. 웃을 줄 모르면 웃을 때까지 옆에 물러나 있거라"

그래서 한 이야기를 더 전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같은 군부대의 고참 병장과 쫄따구 이등병이 외박을 나와서 목욕탕에를 갔습니다. 쫄따구 이등병이 이태리 타올로 한참 때를 밀고 있는데 옆에 있던 고참 병장이 쫄따구에게 이태리 타올을 주면서 "등밀어"라고 했습니다. 고참 병장의 명령에 쫄따구는 고참 등을 아주 열심히 정성스럽게 밀었습니다. 다음으로 고참 병장이 쫄따구 이등병의 등을 밀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참 병장이 쫄따구 이등병의 등에 이태리 타올을 대고는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움직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무언가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 분이 내 생명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이 땅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내 인생에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인생에 진정한 희망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왜 갈증을 느낍니까? 왜 방황합니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이 노래를 힘차게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직 주 밖에 없네 그 무엇도 나를 채울 수 없네. 주님의 평안 내 안에 있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깊은 영적 체험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보십시오. 주님과의 이 한 번의 만남이 내 인생을, 여러분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약함이 주 안에서 강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주님 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을 부르짖던 사람이 주님 안에서 희망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생명의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오늘 주님 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안에 있는 모든 어둠과 불신앙의 세력들을 물리치십시오.

무엇보다도 오늘 주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대한 세계로 다시 뛰어넘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가 있으면 내가 이제껏 알지 못하던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대한 바다로 헤엄쳐 나갈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그는 일어나서 부흥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교회 부흥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옆 사람을 보시면서 이렇게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부흥의 주인공이 됩시다!"

우리가 무슨 기도를 잘한다, 성경을 달달 외운다, 이런 것들도 물론 다 중요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되는 확신의 믿음이 가장 아름다운 믿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에 부흥의 한 때가 오게 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기도하십시오. 파수꾼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밤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역사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욱 빛납니다. 이 파수꾼이 누구입니까? 오늘 주 앞에 부름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갈라디아서라는 책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바울은 본래 예수님의 12 제자들 속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예수님과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나는 사도다'라고 말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서 비난합니다. '네가 왜 사도냐? 네가 언제 예수님과 같이 있었느냐?' 그래서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편지 가운데 하나가 갈라디아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사도가 하는 일들 가운데서 우선 순위를 가져야 할 사역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적 사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불신자들에게 가서 전도하는 사역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의 구원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오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구약성경의 이사야 1장 18절을 보게 되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고 말씀하면서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55장 1절에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이렇게 주님 앞으로 오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가 하면 신약성경의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목마른 자도 오라." 오라는 초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 앞에 와야 한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그런데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은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강조하는 단어는 "가라"입니다. '오라'는 것은 구원과 관련된 말이고, '가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명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라고 일컬어지는 마태복음 28절 19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가서'라고 했습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제자를 삼기 위해서 너희는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9절에 하반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할례자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선교의 대상은 은사와 부르심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저들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가야 하고, 나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는 대상은 다릅니다. 가는 대상은 다르지만 우리가 다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8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우리가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보냄을 받아 유대인을 전도할 자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이 나 바울에게 역사하셔서 나는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9절에 보면 이런 단어로 시작을 합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이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가서 어떤 사람들에게 전도하느냐 하는 것은 은사의 문제일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문제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외계층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도록 하나님이 자꾸 그런 부르심을 주십니다. 이것은 특별히 은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전도의 대상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함께 교제의 악수를 하고,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사역하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책임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7절을 함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나 바울은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도할 책임을 맡았고, 베드로는 할례자인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도의 책임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적인 책임은 전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다 선교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선교사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마음 속에 모시고 산다면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선교사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이 바로 선교의 대상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다면 다 선교사입니다. 소망이신 예수님을 나 혼자서만 소유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구원이신 예수, 기쁨이신 예수를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옆에 있는 분을 쳐다보시면서 이렇게 인사를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 선교사님이시군요" 기억하십시오. 타 문화권에 가서 전도하는 사람들만 선교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선교사입니다. 우리는 내 가정에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회사와 직장에서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웃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누구나 다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언제쯤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어떤 분들은 우리가 전도를 제대로 하려면 영적으로 성장하고, 훈련을 받은 다음에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고, 훈련을 받으면 전도를 좀 더 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여러분의 성숙이 완성되는 것입니까? 또 언제 여러분의 훈련이 완전히 구비되고 갖추어질까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기다리다가 한 평생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합니다. 한 영혼도 전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나는 훈련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핑계로 해서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이 중요한 주님의 명령 앞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에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 있다가 전도를 시작했을까요? 즉시로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라는 지방에 귀신이 들려 가지고 무덤 주위를 배회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치료를 받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온전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자기를 고쳐준 예수님을 따라다니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네가 먼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5장 19절을 보면,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그러니까 네가 나를 따라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집으로 돌아가서 네 집안 사람들에게, 친척들에게 내가 너를 어떻게 불쌍히 여겼는지, 내가 너를 어떻게 고쳐주었는지, 내가 너를 어떻게 새사람이 되게 해 주었는지 그것을 그들에게 가서 말해라. 한 마디로 전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주님은 그를 만났던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그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즉각적으로 전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를 보십시오. 사막에 아무도 물 길러 오지 않는 뜨거운 시각에 자신의 신분을 의식한 나머지 혼자서 우물가에 물을 길러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메시아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사실에 너무 흥분해 가지고 자기가 물을 길러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뛰어 갑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동네로 뛰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했을 때 요한복음 4장 39절에 보면 그 결과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녀가 가서 전도하기 시작하자 사마리아 동네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여러분, 정확하게 따져보면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전도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친구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아는 사람이 다 집사님, 권사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방금 믿는 사람들은 다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훨씬 더 전도를 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믿은 사람들이 삶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이런 핑계를 댑니다. 내가 부족해서, 훈련이 부족해서, 기도가 부족해서.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부족한 모습 그대로 전도하기로 한번 결심해 보십시오. 일단 전도를 결심하면 전도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도 대상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도를 하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모르고 전도할 수 없으니까 일단 전도를 결심하게 되면 성경 공부를 하게 됩니다. 전도하면서 내 삶이 개판이면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를 결심하게 되면 자신의 삶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기도 열심히 하고, 내가 성경 공부를 하고, 내가 갖추어진 다음에, 그래서 내 생활이 제대로 된 다음에 전도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결코 전도하지 못합니다. 부족한 모습 그대로 일단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하셔야 합니다. 전도하게 되면 기도하게 됩니다. 전도하게 되면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전도하게 되면 내 삶이 바뀌어집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성경을 못 읽어도 좋습니다. 조그만 지식을 가지고도 큰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전도를 시작하십시오. 내가 정말 참 생명을 찾았고, 인생의 희망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가장 은혜스럽고 재미있을 때가 언제인 것 같습니까? 온 교우들이 전도에 열심일 때에 은혜가 넘칩니다. 전도하는 교회는 시험에 들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전도하면 교인들을 양으로 만들어줍니다. 전도하면 교인들이 담대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 현장에 뛰어들어가 보십시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힘든 시간이 없다면 영광된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도의 몸부림이 없다면 교회와 가정의 부흥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것은 교인들이 전도 현장에서 전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는 그냥 가만히 있어서 큰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전도하는 교우들의 헌신이 있어서 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한 영혼을 구원하려는 전도 사역에 헌신하셨습니까? 우리가 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다짐해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우선적으로 다짐해야 할 것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한해 전도하면서 새로운 한해를 살겠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결단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선 순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역의 우선 순위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 사역에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우선 순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우선 순위는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는 구제 사역입니다.
본문 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그의 마음에 부담이 되고 있는 한 가지가 더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향한 구제 사역입니다. 그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부탁한 사역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서 행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부담일 뿐만 아니라 이것이 공동체의 부담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전도 사역과 함께 구제 사역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힘써 행했다고 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파벌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파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도 그런 파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제를 하다 보니까 히브리파 과부한테 구제가 더 가느냐, 헬라파 과부한테 구제가 더 가느냐 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에 우리는 이렇게 결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구제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교회가 시험에 드니까 우리가 더 이상 구제를 하지 말자.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을 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얼마나 구제를 열심히 했으면 구제 때문에 문제까지 일어났을까? 다시 말하면 구제 때문에 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구제 사역에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전도 사역과 함께 구제 사역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10년을 준비하는 우리 교회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사역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와 구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함께 추구해야 할 공동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사랑으로 실천하면서 이웃들을 돌보아야 합니까? 이런 우리의 전도와 구제의 실천은 우리 모두가 "빚진 자"라는 성경적 정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나는 빚진 자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일하게 우리도 빚진 자입니다. 무엇에 빚진 자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기까지 우리의 선배들이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을 많이 한 줄 아십니까? 복음이 한국 땅에 도착하고 나에게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고 희생하고 헌신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냥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전도를 해야만 합니다. 또 하나,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빚지고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 이웃들의 사랑에 빚지고 있습니다. 넓게는 이 사회에 빚지고 사는 인생들입니다. 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까? 우리가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사랑의 빚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3장 16절을 아십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붙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먼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암송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3장 16절은 무엇입니까? 다음 주일에 외워야 할 암송 구절이기도 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람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다면 이제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할 것입니까? 이어지는 요한일서 3장 17절입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우리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다면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곁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다 중요해서 신학자들은 한 명령에 대해서는 위대한 사명(Great Commission)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전도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위대한 명령(Great commandment)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의 명령과 사랑의 실천의 명령이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구제 사역을 잘 못할까? 한국 사람들이 구제 사역을 꺼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는 구제한다고 하면 크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는데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전도할 수는 없습니다.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세계 복음화의 지름길입니다. 내가 이 세상의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을 책임질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내 주변의 한 두 사람을 책임지고 전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한다는 것은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이웃에 대해서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 전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친절로 시작하듯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이 세상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가 다 돌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다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내가 걸어가던 인생의 여리고 길에서 어느 날 내 앞에 상처받은 사람을 봤습니다. 그때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도 내가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 내 옷을 찢어서 상처를 감싸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됩니다. 할 수 없는 것까지 하려면 시험에 들 수가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이웃들에게 베풀 수 있는 따뜻한 사랑과 돌봄이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이웃들을 돌본다고 했을 때 먼저 돈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쉬운 것입니다. 그냥 돈만 주어버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땅에는 돈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몸과 시간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남녀선교회에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각 선교회에서는 우리의 시간과 몸으로 이웃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찾아보지만 말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의 사랑입니다. 혼자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세상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생명을 연소하는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어딘가를 향해 태워야 됩니다. 기왕이면 보람된 곳에 태우시기를 바랍니다. 의미 있는 곳에 태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태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가 탈 때는 밝은 빛이 납니다. 타지 않는 초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타지 않는 초에는 어떤 작은 빛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몸된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위대한 헌신의 불꽃을 태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기둥 같은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전도하십시오. 그리고 외롭고 아픈 이웃들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전도와 사랑으로 10년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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