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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강해14> 천국백성의 물질관 (마 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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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노블레스 오블리주

얼마 전 모 대학 교수 아들이 대학입시 부정을 저질러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대학에 응시한 학생 중 성적이 최하위권인데도 불구하고 논술시험 만점을 받아 합격했다는데 문제는 그 대학에서 작성한 논술 모범답안과 이 학생이 제출한 답안이 거의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사나 판사, 교수, 정치인, 재벌 등 사회 지도층 자녀들이 입시나 군 입대 비리에 연루되었다고 방송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쓴 글도 있습니다. “억울하다. 부자가 죄냐? 권세 있는 것도 죄냐? 남들도 다 똑같이 하는데 왜 우리 같은 사람만 못 살게 구냐?” 하는 항의의 글이었습니다.

바로 이럴 때 등장하는 유명한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프랑스어입니다. 이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라고 나와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이 말은 초기 로마시대의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초기 로마사회에서는 사회 고위층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봉사와 기부, 헌납 등에 열심히 참여하였고 특히 귀족 등의 고위층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전통이 강조되었는데 바로 오늘날에도 이런 전통을 이어 받아 고위층이나 사회 지도층이 다른 사람보다 더 투철한 도덕의식을 가져야 하며 특히 전쟁과 같은 국가적 난관이 닥쳐왔을 때 솔선수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왕실이나 귀족들, 정치인과 장성 아들들이 직접 전쟁터에 뛰어 들어 전사하기까지 한 예들이 많습니다. 포클랜드 전쟁 때는 영국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고 6·25전쟁 때에는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이 야간폭격 임무수행 중 전사했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습니다. 중국 지도자 모택동이 6·25 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 수습을 포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을 듣다가 갑자기 우리나라 병무청은 지난 2004년 발표한 통계를 보면 정말 마음이 씁쓸해 집니다. 작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16대 국회의원의 병역 면제율은 29%, 그 아들들의 병역 면제율은 22%로 일반인에 비해 9.4배나 높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부자들 이야기를 해보지요. 미국에서 2000년부터 2004년까지 가장 많은 돈을 사회에 기부한 자선가는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로 그가 지난 5년간 기부한 금액은 100억 8500만 달러이며 자녀들에게도 수백만 달러를 제외하고는 일체 상속하지 않고 나머지 모든 유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미국의 부자 이야기까지 안 가더라도 우리나라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부잣집이 있습니다. 바로 이웃 도시인 경주의 최 부잣집입니다. 이 가문에 대해서는 작년에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이라는 제목으로 책까지 나왔습니다만 자그마치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던 집안으로 이들은 여느 부잣집과 달리 이런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 ‘흉년에 땅 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바로 이러한 철학이 이 집안을 300년 동안이나 부자로 유지해 주면서도 주변 모든 사람에게 칭송 받는 명문가로 남게 해 준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고 부패한 책임이 물론 모든 국민에게 있지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못한 지도층, 고위층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천국백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무엇일까?” 이 사회의 고위층과 지도층의 도덕성이 여느 백성과 달라야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천국백성의 도덕성은 불신자들과는 얼마나 달라야 할까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재물은 어디에?

그 동안 산상수훈을 통해 주님은 이러한 천국백성의 도덕성을 말씀하셨고 오늘은 그 중에서도 천국백성의 물질적 도덕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천국백성의 물질관, 재물관은 다른 사람들, 특히 불신자들과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물질적인 도덕성은 사회 지도층이나 고위층, 혹은 재벌들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천국백성들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19절을 같이 읽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주님은 먼저 우리의 보물을 어디에 쌓아둘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물’이란 우리의 소유 중 가장 귀한 것, 바로 우리의 재산, 돈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재물을 어디에 쌓아두느냐 하는 문제가 왜 그리 중요할까요? 그것은 귀중한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잘 보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라를 잃고 믿을 것이 없던 유대인들에게 있어 의지할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이후에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천여 년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믿을 것이라고는 하나님과 돈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돈을 벌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현금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물론 재산을 은행에 맡겨 이자를 받는 것도 좋겠지만 은행이 언제 망할지, 이자율이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 너무 많이 일어나다보니 내 손에 직접 현금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수단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문제는 이 현금이나 금은보화를 어디에 보관해야 제일 안전하냐 하는 것입니다.

약 15년 전 제가 군목으로 있을 때 전방부대에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부산에 있는 초량교회에서 건축헌금으로 삼천만원이라는 거액을 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얼마 후 그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직접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하시더니 그 자리에서 삼천만원을 수표로 주셨습니다. 제 생전 처음 만져보는 큰 돈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은행에 가서 제 통장에 입금을 하려 하니 제 통장은 천만원 이상은 입금이 안 되는 통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삼천만원을 직접 들고 새마을호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오는 약 다섯 시간 동안 저는 한 숨도 자지 못하고 화장실도 못 갔습니다. 혹시 안 주머니에 넣으면 소매치기라도 당할까 싶어 아예 돈을 가방에 넣고 선반에 올려두었습니다. 너무 옆에 끼고 있으면 도둑이나 소매치기가 돈 냄새를 맡는다는 말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긴장해서 계속 선반 위를 쳐다보니 잠이 올 턱이 있겠습니까? 볼일이 급해도 화장실을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재산이나 돈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기에 절대 아무 데나 함부로 보관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쌓아둔다’는 말은 ‘모으다, 저장하다, 비축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재산을 땅위에 아무리 잘 보관한들 언제든지 좀이 슬거나 녹이 슬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겨우내 안 입고 보관해 두었던 옷을 꺼내어보니 좀이 슬어 구멍이 난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끼던 것이라 잘 입지도 않고 잘 놔둔 옷 인데 얼마나 속상한지요. 실제로 옛날에는 옷이 참 귀했는데 이 옷을 입지 않고 오래 보관해 두면 좀이 슬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금속으로 된 장신구나 귀한 물건을 오래 놔두면 동록(銅綠)이라고 부르는 금속 녹이 슬기도 했습니다. 좀이나 녹이 슬지 않는 금은보석은 제 아무리 잘 보관하고 든든히 자물쇠를 채워 창고에 보관해 놓아도 도둑이 뚫고 들어와 그것을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집 벽은 대개 진흙 벽이나 돌을 쌓아 만들었기에 도둑이 마음만 먹으면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흙벽에 구멍을 뚫고 들어와 귀중품을 훔쳐갔습니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가 지붕을 뚫은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재산을 지키려 해도 도둑은 신출귀몰한 기술로 그것을 훔쳐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보물들을 땅위에 보관하는 한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100% 안전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하실 때 ‘보물’이란 꼭 우리의 재산이나 돈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땅이란 세상적인 가치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귀중한 것을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땅위에 있는 것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곧 없어지고 말 헛된 가치관에 귀한 물질이나 시간이나 생명이나 그 어떤 것도 투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너의 가장 귀한 것을 하늘에 쌓아두고 보관하라, 즉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늘이라는 영원한 가치기준에, 천국에 쌓아두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재물을 두고, 천국에 내 소중한 것을 보관하면 절대 상하거나 파손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어야 할 더 중요한 이유가 21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앞서 제가 삼천만원이라는 거액이 든 가방을 기차 선반에 올려두고 잘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까닭은 그 돈이 너무 커서, 너무 귀해서 제 눈을 다른 곳에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이 온통 그곳에, 그 선반 위의 가방에 쏠려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이 마음이 있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마음을 두고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유치부 어린이가 예배시간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합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냐고 묻자 “집 냉장고 속에 두고 온 내 초콜릿을 동생이 먹을까봐 걱정이 되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유치부 어린이에게 초콜릿 하나는 가장 소중한 재산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배당에 앉아있어도 내 마음은 집에 있는 냉장고에 가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재산이라면, 돈이라면 당연히 그 돈이 보관되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가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에 내 눈을 고정시키고 내 가치관을 두고, 내 목표를 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재물을 하늘에 보관하면 자연히 우리의 눈도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의 보물을 천국에 두면 우리의 가치관도 천국을 향하게 됩니다. 때문에 항상 천국을 바라보며, 항상 천국을 지향(志向)하며, 항상 천국을 사모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천국백성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백성이 재물을 하늘에 두어야 할 이유입니다.




당신의 눈은 어디를?

그래서 22절과 23절의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주님이 재산과 보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22~23절에서 눈 이야기를 하니까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하지만 상관이 있습니다. 아니, 상관있는 정도가 아니라 눈의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22~23절에서 주님은 “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눈이란 우리의 안목, 우리의 가치관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비전과 삶의 목표를 뜻합니다. 사람의 눈이 어디를 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당연히 내가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것에 내 눈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이란 그 사람의 가치기준, 삶의 목표를 뜻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며 무슨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즉 비전이 무엇이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주님은 눈이 너무나 중요한데 눈이 성하고 밝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눈이 나쁘고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눈이 나쁘면 잘못된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눈이 어두우면 이곳이 막다른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가면 안 되는 곳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 하나 때문에 온 몸이 실족하고, 온 인생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 즉 우리의 비전과 가치관이 잘못 되면 인생 전체가 실패하게 됩니다. 천국백성은 빛의 자녀입니다. 천국백성은 눈이 밝아야 합니다. 빛을 바라보며 빛을 향해 살아야 합니다. 천국자녀에 합당한 가치관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당신의 주인은 누구?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은 24절에서 우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같이 읽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립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여기서 ‘겸하여’라는 말은 ‘대등하게, 똑같이’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입니다. 우리가 만일 두 명의 주인을 섬긴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당연히 두 주인을 똑같이 섬길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두 사람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해도 완전히 대등하게 섬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둘 중에 한 사람에게 더 관심이 가거나 잘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 한 사람에게는 자연 소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주인을 섬기지 말고 한 주인만 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섬길 한 주인은 누구일까요? 이 시간 여러분에게 한 번 묻겠습니다. 물질이나 돈이 악한 것입니까? 선합니까? 답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입니다. 물질(재산, 돈)은 중립이며 소유의 대상일 뿐 그 자체로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물질과 돈을 사용하는 사람이 악하냐 선하냐에 따라 그 돈은 악하게 쓰일 수도, 선하게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을 어떻게 쓰느냐에 의해 하나님 영광을 드러낼 수도 가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돈이나 물질에는 이런 성질이 있습니다. 돈이나 물질이 끊임없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돈은 우리가 소유할 대상이지 돈이 우리를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돈을 가지고 쓰는 것이지 돈이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돈이 끊임없이 나를 섬겨달라고 자기가 내 주인이 되겠다고 유혹을 합니다. 나를 주인으로 섬겨주면 너에게 돈을 안겨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돈을, 물질을 주인으로 섬깁니다. 이것이 바로 ‘물신주의’입니다. 오늘 24절 말씀 중 ‘재물’이라는 낱말은 아람어로 ‘맘몬’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돈을 신으로,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물신주의, 즉 ‘맘모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도 오늘 집에 가서 영어사전을 찾아보십시오. mammon[mǽmən]이라는 낱말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부’(富), ‘배금’(拜金), ‘탐욕의 신.’ 그리고 mammonism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배금주의.’ 혹은 ‘황금만능주의.’ 하지만 성서적으로 볼 때 맘모니즘은 ‘물신주의’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즉 물질을 신으로 섬기고,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세를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는 좋은 장점이 많습니다. 공산주의와 달리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해줍니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의 가장 문제점이 바로 이 맘모니즘, 즉 황금만능주의, 배금주의, 물신주의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가장 많은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천국백성들은 자본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지만 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신본주의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 방법을 오늘 주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한쪽에 치우치게 되어 다른 주인을 경히 여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히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결코 하나님과 돈 두 주인을 다 섬기되 돈보다 하나님을 더 중하게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 한 분만 주인으로 섬기라는 양자택일을 요구한 것입니다. 물질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소유이며 우리가 사용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물질이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허락하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야 하며 물질은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나 여러분은 부자는 아닙니다. 물질이 너무 많아서 고민할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은 재물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있는 물질, 재물이 얼마이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의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느냐 가리우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돈을 어디에 쓰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물질이 어디에 있느냐, 즉 우리의 가치관과 비전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을 쓰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의 가치관이나 비전이 어디 있는지 금방 알게 됩니다. 왜냐?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이 재물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매우 유심히 관찰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가치관과 비전이 어떤지,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전 이은주라는 잘 나가던 여배우가 자살을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자살의 이유는 심리적 압박감에서 온 우울증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들은 잘 나간다고 부러워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더 잘해야 한다는, 인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의 우렁찬 갈채와 인기가 어느 한 순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어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방송을 보니 이 사람이 기독교신자라고 합니다. 기독교신자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지만 가만히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이 땅에서의 인기와 성공에만 눈을 두고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못한데서 이런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이 기독교인일 수는 있지만 결코 천국백성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꼭 이 여배우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의 눈을 이 세상에만 두고, 우리의 비전과 가치관을 땅에만 두고 사는 땅의 백성들이 많습니다. 땅의 것들에 마음이 빼앗겨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천국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물질관과 나아가 인생의 비전, 가치관, 목적을 바로 잡아 진정한 천국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되 천국백성이 못 되는 서글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오늘 여러분의 물질관, 인생관, 가치관, 인생의 비전을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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