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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라도와 요셉의 선택 (막 15:12-15, 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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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종관 목사

'아름다운 계절에 당신을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선택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몇 시에 일어날까?' '아침식사를 밥으로 할까 빵으로 할까?' '어떤 옷을 입을까?' '양실 어린이집 버스에 타면 어느 좌석에 앉을까?' '예배당에 들어갈 때 계단으로 올라올까, 돌아서 올라올까?' 하지만 이런 선택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대단한 영향력을 주는 선택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택들 가운데서는 절대로 가볍게 선택해서는 안될 것들이 있습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인생의 진로, '나는 어떤 직업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이런 것들은 결코 가볍게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러분이 너무 잘 선택한 것은 현세, 순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영원을 선택한 것에 대해 대단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선택한 것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영원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감사함으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처럼 우리의 순간적인 선택이 잘못하면 패망, 멸망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시고 순간의 선택을 슬기롭고 지혜롭게 하나님과 잘 의논해서 결정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가복음 15장에는 두 사람의 선택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멸망의 선택을, 한 사람은 영원한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빌라도'와 '아리마대 요셉'이란 두 사람입니다.
먼저 '빌라도'란 사람을 잘 알 것입니다. 빌라도는 로마로부터 파견된 총독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황제가 이스라엘 땅을 다스릴 때 '분봉왕'이라는 것과 '총독'을 두었습니다. 분봉왕을 두어 그 지역을 섬기도록 했는데 그 중에서도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에는 로마로부터 특별한 명령을 받은 총독이 그 곳을 관할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의 칙령을 받은 예루살렘을 총관할하는 감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을 끌고 가서 재판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할 수 있는 권한(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황제의 명을 받은 총독에게는 십자가형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죄질이 잔악하고 극악무도하면 십자가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이 본디오 빌라도 총독 한 사람에게만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가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 가득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실을 대대손손 그의 악행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 수천 년이 지나도 그의 잘못을 말해야 될까요?

마가복음 15장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의 잘못된 선택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진단하고자 합니다.
첫번 째, 그가 선택을 잘못한 이유는 명예, 출세, 자신의 입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1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
'군중(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하여'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게 해 주시오.' 이렇게 성난 군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것입니다.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이 사건을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는 시각마다 다 다른데 요한복음 19장 12절에 가면 분명하게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라는 청년을 무죄로 놓아줄 경우에 로마황제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정치 생명을 끊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낙선 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자신의 출세를 위해 그런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빌라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는 참으로 잔악한 총독이엇다. 그는 지나치게 로마에 아부했고 황제숭배를 강요했는데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였다.' 자기 자신의 출세를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본디오 빌라도는 수천 년이 지난 이 시간도 참으로 불행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내 출세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지는 않았나요? 내자신의 출세, 입지를 위해 예수를 넘겨 주는 사람은 없는가요? 요즘은 참으로 세상이 흉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도 세상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교회에서 출세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2,3억씩 뿌려가면서 장로가 되고, 총회장이 되기 위해 목사가 교회돈을 10억을 씁니다. 이런 일들은 빌라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순수하게 믿고 계십니까? 내자신의 출세,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안믿는 사람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봐도 순수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자녀를 봐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양심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빌라도의 잘못된 선택은 양심을 회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공관복음에 읽다보면, 특히 요한복음 19장에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빌라도는 계속해서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계속 이렇게 나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느냐?' 분명히 예수라는 청년에 대해 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10절을 읽으면 이렇습니다.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러라'
그러니까 대제사장들이 시기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예수를 데리고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마태복음 27장 19절에 재판을 하는 도중 하나의 메시지(쪽지)가 전달됩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보낸 것입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지금 법정에서 법을 집행하는 가운데 쪽지가 날라온 것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꿈을 꾸어서 애를 너무 많이 썼다고 아내는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심에 회피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빌라도에게도 계속 경고가 내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야, 옳지 못한 일이야.'
양심을 무시한 사람의 결과, 빌라도는 나중에 사마리아인 학살사건의 공모자로 몰려서 황제로부터 로마로 올라오라고 명을 받는데, 황제에게 사랑을 못받는, 정치 생명이 끊어졌다고 느껴 자살을 해서 자신의 생을 마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자의 결과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끝으로, 한 사람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입니다. 빌라도와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된 사람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에 대해 4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
아리마대 사람을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적당히 믿었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던 추종자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의 정체를 '공회원'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유대인)의 최고 결정기관인 산헤드린의 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의 국회의원에 준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니고데모'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대낮에는 찾지 않고 늘 깜깜한 밤중에 찾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 왔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을 밤중에 몰래 찾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직분 때문이었습니다.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인데 예수라는 청년을 만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은혜를 받기 시작했고 예수를 따른다는 그 자체는 신분보장이 될 수 없는 사회였기 때문에 '나는 믿노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42절입니다.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각은 오전 10시였고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오후 3시에 돌아가셨는데 저물 때에 이 행동을 한 것입니다. 선택을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했던 것입니다. 내가 에수님의 시체를 거두어서 장사를 잘 지내겠다고 이야기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잘 알고 있었기에 선택하기가 많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니까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는 집에 돌아가서 나의 안위와 출세를 위해 적당히 살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본디오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나에게 주시오.' 이것은 용기있는 자가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자신있게 지하철에서 성경책을 읽을 수 있습니까? 직장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러 가서 자신있게 머리를 숙이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전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오. 나는 예수님의 제자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 행동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크리스찬이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술 없이도 그 모임이 아름답게 될 수 있는 청년부와 남성도회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지혜로운 선택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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