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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면 (행 2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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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관지 목사 

저희 교회는 올해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가지고 출발해서 이제 3분의 1 가까이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몇 달 동안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기에 얼마나 힘쓰셨습니까?
그 때, 대 성전 준공을 앞두고 교만하지 말자고, 자랑하지 말자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말하자고 이와 같은 표어를 정했습니다.
이제 대 성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더욱 더 겸손해야 합니다.

지난 해 송구영신예배, 동시에 올해 첫 예배에서 저는 올해 저희 교회의 중심성구인 미가서 6장 8절의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하고 올해 표어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교회”를 제목으로 해서 새해 첫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는 겸손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가운에서도 겸손의 모범을 보인 분은 예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도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겸손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것, 겸손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 것, 겸손은 자기보다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붙드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하지 않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끝까지 겸손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기억나지 않으면 기억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제 기억이 나면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 그래서 이 교회를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다시 한 번 겸손을 중심으로 세 가지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우리는 구원의 은혜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많은 덕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직, 친절, 근면, 성실…, 이런 것들 가운데 하나, 그러니까 상대적인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여러분, 겸손은 절대적인 덕입니다.

우리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대성전 주변에 이번에 새로 심은 소나무 마흔세 그루가 서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강원도에서 일어난 산불과 연결하여 이 소나무들을 보면서, 구원의 진리,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참 실감 있게, 새롭게 깨닫고 있습니다.
이 소나무들은 강원도 양양에서 캐어온 것입니다. 건축위원장님과 건축위원이신 장로님 한 분이 조경을 책임진 분과 함께 양양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산에 가서 한 그루, 한 그루, 저희 교회에 맞는 형태를 갖춘 소나무들을 골랐다고 합니다.
원래는 입당예배 전까지 다 캐서 교회로 운반해 와서 심어놓고 입당예배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 무렵에 강원도 지역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차질이 생겼습니다.
이 내용을 아는 분들은 입당예배를 드릴 때 ‘지금도 아름답지만 소나무들을 옮겨 심었으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오신 손님들에게 보일 수 있었을 터인데,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았을 터인데…‘ 하면서 아쉬워했습니다.
주일에 입당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날, 월요일에 새벽기도 인도하러 교회에 오니까 그 때야 소나무들을 심은 트레일러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있더군요.
그것을 보면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라는 잠언서 16장 9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주일 만에 양양에서 큰 산불이 나서 많은 소나무들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산불이 이 소나무들이 서 있었던 지역까지 번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소나무들이 이 교회로 옮겨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지금은 불에 타죽어서 시커먼 모습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옮겨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지옥 불에 던져졌을 존재들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양양 산불은 꺼졌지만 지옥불은 지금도 거세게 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소나무들은 자기 힘으로는 여기 올 수 없었는데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내 힘으로는 믿음의 세계로 옮겨질 수 없었는데 옮겨졌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소나무들은 공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교회에서는 비싼 값을 치루고 소나무들을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나무 값, 운반비, 인건비, 천만 단위의 돈이 지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주셨습니다.
성자의 귀한 몸을 내 주셨습니다.
여러분, 천만 단위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금요일에 한국복음주의협의회라는 단체가 월례 기도회와 발표회를 가졌는데 교계의 원로, 또는 중진인 세 분 목사님이 ‘내가 잘못 했습니다’라는 주제로 15분씩 말씀을 했습니다. 이 사실이 매스컴에 소개되어 많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의 제목을 ‘개신교 원로들, 제가 잘못했습니다. 김창인․강원용․조용기 목사 한자리에 모여 반성과 참회’라고 했고, 「국민일보」는 ‘한국 교계 참회운동 새 바람’ ‘용기 있는 회개와 고백, 사회변혁․갱신 새장 열어’라고 붙였더군요.
저는 그 가운데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의 참회 내용에 특히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 분은 단호하고 비장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값싼 은혜가 아닌데 값싼 은혜에 안주했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너무 값싸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이어서 은혜와 진리로 거룩함을 입은 새 사람으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진리 위에 서서 거룩함을 입은 새 사람으로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저는 교회 마당의 소나무들이 말을 알아듣는다면 ‘너희들, 양양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불에 타서 죽을 뻔했는데 교회 마당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으니 새 땅에 뿌리를 잘 내리고 푸르고 싱싱하게 잘 살아야 된다!’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도, 아니 나부터, 은혜의 새 터전 위에서 그렇게 살기 위해 힘쓰마!’ 하고 싶습니다.

그 은혜, 구원의 은혜 앞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절대겸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소나무들은 이곳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캐는 수고, 밤새 운반하는 수고, 이곳에 심는 수고가 있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을 예전 습관에서 떠나게 하는 수고, 교회 안으로, 말씀 안으로, 구원의 진리 안으로 옮기는 수고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수고를 우리는 전도라고 부릅니다.

그 소나무들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주변에 기둥들을 세워 붙들어 매었습니다. 그런 수고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양육이라고 부릅니다.

전도와 양육, 이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 기도할 때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한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자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때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였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 7~9)

얼마나 겸손합니까?
하나님은 솔로몬의 이 겸손함을 보시고 솔로몬이 원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만 주셨습니까? 아니지요, 솔로몬이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도 주셨습니다.

잠언서를 보면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서 3장 34절에는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잠언서 22장 4절에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잠언서 29장 23절에는 사람이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잠언서는 잘 아시는 대로 솔로몬이 기록했습니다.
솔로몬이 이와 같이 겸손을 강조한 것은 자기가 겸손하게 구해서 많은 것을 응답 받은 체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 겸손하게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겸손해서 잠언서에 약속된 은혜, 재물, 영광, 생명, 영예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여러 재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진이 우리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 산불도 그렇습니다.
올해는 어떤 기상이변이 우리를 괴롭힐지 모릅니다.
광우병, 조류독감도 염려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민족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데 겸손하게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봉헌예배를 드렸습니다.
봉헌의 모든 일이 끝난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시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역대하 7장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악한 길에서 떠나는 일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일입니다.
기도하는데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겸손하게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쳐주신다고 했습니다.

셋째, 우리는 전도할 때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의 에베소 전도 끝부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3차 전도 여행을 할 때 에베소에 3년을 머물며 전도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제일 오래 머물며 전도한 곳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차 전도여행 때도 에베소에 잠시 머문 일이 있었습니다.(행18: 19~21)
에베소는 고대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또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 도서관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규모에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화려하고 부유한 대도시일수록 전도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특별히 에베소는 이방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에는 풍요와 다산의 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데미(Artemis)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은 에베소의 수호신이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 여신이 신들 가운데 으뜸인 제우스신의 딸이라고 하면서 섬겼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베소라는 이름의 뜻은 명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아시아의 어머니 신전’이라는 뜻이 아닐까, 아데미 여신의 신전과 관계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추측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9장 25절을 보면 에베소 시의 서기장, 관리들 가운데 으뜸인 이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데 ‘에베소 시가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데미 여신 숭배는 에베소의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도시에서 전도를 하면서 성공을 거둡니다.
그 일이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에베소와 그 주변 원근 각지의 사람들이 모두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행19: 10)
치유의 역사, 악귀 축출의 역사, 회개의 역사,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세력을 얻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에베소에는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모형을 만들어 팔아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의 영업이 지장을 받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 전도하기 어려운 도시 에베소에서 이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전도라는 큰 과제를 안고 있고, 전도를 주제로 한 부흥성회를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이것은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전도단원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요?
선교비를 많이 썼기 때문일까요?
비범한 선교전략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에베소의 유력한 사람이 믿고 바울의 뒤를 밀어주었기 때문일까요?

그 답이 오늘의 본문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고별설교의 전반부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냄새가 많이 묻어 있는데, 오늘 본문은 바울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부분입니다.
바울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설교입니다.

바울은 이 고별설교에서 먼저 자기가 3년 동안 에베소에서 한 일을 말합니다.(18절~21절) 자기의 앞길에 대해 말합니다.(22절~27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

라고 했지요.
교회 지도자들에게 양 떼를 돌볼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면서 자신이 보인 모범을 따를 것을 부탁합니다.(29절~35절)

그 가운데에서 19절과 20절을 보면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전도, 바울의 목회는 겸손 위에, 눈물 위에, 인내 위에, 헌신 위에 행해진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방의 도시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지게 한 것은, 주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한 것은, 그 주변에 있는 도시들에도 복음이 전해지게 한 것은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헌신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여러분, 겸손하게 전도하고, 눈물로 전도하고, 인내로 전도하고, 헌신적으로 전도하세요.
틀림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겸손의 목회, 눈물의 목회, 인내의 목회, 헌신적으로 목회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속회 인도자와 속장님들 겸손으로, 눈물로, 인내로. 헌신적으로 속회를 돌보세요.
반드시 부흥하고 배가(倍加)될 것입니다.
선교회 지회장들, 교회학교 교사들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에서 바울이 제일 먼저 말한 것, 제일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19절을 보세요. “곧 모든 겸손과” 이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뒤에 옥에 갇혔을 때 에베소 교인들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 때 바울이 제일 먼저 말한 것도 겸손입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까지를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오늘 본문이나 에베소서나 모두 그냥 ‘겸손’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겸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다소 막연하지만 ‘겸손하게 전도하면 성공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의 고린도 전도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고린도는 방탕한 곳, 우상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전도하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자기의 힘을 가지고 전도하려고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의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5절까지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참 겸손한 고백이지요.
이렇게 한 결과, 그 방탕한 도시 고린도에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주 중요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겸손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좀 아쉬웠던 곳이 아덴입니다.
바울의 아덴 전도를 비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도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된 아덴에서의 설교를 보면 바울이 이 때 자기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겸손이 다소 결여된 전도를 한 아덴에서 바울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차 전도여행 때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왔습니다.
고린도에서 일년 육 개월 머물며 전도했고,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잠시 들렸었습니다.
그리고 삼차 전도 여행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아덴에서의 아쉬운 체험 때문에 고린도에서는 겸손하려고 했고, 고린도에서 겸손하게 전도해서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에베소에서는 더욱 겸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겸손하게 전도하면 성공합니다.
거기에 눈물을 더하고, 인내를 더하고, 헌신을 더하면 아데미 여신의 거대한 힘과 같은 어려운 세력들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를 다시 보세요.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교회,’ 주의 뜻, 말을 바꾸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 전도입니다.
겸손하게 전도할 때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됩니다.

부활절에 저는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로뎀 나무 아래의 탄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엘리야와 같이 탈진 상태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이사야서 57장 15절의 말씀을 보세요.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혼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십니다.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발돋움을 해야 합니까?
발돋움하려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입니다.
아닙니다. 반대로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됩니다.
마태복음 18장 4절의 말씀을 잘 아시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주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할 수도 있었는데 자기를 종의 형태로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게 하셨습니다.(빌2: 5~11)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장로들에게 마지막으로 자기 고백적 설교를 하는데 첫 마디가 겸손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기관을 섬기다가 떠날 때 ‘나는 겸손하게 이 기관을 섬겼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직무를 맡아 일하다가 임기를 끝낼 때 ‘나는 겸손하게 이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장군이 삼십 여 년 군대생활을 하고 전역을 했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분 장로님었는데 ‘이럴 때 많은 동료들이 나는 나라를 위해서 청춘을 모두 바쳤다고 합니다. 나도 그렇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까 나는 나라로부터 받은 것이 더 많습니다. 내가 나라를 위해 한 것보다 나라가 나에게 해 준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분, 지금도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에도 ‘나는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기에 힘썼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오래간만에 조용한 시간을 이삼 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여러분이 송구영신 예배에 내신 기도 카드를 가지고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전에는 한 나절이면 이 일을 다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틀 가까이 걸리더군요.
그만큼 기도 카드의 숫자가 많아지고 기도내용이 충실해지고 압축되었습니다.
기도 카드에 적은 기도 내용 가운데 응답 받은 것에는 붉은 볼펜을 가지고 한자로 응할 응(應)자를 써 놓았습니다. 아직 응할 응 자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연말이 되어 점검하면 참 많아지는 것을 매년 체험합니다.

지금부터 여러분, 이런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우리 교회는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여, 우리 교회 성도들은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나부터 그렇게 되게 하소서’

그러면 올해 연말이 되어
‘나는 올해 겸손하게 주의 뜻을 행하기에 힘썼더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간증을 풍성하게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신앙생활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구원의 은혜 앞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겸손하게 구하시기 바랍니다.
전도할 때 겸손하게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더 많은 응답을 받고, 더 많은 열매를 맺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지친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하나님을 만나고, 전국에서 큰 자가 되고, 주님이 높여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간증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고, 이 교회가 되기를 끝까지 겸손의 모범을 보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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