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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주일] 감사를 잊지 말라 (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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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철 목사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31-32)

감옥과 수도원은 ‘고립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에 대하여 ‘데이비드 소퍼’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단지 불평하느냐, 아니면 감사하느냐는 차이일 뿐이다. 수감된 죄수가 수도자와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질 때 감옥은 수도원으로 승화될 것이고, 반면에 수도자가 ‘불평의 마음’을 가질 때 수도원은 감옥으로 전락될 것이다.” 사람은 같은 시간과 환?안에 살면서도 감사하며 사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 있을 때에 내 삶의 시간과 자리가 가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행복한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 시간과 자리가 의미 없는 시간이 되고 불행한 자리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천국의 삶이냐 지옥의 삶이냐는 것은 감사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감사를 잊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데 나타난 ‘탕자의 형’입니다. 이 사람의 동생은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상속받을 분깃의 재산을 받아 가지고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모든 재산을 날리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며 그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형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벌인 아버지에게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동생이 살아 돌아왔기에 감사해야 함에도 감사를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형의 모습은 감사를 잊고 있는 우리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가를 깨닫도록 해줍니다.
감사를 잊고 사는 사람은 탕자의 형과 같은 삶을 삽니다. 그러면, 감사를 잊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갑니까?

분노와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갑니다.

탕자의 형은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집안의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하인을 불러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습니다. 형은 아버지의 재산을 향락과 방탕에 날려버리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소리임을 확인하고 분노했습니다. 화가 난 형은 그 잔치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형이 노하였다’는 말 중 ‘분노하다’는 말, ‘오르기조’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다’라는 말에서 온 말입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격앙된 감정에서 나온 화가 아니라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동생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감사를 잊고 있었던 형은 오히려 동생으로 인하여 깊은 분노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아버지는 화가 난 형을 달래면서 잔치자리에 함께 해주도록 간곡히 권했습니다. 형은 이런 아버지에게 원망하면서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형은 사랑하는 동생이 잘못했을지라도 그래도 죽지 않고 돌아왔음을 감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감사를 잊고 있었기에 잔치해 주는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원망하며 불평하는 아들이 된 것입니다.

감사를 잊고 사는 사람은 깊은 분노 속에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봅니다. 왜 분노합니까? 왜 불평하며 원망합니까? 감사를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곧,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한 의료선교사가 중국의 오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길에서 맹인으로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불쌍히 여겨 데려다가 수술을 해줌으로 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걸인은 선교사에게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어안이 벙벙하여 그 이유를 묻는 선교사에게 그는 “내가 이제 눈이 보이니 어찌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선교사가 자신의 눈을 수술하여 보게 함으로 자기가 하던 영업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잊고 사는 사람들은 감사해야 할 자리를 분노와 원망과 불평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탕자의 형처럼 감사를 잊고 살지 마십시오. 감사 대신에 분노와 원망과 불평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감사함으로 분노를 다스리고 불평과 원망에서 자유 하십시오.

자신의 가치와 축복을 잊게 합니다.
화가 나서 불평하며 원망하는 형에게 아버지는 형이 얼마나 귀하고 축복의 아들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말씀했습니다.
왜, 내 동생은 놀고 나는 일해야 합니까?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을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고,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열심히 땀흘려 일한 형을 위해서는 왜, 염소새끼 한 마리 잡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노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형에게 아버지는 너는 동생보다 훨씬 귀하고 축복 받은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곁에서 땀흘려 일해주고 아버지를 지켜주며 보호해 주니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가 재산을 다 날리고 돌아온 작은아들보다 형이 더 귀하고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동생은 자신의 분깃을 다 없앴지만 형에게는 자신이 받을 분깃이 그대로 있으니 형이 더 축복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용서받는 것보다 용서해주는 자가 더욱 가치 있고 귀한 자라는 것입니다. 잔치를 받는 동생보다 잔치를 베풀어주는 형이 더욱 축복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곧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욱 축복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가치 있고 축복 받은 네가 화를 풀고 잔치자리에 함께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감사를 잊고 사는 사람은 탕자의 형처럼 자신의 가치와 축복을 잊고 살아갑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가치와 축복을 보게 하여 더욱 큰 기쁨과 즐거움 속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동화 중 ‘새들의 불평’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각양각색의 동물을 만들어 산과 들과 바다로 내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새들은 화가 나서 입이 뾰로통하게 나왔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 주시면서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가느다란 다리를 주셨습니까? 그리고 양어깨에 ‘날개’라는 무거운 짐을 매달아 놓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새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에게 가느다란 다리와 무거운 날개를 준 것을 감사하거라. 그리고 너희들이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양 날개를 활짝 펴보아라.” 새들은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겼던 육중한 날개를 활짝 펴 힘껏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 순간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창공을 날 수 있었습니다. 새들의 양어깨에 붙은 것은 짐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축복의 날개’였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는 날기 위한 ‘축복의 다리’였습니다.
새의 무거운 날개와 가는 다리에서 가치와 축복을 찾듯이 감사는 우리의 주어진 조건에서 가치를 찾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함으로 자신의 위치를 보게 되면 그곳에는 귀중한 가치와 축복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를 잊고 있을 때에는 그 가치와 축복의 자리가 분노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형은 감사를 잊고 있었기에 맏아들과 형으로서의 가치와 잘못된 동생을 돌보는 축복의 세계를 잊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에서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그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축복을 확인하게 됩니다. 감사함으로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사람이 되십시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축복을 보고 그 축복의 삶을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충만한 세계를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염려와 관심과 사랑의 충만한 세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충만한 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감사를 잊고 있었던 형은 자식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의 충만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무한한 용서와 용납 그리고 끝없는 사랑, 끝없이 주고자 하시는 희생의 충만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아버지의 그 세계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감사를 잊고 있었던 형은 아버지의 충만한 마음을 깨닫지 못함으로 그 충만함을 나누지 못한 것입니다. 감사하는 눈으로 아버지를 보았다면 아버지의 잔치에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fixation)’란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어느 상태에 고정되어 유치한 습관을 계속 유지함으로서 안정감을 느끼는 현상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계속 엄지손가락을 빠는 것도 일종의 고착상태입니다. 챨스 슈츠의 만화 ‘피너츠’에 ‘라이너스’라는 아이가 등장합니다. 이 소년은 항상 담요 한 장을 들고 다닙니다. 담요를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라이너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왜 담요를 버리지 못하니? 어른이 되면 그 담요를 어떻게 할 생각이니?” “이 담요로 멋진 운동복을 만들어 입겠어요.” 라이너스는 고착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고착상태에 빠져있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적인 고착상태에 빠져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한 세계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고착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충만하심의 세계를 잊고 살면 아니 됩니다. 병아리가 껍질을 까고 나오듯이,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듯이 고착상태에서 나와 하나님의 충만하심 세계를 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하는데서 이 고착된 상태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충만한 삶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충만함으로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9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한 충만하심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사랑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의 충만한 세계가 우리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은혜와 축복의 충만한 세계는 감사하는 데서 깨달아지는 세계이고 감사함으로 소유하는 세계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도 못한다”(사1:3)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1:21)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가깝고 바르게 알고 깨달으십시오.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하며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의 충만한 세계를 가지고 사십시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 Niebuhr)’는 기독교인의 세 가지 큰 덕을 가르친 고린도전서 13:13의 ‘믿음 소망 사랑’에다가 감사의 덕목 하나를 더 보태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우리의 삶에 항상 있어야 할 것 중의 하나입니다. 감사를 잊지 않는 데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더욱 온전하고 확신하며 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될 것입니다.

왜 분노하며 원망하며 불평하며 살아야 합니까? 왜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불행한 사람이 되게 합니까? 왜 하나님의 풍성하신 그 은혜와 사랑과 축복 안에서 살지 못합니까? 감사해야 함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감사를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성도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축복의 세계를 가지고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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