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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베랴 바다에서 (요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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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날씨가 많은 작용을 합니다. 너무 더워도 좋지 않고, 추워도 좋지 않습니다. 많이 비가와도 문제가 있고, 건조해도 영향을 받습니다. 적당한 기후와 날씨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한 삶을 삽니다. 우리 나라는 사계절이 아주 뚜렷한 좋은 기후이기에 살기가 좋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겨울의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날씨가 영하 권으로 떨어진다고 들었습니다. 몸 관리를 잘해야 할 것입니다.

  기후가 뚜렷하다 보니까, 우리 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날씨에 관한 속담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거의 정확하게 맞습니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셨습니까? “개구리가 울면 비가 온다” 기압골이 접근하면 기압이 낮아집니다. 그러면 습기가 증가되어 호흡에 지장을 초래합니다. 그렇기에 개구리는 울음을 평소보다 많이 해서 호흡 량을 늘이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적중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만 오면, 개구리가 돌아가신 엄마생각하고 우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눈발이 가늘면 곧 추워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눈은 대기의 온도에 따라 그 모양과 성질이 달라집니다. 눈발이 가늘면 상층으로부터 한기가 가라앉기 때문에 추워질 징조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춥고, 눈도 많이 내립니다. 그러나 봄이 되면 따뜻해지고 만물이 생기가 돕니다. 날씨가 언제나 좋지만은 않습니다. 때론 춥고, 덥기도 합니다. 마음을 따듯하게도 하지만, 바람도 불고 축축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순환합니다. 이게 바로 날씨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삶도 그렇습니다. 날씨만큼 변화가 있습니다. 때론 형통할 때가 있고, 곤고할 때가 있습니다.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가 있고, 기쁘고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삶이 계속해서 순환합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때론 홍해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문제와 난관 앞에 밤을 지새우며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때론 갈멜산과 같은 투쟁의 현장에 설 때도 있고 빈들과 광야와 같은 막막한 길을 걸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삶의 경우를 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한가지를 더 생각하려고 합니다. 바로 ‘바다’입니다. 바다를 통해 인생을 배웁니다.

  본문은 성경가운데 바닷가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바다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본문은 요한복음의 마지막장이고, 사복음서의 마지막입니다. 여기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행하신 귀한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곳을 디베랴 바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보려주려는 것은 크게 3가지입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7절까지, 오늘 읽은 본문이 첫 번째 부분이고, 8절부터 14절까지가 두 번째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15절부터 19절까지가 세 번째이고, 나머지는 전체 말씀의 결론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모두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일이기에 오늘은 21장 전체를 함께 보려고 합니다. 그 중에 첫 번째로 해당되는 오늘 말씀에서 있었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주님을 만난 제자의 이름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두 7명의 제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 가운데 4명만 빠지고 여기에 다 모였습니다. 이들이 디베랴 바닷가에 있을 때, 주님이 그들에게 다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제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찾아오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도 찾아오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찾아오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여기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선, 그들은 실패한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제자들은 한결같이 주님이 죽으실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가까이하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여기에 대표적인 인물인 베드로는 그의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치욕적인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인생과 신앙에서 패배하고, 사탄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던 실패한 자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배신자들입니다. 신앙과 삶에서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잘못한 단순한 실패에서 넘어 이들은 주님을 몹시 아프게 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배신의 경험을 있을 때,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찾아오는 것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찾아가는 것이 되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지금 바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3절을 보십시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이것은 정말 실망스런 모습입니다. 과거 한때 잘못했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잘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도 받았고, 이젠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들이 다시 사명을 붙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주님을 따라다닌 것인데 그들은 지금 사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주님을 왜 따라다녔는지, 왜 믿는 지에 관심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당시 주님이 그들을 찾아가기가 몹시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지금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실패하는 자들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배반했던 사람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실망시키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근심시킨 자입니까? 그런 우리를 주님은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감사와 깨달음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주님이 필요를 공급하셨습니다. 이것이 8절부터 14절까지에 두 번째 단락에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찾아오셔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사명에는 관심이 없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 그들은 그날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오셔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나중에 세어보니까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대단한 수확입니다. 주님은 찾아오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 당장 필요한 것을 아시고 그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제자들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섬세한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다 공급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바울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이 말씀의 은혜가 힘들고 어려울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현장에서 주님은 날마다 필요한 것, 우리가 쓸 것, 그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잘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공급해주는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 믿음의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시키고, 이 믿음이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얻었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삶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그럴 때 교만해 집니다. 다 내가 잘해서 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주님의 공급하심입니다. 이 믿음과 신앙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거기에 더 큰 공급과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송삼석’이란 이름을 가진 크리스챤 기업인을 아십니까? 이제 나이가 많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한때 우리 나라에서 성공한 기업인으로, 많은 사람에게 화제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우리 나라가 아주 힘들었던 60년대 기업을 창업하여 크게 키운 사람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시련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던 그는 그때마다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오늘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한 제자들에게 주님이 오셔서 기적을 베푸신 이 말씀 앞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필기도구를 만드는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와 힘이 되었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처음부터 볼펜의 이름을 ‘모나미’라고 정했습니다. 이 말은 불어로 ‘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친구라는 것을 고백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 옆에 ‘153’이란 숫자를 적었습니다. 이것은 여기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숫자였습니다. 그때부터 ‘모나미 153’이란 볼펜이 만들어졌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모나미 볼펜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볼펜이 팔렸습니다. 지금도 모나미에서 만든 볼펜에는 꼭 153이란 숫자가 붙어 다닙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필요한대로 공급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허황된 꿈만 갖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한해동안 이 믿음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축복과 은혜를 임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주님이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 마지막부분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똑같은 질문을 3번 반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의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런 질문 앞에 베드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오늘 이 질문을 한 곳이 ‘바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바다라고 하지 않고 ‘디베랴 바다’라고 했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성경에서 ‘갈릴리 호수’로도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이 둘은 같은 이름입니다. 호수가 아니라 바다와 같이 넓은 곳이어서 갈릴리 바다라고도 부릅니다. 또 이곳은 ‘게네사렛 호수’라고도 부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만난 곳을 설명할 때 이곳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게네사렛은 ‘비파’를 뜻합니다. 아마도 갈릴리 바다의 모양이 비파처럼 생긴데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릴리 바다가 로마가 유대를 속국으로 만든 뒤부터 새로운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은 자신이 다스리던 지역의 수도를 새롭게 건설하고, 당시 로마 황제이던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붙여 갈릴리바다를 ‘디베랴 바다’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 뒤부터 로마사람과 로마와 관련한 모든 사람들은 그곳을 디베랴 바다라고 알았습니다. 이름만이 아니라 그곳은 그때부터 황제의 위엄과 권위가 어디보다도 뛰어난 곳이 되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황제의 이름을 부를 때 마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처럼 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불러도 유대인들은 언제나 그곳이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자기들 생명의 원천이었던 갈릴리의 이름을 지배자를 흉내내어 부를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갈릴리바다를 디베랴로 부른 것이 꼭 두 번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곳을 ‘갈릴리 바다’라고 하지 않고, ‘디베랴 바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향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이 지금 베드로에게 향한 사랑의 요구는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황제의 위엄과 권위와 사상과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그 삶의 현장,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에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황제가 마치 하나님처럼 보이는 삶의 현장에서 나를 사랑하겠느냐, 황제가 가장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사랑하겠느냐?”
베드로는 처음에 주님의 의도를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반복하여 물으실 때, 그는 그 깊은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근심하며 대답했습니다. “네, 주님, 아무리 황제의 사상으로, 황제숭배로 뒤덮인 삶의 현장에서라도 나는 변함없이 주님만을 사랑하고 높이겠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실패하고 배반하고 실망시킨 여러분과 저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도 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로 공급하시고 채워주십니다. 그 주님이 이제 나에게 묻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황제의 귄위로 장악된 세상에서, 유혹의 세상에서, 어두움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진리가 상실된 세상에서,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겠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 앞에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어떻게 솔직히 고백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남은 생애를 사시렵니까? 주님은 오늘 다시 디베랴 바다로 나가는 여러분과 저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다시 주님 앞에 ‘네 주님, 변함없이 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다짐하면서 삶의 현장으로 떠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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