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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찬양의 회복 (시 150:1-6, 행 16: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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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오늘은 우리의 예배 가운데 찬양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찬양을 참 많이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찬양을 드립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찬양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찬양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마귀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 또한 찬양입니다. 그래서 찬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찬양이 이렇게 중요하고 또 많이 불려지는 반면 또 상당히 잘못 불려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약과 신약의 본문을 통해 참되고 바른 찬송은 어떤 것인지, 또 찬송에 대한 잘못된 자세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구약본문인 시편 150편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의 결론이 되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시편의 150편 전체가 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시오, 주옥같은 찬양들인데 그 중에서도 시편 150편은 그 모든 찬송의 결론이 되는 아주 중요하고도 귀한 찬송입니다. 특별히 이 시편 150편은 우리가 왜 찬송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떤 자세로 찬양을 해야 하는지 아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을 읽읍시다.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1절은 우리가 어디서 찬양할까, 바로 찬양의 장소 문제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 성소에서,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성소란 오늘 말로 바꾸면 교회겠지요? 당연히 교회에서 찬양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집회에서는 찬양을 불러야 하고 모든 모임은 찬양으로 시작해 찬양으로 끝나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찬양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물론 교회에서도 찬양을 해야 하지만 궁창에서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궁창이란 하늘을 덮고 있는 뚜껑입니다. 따라서 하늘 아래 어디에서나 찬양하라는 뜻이 됩니다. 정해진 장소에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래서 그 어디에서나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찬양에는 때와 장소가 따로 없습니다. 기도도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때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집에서 일을 하다가도 좋고 운전하다가든 어디서든지 찬양해야 합니다. 틈이 날 때마다 부르고, 즐겁고 기뻐도 찬양하고, 외롭고 힘들어도 찬양하고, 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찬양은 즐거울 때도 해야 하지만 특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우리에게 큰 힘을 줍니다. 엄청난 능력을 일으킵니다.

오늘의 신약본문인 행 16:23 이하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무엇을 하였습니까? 매를 많이 맞고 발에는 착고가 차여져 깊은 지하감옥에 갇혔는데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불평 대신에 아프다는 신음소리나 시름 대신에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감옥 문이 열리고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찬양은 이렇게 큰 힘이 있습니다. 찬양은 기도 못지않게 큰 능력이 있고, 특히 어렵고 힘들 때 부르는 찬양은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대하 20:20 이하에 보면 유다가 여호사밧 왕 때 엄청난 숫자의 암몬 모압 연합군의 침략 앞에서 어떻게 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전쟁준비는 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대를 맨 앞에 세우고 군대를 그 뒤에 세우고 전쟁터로 나아갔습니다(우리 찬양대 같으면 맨 앞에 서시겠습니까?). 그래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으로 전쟁에 승리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대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찬양하여 하나님을 감동시킴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찬양의 힘을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찬양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반드시 찬양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예배찬송도 더욱 힘 있게, 입을 모아, 가사를 음미하며 부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예배 찬양이 너무 힘이 없습니다. 사람이 적어서도 아니고 음악성이 없어서도 아닌 것 같습니다. 더욱 힘차게 찬양을 합시다.

2) 2절은 우리가 누구를 무엇 때문에 찬양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데 특별히 “그”를 위해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을 찬양해야 하는데 왜 찬양해야 하는가? 특별히 “그(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그(하나님)의 지극히 광대하심(크고 위대하심)을 인하여” 좇아 합니다.

찬양이란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찬양은 순수한 마음에서 나를 낮추고 하나님만 높이는 것이 되어야지 만에 하나라도 공명심이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곤란합니다. 찬양이 일반 노래와는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단지 노래가 너무 좋아서, 아니면 가수가 멋있어 보이고 유명해지기 위해서라는데 우리의 찬양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음악도 음악성이 참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흔히 찬양대회라는 것이 있어서 찬양을 심사하고 1등을 뽑아 상을 주는 모습을 보는데 저는 참 모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력보다, 음악성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룩성’입니다. 우리의 찬양 속에 들어있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하면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음악성이나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진짜 찬양의 실력은 영성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찬양이 영성을 가지려면 음악성도 중요하지만 그 찬양의 태도와 가사의 힘이 더 중요합니다.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라 했습니다. 우리는 찬양을 할 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음 안 틀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찬송의 가사를 잘 음미하고 거기서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3) 3-5절은 우리가 무엇으로, 어떤 수단으로 찬양할까?를 가르쳐 줍니다. “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여기에는 당시에 쓰이던 각종 악기가 다 나옵니다. 총 3가지 종류의 악기가 나오는데 전문적인 용어를 쓰자면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입니다.먼저 관악기는 어떤 것이 나올까요? 3절에 나오는 ‘나팔’과 5절에 나오는 ‘퉁소’가 관악기입니다. 현악기에는 어떤 것이 나올까요? 3절에 나오는 ‘비파’와 ‘수금’이 현악기입니다. 4절에서는 ‘현악’이라는 말로 나옵니다. 4절에 나오는 소고와 5절에 나오는 ‘제금’은 타악기입니다. 소고는 손에 들고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작은 북을 뜻하고 제금은 우리나라의 바라나 서양의 심벌즈 같은 금속 타악기인데 특별히 5절에서는 제금의 두 가지 종류인 ‘큰 소리 나는 제금’과 ‘높은 소리 나는 제금’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소리가 나는 다양한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4절에서는 ‘춤도 추면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4절에 나오는 ‘퉁소’는 목동의 피리 같은 것입니다. 이 악기는 주로 세속적 음악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만 성경 중에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종교적 목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뜻할까요? 악기나 수단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찬양하는 우리의 심령과 중심이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다면 그 어떤 세속적인 악기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기도 악기지만 춤을 추는 것은 왠지 찬양에 안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흑인 교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린 적이 있는데 정말 역동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흑인 특유의 소울 풍의 찬양과 또 춤을 추며 찬양하는데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찬양이었는지 모릅니다. 저도 처음에는 체면 상 가만히 있다가 결국 함께 춤추게 되었습니다. 제가 춤추며 찬양하는 모습 상상이 가십니까? 이와 같이 모든 악기, 심지어 세속적인 악기까지 동원해서 찬양하고 춤까지 추면서 찬양하라는 것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악기와 수단을 다 동원해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예배에 합당한 악기나 찬양의 모습은 어떤 것이라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교회마다 찬양집회를 많이 하는데 우리 교회도 한달에 한번씩 경배와 찬양예배를 드립니다만 이 찬양집회에서는 주로 여러 가지 현대 악기를 사용하며 복음성가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악기와 곡의 종류에 대해 조금 거부감을 가진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장로교 예배는 반드시 점잖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은 기타와 키보드, 드럼 등 각종 현대 악기를 동원하고 각종 최신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거룩한 교회에서 복음성가를 부르고 저런 소위 ‘딴따라’ 악기를 동원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 목소리로만 아니라 손뼉도 치고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하고 또한 기뻐서 춤추며 찬양하라 하였습니다. 삼하 6장에 보면 다윗도 법궤를 모셔올 때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했고 자신도 하도 기뻐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걸 보고 아내 미갈이 채신머리없다고 비웃었습니다. “왕 체면에 어떻게 저런 천박한 행동을...” 하는 편견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미갈을 책망하십니다. 우리나라 교회들은 얼마 전만 해도 피아노만 교회에 합당한 거룩한 악기이고, 드럼이나 전자악기는 술집에서나 쓰는 세속적인 악기라 절대 허용할 수 없고, 기타조차도 유행가 가수나 쓰는 악기라 하여 교회에서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따지고 보면 피아노도 세속악기입니다. 그 옛날 교회에서는 파이프 오르간만을 사용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만이 거룩하고 종교적인 악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차츰 교회에서 피아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찬송가를 보면 상당수가 180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곡 중 대부분은 가스펠, 즉 복음성가입니다. 이 가스펠 중 상당수가 찬송가에 들어왔고 오늘날 자연스럽게 예배 중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 때는 미국에서 그 유명한 부흥사 D.L.무디를 중심으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때입니다. 이 때 잠자던 교회가 깨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천막 부흥집회를 통해 은혜를 받고 회심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천막에서 하는 집회에서 부를 찬송도 마땅치 않고, 또 교회에나 있는 파이프 오르간을 가져올 도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세속적인 악기로나 알고 있던 피아노를 동원하고, 그 반주에 맞게 생키(I.D.Sankey)라는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에 의해 작곡되고 불려진 것들입니다. 생키는 본디 세속적인 가수로 나섰다가 회심하여 복음성가 가수가 되고 훗날 무디를 따라 이 부흥집회들을 인도하면서 많은 곡을 작곡하고 불러 이 찬양들이 나중에 찬송가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342, 349, 391, 478장 등).

어떤 분들은 굳이 찬송가 안에서도 찬송과 복음성가(가스펠)을 나눠 이 가스펠에 속하는 것들은 예배 중에 부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찬송가는 다 똑같은 찬송가지 왜 구분을 합니까? 저는 이런 구분이 합당치 않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어떤 악기가 교회에 어울리고 어떤 악기는 쓰면 안 되느냐, 또 예배 중에 찬송가만 부르고 복음성가는 안 된다 하는 논쟁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 피아노도 처음 쓸 때 술집에서나 쓰던 세속적인 악기라 하여 논쟁이 많았지만 이제는 당당히 교회의 가장 중요한 악기가 되었지 않습니까? 시 150:5에서도 세속적인 악기인 퉁소를 찬양 때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더 이상 악기에 대해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저는 보수적이라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교회 예배당에서 드럼 치는 것보다 조용히 오르간이나 피아노 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 취향이지 이 생각을 누구에게도 강요할 마음이 없습니다. 모든 악기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옳습니다. 악기가 무엇이냐 보다 내 마음의 중심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은 어떻습니까? 물론 저는 무분별하게 복음성가가 예배시간에 들어와 찬송가를 다 몰아내고 예배에 찬송가가 사라지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중고등부나 청년부 예배시간에도 반드시 찬송가를 많이 부르라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정말 영감 있고 경건한 복음성가를 예배 중에 한 두 곡 부르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저는 솔직히 아직도 복음성가보다는 찬송가를 더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요즈음 우리가 예배 후에 부르는 ‘좋으신 하나님,’ 참 좋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에 대해 설교한 후 “(직접 부른다)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하고 찬양하면 얼마나 은혜가 되고 감동이 옵니까?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도 가스펠이 많이 들어있다고 했지요? 너무 좁은 생각으로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4) 마지막 6절은 150편의 결론으로서 “누가 찬양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누굽니까? ‘호흡이 있는 자마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살아 있는 자들은 누구나 다 찬양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찬양을 할 수 없는 사람이 꼭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호흡이 없는 사람,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말을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말을 못하는 장애인도 수화로 아름답게 찬양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찬양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목소리가 좀 나쁘면 어떻습니까? 음이 좀 틀리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숨이 붙어있는 한은 찬양을 해야 합니다. 찬양은 우리 믿는 자들 모두의 의무요 특권입니다.

아무쪼록 살아있는 한, 우리에게 호흡이 붙어있는 한 찬양을 멈추지 않는 여러분 되시고, 우리 효자교회도 예배 찬송뿐 아니라 모든 찬송을 바르고도 간절하게 드림으로 찬양의 참된 능력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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