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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봉헌의 회복(2) (신 26:1~15,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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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오늘은 그동안 계속되었던 예배에 관한 시리즈 설교 중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봉헌의 참된 의미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위만 처다 보는 사람입니다. 항상 나보다 잘 사는 사람, 나보다 잘 생긴 사람, 나보다 공부 많이 한 사람만 처다 봅니다. 그러니 만족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항상 불만스럽고 내 신세가 한심합니다. 그래서 절망을 하게 됩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아래도 처다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나보다 잘 사는 사람, 나보다 잘 생긴 사람, 나보다 공부 많이 한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가운데는 나보다 못한 사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습니다. 이렇게 아래도 볼 줄 아는 사람은 절대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절대 자신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줄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가운데 어떤 사람입니까?

언젠가 부모님의 불화와 경제문제로 고민하다가 자살을 선택한 고등학생 이야기가 신문에 나가자 어떤 청소년 한 사람이 이런 내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자살한 그 친구처럼 불화를 일으킬만한 부모가 아예 없습니다. 저는 고아이며 소년가장입니다. 저는 동생들을 먹여 살릴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항상 가난하고 쪼들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같은 사람들은 다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청소년이 단 한번이라도 아래를 볼 줄 알았다면 그런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도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도 있다. 나에게도 찾아보면 감사의 제목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열심히 살면서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나가기 위해 애썼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건을 볼 때마다 저 자신과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연 어떤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록 자살한 청소년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안 할 뿐이지 우리 중에서 맘속에는 늘 나만 불행하고 나만 못난 것 같고 나만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다니지만 항상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오히려 큰 불행과 시련 속에서도 아래를 볼 줄 아는 사람, 그래서 감사의 제목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설교 후에 부를 찬송가 489장 가사에도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가 마음먹고 감사의 제목을 찾아보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래는 안 보고, 우리보다 더 형편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은 안 보고 오직 위로만, 위로만 보면서 왜 저렇게 잘 살고 편안한 사람들도 많은데 나만 이런가라고 원망하고 불평해 오질 않았던가요? 이런 식의 태도라면 우리는 아무리 돈을 벌고 성공을 해도 전혀 만족할 수 없고 감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위만 처다 보지 말고 아래도 처다 봅시다. 또 감사의 제목을 세어봅시다. 그러면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 26장은 바로 이 참다운 감사의 자세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감사를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인 봉헌의 자세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로, 2절 말씀에 보면 토지 소산의 맏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봉헌은 “맏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맏물이란 첫 번째 소득입니다. 첫 번째란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을 뜻합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이 맏물이라는 말이 first fruits라고 나와 있는데 이 first라는 말은 첫 번째라는 뜻도 있고, 가장 좋은 것, 최고의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첫째란 으뜸,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맏물, 내 첫 번째 소득을 내가 갖지 않고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은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 가장 좋은 것을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입니다. 봉헌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내 모든 수입 중에 첫 번째 가장 귀한 것,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드리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수입이 있으면 가장 먼저 새 돈으로 봉투에 넣어서 하나님께 드리고 시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똑같은 만원이라도 먼저 떼어놓은 만원과 쓰다가 남아 드리는 만원은 완전히 다릅니다.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액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본문 5~10절에는 이스라엘의 신앙고백문이 나옵니다. 애굽의 종노릇을 하던 우리 민족을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이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게 해주신 것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은 신앙고백의 자세로 드려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봉헌을 할 때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의 신앙에서 우러러 나온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봉헌은 단순히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이 시간 헌금과 봉헌을 구분하여 헌금이라는 말 대신 봉헌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보에도 헌금이 아니라 봉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헌금은 단순히 돈을 드리는 것이라면, 봉헌(奉獻)은 받들 봉(奉), 바칠 헌(獻)으로 하나님께 삼가 받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아주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정성스럽게 드린다는 뜻입니다. 봉헌을 할 때 물질도 드리지만 그 물질과 함께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봉헌은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고백을 하면서 봉헌을 한 것을 보십시오. 강한 손과 편 팔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내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면서(8절) 물질과 헌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봉헌하는 물질 속에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진실된 감사의 자세, 뜨거운 감격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봉헌은 신앙고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부자들이 드린 큰 액수의 봉헌보다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봉헌을 더 귀하게 여기시고 이 과부가 부자들보다 더 많이 봉헌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액수보다 그 정성, 그 감사의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봉헌은 반드시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러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체면에서 나온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문제입니다. 우리는 봉헌을 드릴 때마다 과연 이 봉헌은 감사에서, 신앙고백에서 우러러 나온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 본문 11~12절에 그 예물로 드린 소산을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와 함께 나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사의 봉헌은 교회에 헌금을 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나눔의 삶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는 구약에서 늘 가난한 자, 약한 자의 대표적인 계층으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가난한 자, 약한 자와 함께 나누는 삶을 통해 참된 감사의 삶, 봉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재정은 마땅히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상당 부분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말고도 나머지 물질로 언제나 나누는 삶, 배려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성별된 물질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15절에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즉 이 감사의 예물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제목이 더 많아지도록 복 내려달라고 간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참된 봉헌을 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부자 되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부자 되는 것은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취직하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헌금생활 바로 하는 법, 감사의 제목을 찾아 자주자주 감사헌금 하는 법, 십일조 하는 법을 가르치면 됩니다. 미국 청소년들 다 방탕하고 타락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들 가운데 정말 바른 신앙 가진 친구들이 많답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 십일조 서약을 하는데 제가 연봉 만 달러를 받으면 십일조를 하고 2만 달러 받으면 십의 이조를 하고 십만 달러 받으면 십의 오조, 십의 구조까지 하겠다고 서약한답니다. 이 젊은이들의 서약대로 십의 오조, 십의 구조를 드려도 충분히 넉넉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복 주시고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진짜 부자 되는 방법이 이것 아니겠습니까? 감사할 줄 알면 하나님이 감사할 일들을 더 많이 만들어 주시고 채워 주십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 만드는 것이 자녀들 형통한 삶 살도록 가르치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신약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인은 자그마치 삼백 데나리온 어치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삼백 데나리온이란 일용직 노동자의 일년 수입에 해당되는 막대한 액수입니다. 제자들은 그 여인이 쓸데없이 낭비를 한다며 책망을 합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이나 돕지 말이야 하면서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매우 귀한 것으로 평가하시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 향유가 정말 비싼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여인이 8절에 나온 대로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몸에 부으려고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려고 하는 마음,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다고 하는 마음이 참으로 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은 이제 내가 곧 죽을 것이므로 앞으로 아무리 이런 귀한 것을 바치고 싶어도 바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귀한 것을 드리는 것도 다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예물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라면 정성을 바쳐 드리되 가장 귀한 것을 드려도 조금도 아깝지 아니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아까운 마음이 든다면 차라리 드리지 마십시오. 또 주님을 위한 것은 그 어떤 다른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 물론 귀하지만 결코 주님을 위해 드리는 가치와는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드리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가치가 떨어집니다. 사람마다 형편마다 이 때는 다릅니다만 정말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그 때 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요즈음 너무나 감사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올해 들어 우리 교회 출석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주만 해도 주일 출석이 성인 490명 정도, 청년 40명, 합해서 약 530명이 출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 들어 점점 헌금도 늘어나 제가 굳이 헌금 이야기 안 해도 너무도 헌금을 잘 하고 계십니다. 목사가 성도 늘어나고 헌금 늘어나면 이보다 감사한 일이 없지요.

그런데 성도들의 출석 숫자도 중요하지만 숫자가 다는 아닙니다.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성도들의 질적 수준도 올라가야 합니다. 헌신하는 성도, 신앙으로 무장된 성도, 정금처럼 귀한 성도가 많아져야 합니다. 양적인 문제뿐 아니라 질적인 문제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봉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의 헌금 액수가 늘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액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그보다 봉헌하는 성도들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헌금의 양적인 문제보다 질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물이, 우리의 봉헌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정말 효자교회 성도들은 제대로 헌금하는구나 하고 인정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설교제목인 “참된 봉헌의 회복”은 헌금액수가 회복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봉헌의 자세, 봉헌의 본질이 회복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작년 가을, 추수감사주일 때 봉헌을 하면서 그냥 드리지 말고 한 해 동안 가장 감사했던 일 하나씩 고백하고 드리자고 했더니 참 신선하고 은혜롭더라 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는 추수감사주일 한 주일로만 그치면 안 됩니다. 매 주일, 매번 봉헌할 때마다 똑같은 자세로, 신앙고백의 자세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물질을 드리는 순간마다 봉헌하는 그 순간마다 물질과 더불어 나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나의 신앙고백을 담아 드림으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물로 올려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가 세상에서 제일 귀한 봉헌을 했구나, 제일 많이 헌금했구나.”라고 인정하시도록, 과부의 두 렙돈처럼,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가장 귀한 예물을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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