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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당한 일과 복음의 진보 (빌 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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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조준 목사

지금 로마에 가시면 '세 분수 성당'이라는 교회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곳은 바울 선생이 순교 당하던 자리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바울이 순교를 당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교회를 건축했는데, 그 이름을 '세 분수 성당'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자리에 바울을 꿇어앉히고 집행관이 목을 쳤는데 떨어져나간 바울 선생의 머리가 세 번 크게 뛰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뛴 자리에서 이상하게 분수가 물을 뿜어내듯 난데없이 물줄기가 세 번이 솟아 나와서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 분수 성당'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빌립보 성경을 옥중서신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로마 옥중에서 기록해 빌립보 교우들에게 전달된 편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간다고 마음먹고 선교 여행을 떠났을 때 그 땅 끝이 로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18절을 보시면 감옥에 있는 사람이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런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로마로 올 수 있었는가? 사도행전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아주 마음이 급합니다. 어서 빨리 다니며 복음을 전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시켜야 되겠는데 몸은 하나이고 할 일은 많은데, 더욱 답답한 일이 생겼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시간을 다투는 사람이 감옥에 갇혀서 2년 동안 꼼짝 못하고 있으니 바울은 무척 속이 탔습니다. 빨리 이 감옥에서 나가 복음을 증거해야 할 텐데 나갈 수는 없고 또 밖에 나가면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게 있으니 나갈 수도 없고 안 나가자니 그렇고 내보내 주지도 않습니다.

이때 바울 선생의 머리에 아주 반짝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로마에 갈 수 있는 길이 당장 열리는 방법이 생겼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재판을 로마에 가서 받겠다고 상소를 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시민권자도 외국에 가서 죄를 졌을지라도 한국으로 와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여기서 죄를 지었지만 본국에 가서 재판 받을 수 있는 협정이 국가간에 되어 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은 지금 세계 어느 나라 시민권보다 훨씬 힘이 있던 시절입니다. 바울은 이 시민권을 몇 번 잘 사용하는 기록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난 후에 "이제 나가라!" 석방을 하니까 사도행전 16장 37절에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그럴 수 없다. 안 나가겠다.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큰소리를 한번 쳤습니다. 로마 시민권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때린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아주 벌벌 떱니다. 제발 나가달라고 막 사정을 합니다. 이유는 로마 시민권자라는 말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나는 로마 시민이므로 나에 대한 재판은 여기서 받을 필요가 없다. 로마에 가서 받겠다." 절대 거절 못합니다. 그것을 거절했다가는 로마와 관계가 나빠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가게 됩니다." 276명이 함께 배를 타고 로마로 가는데 죄수를 호송하는 배이기 때문에 삼엄하게 군인들이 경계를 합니다.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대장이 지휘관으로 군졸들을 거느리고 죄수들을 감시하면서 로마로 죄수 호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일단 바울의 당한 일을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그가 로마에 가고자 했던 일은 로마는 당시 세계 역사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로마를 점령하면 세계로 확산되는 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만약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그가 감옥에 갇히는 고난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는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로마를 이렇게 쉽게 갈 수도 없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2년이란 시간을 고민 고민 하다가 얻어낸 생각이 막 떠올라 바로 로마행으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당한 일이란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히는 죄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로 취직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요 관광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감옥으로 죄수가 되어 재판을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끌려갑니다. 그런데 그는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기쁠 것이 하나도 없고 슬픈 일만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기쁘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삶의 목적 때문에 오는 기쁨입니다. 바울의 삶의 목적이 오늘 말씀 2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의 삶의 목표가 복음 전파인데 지금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업 성공이라든가 권세나 명예 위주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지금 최고의 인생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감옥에 가도 괜찮고 혼자 살아도 좋습니다.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그 일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최대의 성공이라고 믿고 있는 삶의 철학 때문에 지금 그것이 나에게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몇 가지 신앙 고백에 그것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방인 전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도이다." 그렇게 자신이 고백했습니다. 유대인이 볼 때 로마 사람은 이방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이방 선교를 위해 부르신 사람이기 때문에 이방 세계에 온 것이 나의 삶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바라고 원했던 내 삶의 목표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또,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다." 자기의 인생을 그렇게 결정지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복음 전파는 나의 팔자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팔자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 전파 중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초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삶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당한 일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밧줄에 묶여 있고 시간적 제한으로 풀어주는 죄수로 로마를 가고 있지만 그의 영혼은 너무나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기분으로 항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큰 고난이 그에게 닥치게 됩니다. 바다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로마까지 바다를 항해하려면 그 거리가 얼마인지 우리가 대략 짐작을 합니다. 더구나 그 시절의 배는 모두 바람을 이용하는 돛단배입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서 가라앉을 것 같으니까 최후 수단을 쓰는데, 배에 있는 모든 짐을 다 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만 남고 배에 있는 모든 짐을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성경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로마행은 좌절되고 바다에서 모두 죽고 마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바울이 죽음에 떨고 있는 275명에게 큰 소리로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사실 그 배는 바울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당한 고난의 역사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생사의 앞날을 예언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말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멜리데 섬에 무사히 다 상륙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바울의 존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들이 표류하다가 상륙한 멜리데 섬은 토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토인들이 이들의 고난을 보고 도와주려고 나뭇가지를 가지고 와서 불을 피워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276명의 죄수와 그 군졸들이 다 마을로 내려가 폭풍우 때문에 온통 비에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도록 모닥불을 피우며 도와줘 모두 불을 쬐고 있는데 그 모닥불 속에서 독사뱀 한 마리가 팍 튀어 오르더니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을 물었습니다. 그 뱀이 어떤 뱀인지 사도행전에 토인들이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28장 4절에 보면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그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쓰러져 죽은 줄 알았는데 바울이 태연하게 뱀을 집어서 불 속에 집어 넣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말씀에는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이라고 하는 죄수는 276명과 멜리데 섬의 토인들에게 사람이 아닌 존재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이제 바울과 함께 로마에 들어가는 276명은 모두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전도를 하기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다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로마에 들어가서 바울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 선생이 당하는 모든 고난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있도록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울이 그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능력과 사도적 관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실패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면 모든 고난의 삶이 선교적 의미로 변화하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왜 독사뱀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에게 와서 물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하여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고난스럽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아니하고 나에게 주시는 인생의 유익한 과정이라고 믿음을 정리하면 그 자체가 고난이 아닌 기쁨으로 변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필요한 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선교적 의미로 해석하는 능력, 그것이 오늘 말씀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유라굴로 광풍과 독사뱀에 물린 사건으로 바울 선생은 신적인 권위가 생기는가 하면 그 모두를 구원하는 선교 역사가 배 안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배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게 되었는가? 시위대와 가까운 곳에 있게 되었다고 오늘 성경말씀에 있습니다. 이 시위대란 무엇인가? 특정지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왕궁마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중국에 가면 옛날 임금님이 살던 곳을 관광지로 만든 곳이 있는데, 그 마을 전체가 한 도시로 구성이 되어 왕궁에서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말고 다른 세상에 절대로 나가지 아니해도 그 안에서 삶의 넉넉한 필요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소규모의 특정지구를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시위대가 바로 그런 특정지구입니다. 왜 이런 특정지구가 필요하였는가? 임금님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임금은 좋은 자리도 되지만 반대파가 많아서 언제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 요소가 항상 따라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옛날 임금님들은 이런 특정지구를 만들어서 자신이 신임할 수 있는 모든 귀족들을 거기 와서 살게 하고 자신도 안전하게 하는데 보통 시위대 안에는 로마의 1만 명에서 1만5천 명 정도의 친위대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모두 함께 모인 특정지구, 그 가까운 곳에 바울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276명의 죄수들은 바울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미 다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로마에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율리오 백부장 즉, 바울을 죄수로 감시하면서 끌고 가던 친위대 대장에게 자기 임무를 보고할 때 바울 죄수에 대한 이야기를 제일 큰 보고 자료로 말했을 것입니다. 배로 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 여기까지 백부장이 오게 된 일, 그 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전부 소상하게 율리오가 책임상 상부에게 보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위대 안에 바울의 소문은 금방 퍼졌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냐?" 너도나도 바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시위대 근처에 있게 했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도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바울이 죄수가 아닌 평민으로서 자신의 외교적 능력을 발휘해서 로마 시위대와 접촉을 시도를 했다고 합시다. 로마의 시위대가 예루살렘의 죄수를 왜 만나줍니까? 도저히 만날 수 없습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바울이 광풍을 만나지 않고 그냥 죄수 신분으로 재판을 받았다면 누가 그를 기억하라 것입니까? 바울은 변호사도 채용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이스라엘에서 로마까지 오는 배 삯도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죄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짜로 로마까지 배 삯도 내지 않고 왔고 광풍 때문에 권위가 높아졌습니다. 바울의 소문은 로마 황제에게까지 큰 관심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시위대장이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온 나라에 금방 관심거리로 퍼져나갔습니다. "뭐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요란하냐?"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전파합니다." "그가 전하는 예수가 도대체 누구냐? 말하게 하라!"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시위대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단 말입니다. 여기 바울 선생은 "온 시위대 안에 복음이 가득하게 되었다.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로마가 주후 313년에 결국은 기독교 진리에 굴복하여 그토록 핍박하던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지 않습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로마에는 빈민층 못지않게 권력층이 먼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 줄을 타고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영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로의 박해 때에도 그의 삼촌과 친척들은 이미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는 그의 어머니와 딸들이 기독교인이 되어 왕궁 복음 전파에 공헌을 했습니다. 주후 313년에 로마에는 기독교인이 7퍼센트 밖에 안 되었는데, 기독교 국교 선언이 가능했던 것은 권력층이 이미 다 복음화 되었기 때문에 그 밑의 사람들은 아무 소리를 못합니다. 바울의 선교 계획에는 하나님의 관심과 인도가 세밀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그렇게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인도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똑같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와 똑같은 역사를 진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에 신앙적으로나 육신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에 대해서 편견적이고 주관적인 괴로움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시간이 급한데 감옥 안에 묶어있는 안타까울 때가 있을 수 있고, 어떤 때는 그렇게 많은 기도를 드렸는데 오히려 광풍이 밀어닥쳐 사업도 가정도 건강도 명예도 침몰위기를 만나는 듯한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대로 내 인생의 종말인가? 바다 속에 묶인 채로 빠지는가?' 그런 절망감을 느끼는 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의 고백을 보시면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살던지 죽던지"라고 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까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겠다는 영적 결단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 의사가 하나도 반영이 되지 아니한 현실이 나의 주변에 있다 하여도 하나님의 백성은 낙심하거나 절망은 하지 마십시오. 내 주변에 있는 이 많은 고난의 역사는 바울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선교적 의미가 나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제일 목표와 철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가난하게 살든지 부자로 살든지 외롭게 살던지 아니면 풍성하게 살든지 어떤 경우가 닥쳐온다 하여도 나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목표에서 나의 삶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확고부동한 사도적 관찰이 내 영 가운데 있을 때 바울 선생과 같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사람이 어찌하든지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죽어도 괜찮다.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왜냐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교적 의미가 내게 지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로마가 죄수 하나를 당하지 못하고 결국에 가서는 굴복하여 기독교 국가가 되어 지금도 교황청이 로마에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죄수는 쇠사슬에 묶여 로마 감옥의 죄수로 갔고, 유라굴로 광풍에 침몰 위기와 독사뱀에게 독침을 받아야 했던 바울,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던 것처럼" 어둡기만 한 지금의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그 결과가 하나님의 섭리론 가운데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을 믿으면서 사도적 관찰로 여러분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피는 기쁨이 오늘 이 말씀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울 선생은 우리 육신적 잣대로 평가해서 하나도 기쁠 일이 없는데도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그랬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인데, 그것이 지금 자신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영적 능력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난을 기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내 의사로 되지 아니한 모든 부분에 대해서 날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성령께서 우리들 영혼을 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바울 선생과 같은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오늘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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