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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눅 18: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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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인덕 목사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미 60이 다 된 나이에 신학공부를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립니다.
“아니 그 나이에 뭐가 부족해서 그래요? 그리고 이제 와서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를 제대로 할 수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고백합니다.
“남들은 다 늦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 내 안에 간직해온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신학공부를 하지 못하고 평신도로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그래도 목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하루로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신학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단 하루라도 좋으니 목사님 소리를 한번 듣고 하나님 앞에 설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

우리가 눈을 떠서 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니 두 눈으로 멀쩡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본다고 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저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하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엇일까요? 그에게 존재하는 세상은 그저 소리로 들려지는 세상뿐입니다. 그저 어두움뿐입니다. 볼 수 없으니 사물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아니 빛이 비쳐질 때 무언가 좀 훤하게 느껴지는 정도일 뿐 그것으로 밤과 낮을 구별할 뿐이요 그저 손으로 물건을 만져보고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뿐입니다. 그에게는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해도 그저 남의 얘기로만 들려질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소원을 대 보라면 아마도 틀림없이 눈을 떠서 세상이 과연 그렇게 아름다운지 보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 어떤 눈 먼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는지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은혜 받는 비결은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여리고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들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볼 수 없을 뿐 그래도 몸의 다른 부분은 멀쩡합니다. 하지만 볼 수 없기에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여리고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구걸을 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살아야 합니다. 살기 위해 구걸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생각은 있습니다.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구걸을 하면서도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그런 그에게 귀가 번쩍 하는 이야기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병자를 다 고쳐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 생각합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 나도 눈을 떠 볼 수 있으리라.” 그래 이제나저제나 예수님이 지나가기만 기다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붙들고 물어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그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여기 이 눈먼 사람은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기에 이렇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서 외쳐댔던 것입니다.
오늘 누가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누구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납니까?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작은 소리란 잘 들려지지 않는 소리입니다. 놓치기 쉬운 소리입니다. 귀담아 듣지 않는다면 들려지지 않는 소리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야만 들려지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은 소리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을 합니다. 들려지는 말도 그렇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듣고 싶어하는 소리는 좋게 들려지지만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귀에 따갑게 들려질 뿐입니다. 그것도 당연히 그런 말을 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닌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든가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든가 내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들려지는 소리는 그 소리가 아무리 옳은 소리라고 해도 아무리 유익한 말이라고 해도 흘려버리기 쉽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데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교훈도 하고 충고도 하는 거지 자녀가 거꾸로 부모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면 그것 당연히 들을 말을 듣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하는 말을 들려준다면, 그리고 복에 관한 말씀이라면 아주 즐겁게 듣겠지만 책망하는 말씀이라든가 듣기에 거북한 말씀이 전해진다면 그것을 편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말씀까지도 우리는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도 사랑과 격려의 말씀으로 우리를 다독거려 주시기도 하지만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말씀으로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엘레야가 호렙산에 있을 때 들려진 소리는 아주 작은 소리였습니다. 얼마나 작은 소리였으면 세미한 소리라고 했겠습니까? 반면에 욥에게 들려진 말씀은 폭풍우 가운데 말씀하시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단단히 작정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열려져 있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말씀이 들려져도 그냥 흘려들을 뿐입니다. 그 소리가 크든 작든 상관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매주 들려지는 말씀이 오늘도 들려진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한 시간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 “오늘따라 왜 이리도 말씀은 길기만 하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 하면서 시계나 보고 있을 뿐 말씀은 뒷전입니다. 내 생각은 엉뚱한 데로 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를 마치고 돌아서서 보면 오늘 무슨 말씀을 했는지 전혀 생각도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이 내 안에 없는데 무슨 역사가 나타나고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말씀이 없으니 간절함도 없습니다. 그저 맨송맨송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들려지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진정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작은 소리도 놓치지 말고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오늘도 내게 들려지는 말씀이 은혜 되게 하시고 능력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며 들어야 합니다. 마치 밥을 꼭꼭 씹어 먹듯이 그렇게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의 종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기쁨으로 들어야 하고 “예”하고 “아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씀 안에서 소원이 생기게 되고 이 소원을 품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도에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성도를 통해서 혹은 누구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기도 합니다. 내 마음이 뜨거워지게 만듭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을 감동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살펴야 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인생의 길을 펼쳐나가게 되면 그 안에서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성도요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성도가 되실 뿐 아니라 그 주신 말씀을 따라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 받는 비결 두 번째는 주님께 계속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눈먼 사람은 소리쳐 외쳐댑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앞에 서서 가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가 가까이 오니,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외쳐대는 눈먼 사람을 보고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을 따라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 많은 사랑의 말씀을 들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빨리 그 사람을 어서 이리 오라고 하여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지는 못할망정 조용히 하라며 꾸짖고 있다니요? 참 이상한 것은 우리가 주의 일에 마음을 먹고 힘쓰려고 하면은 꼭 훼방거리가 생깁니다. 어떤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가까운 누구를 통해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지게 만듭니다.

이번 감찰구역 순회하는 동안 어떤 목사님이 탄식하며 이런 말씀을 합니다.
어떤 자매가 혼자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십일조도 하고 예물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구원받기만을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그렇게 소원하던 대로 남편이 교회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니 정말로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겁니다. 교회에 나온 남편이 아내가 드리는 예물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나와 상의도 없이 이렇게 많이 드릴 수 있느냐?”고 “내가 벌어다 준 돈을 다 교회에 갖다가 바친 거냐?”고 하니 그만 주저앉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일에는 꼭 이런 훼방거리가 있습니다. 주의 일을 못하게 만드는 사탄의 방해공작이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작정을 하기만 하면 왜 그렇게 더 피곤한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주일을 빼먹지 말고 주일성수를 잘 해야지 작정하고 나니 남편이 왜 그렇게 유난스럽게 주일날 무슨 일을 만드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왜 꼭 가지 않으면 안 될 그런 행사가 주일날로 잡히는지 모릅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한 번 두 번 빠지다 보면 내가 언제 주일을 성수하기로 했는가 싶게 흐지부지 돼 버리고 맙니다. 작정하고 예물을 드리려고 하면 왜 그렇게 돈을 쓸 일이 많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마음만 간절했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지 못하고 한숨만 내 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거기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여기 눈먼 사람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더욱더 크게 외쳐댑니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래 드디어 예수님이 반응을 보이십니다. 가던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그가 가까이 올 때 물으시기를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니 예수님이 이 눈먼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셔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아닙니다. 다 아십니다. 하지만 그 입술의 간구를 주님을 원하십니다. 입술의 고백을 듣기를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의 형편과 사정을 주님이 다 아십니다. 또한 우리의 온갖 간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주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서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며 밤에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주기 위해 옆집 문을 두드리며 빵을 구하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강청의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우리 입술의 간구를 외면치 않으시는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마음에 원하는 바가 있다면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주님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한번 두 번 부르짖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끈질기게 기도하십시오. 입을 열어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눈물로 엎드리십시오.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눈먼 사람은 마음에 예수님이 자기 눈을 고쳐주셔서 자기가 보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있었기에 더욱 소리를 높여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래야 합니다. 걱정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응답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기도가 힘이 있습니다. 그럴 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어도 하나님이 더 좋게 해 주실 것으로 더 평안케 해 주실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의 간구가 놀라운 역사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그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이렇게 믿고 간구하는 성도들 되심으로 간구하는 소원대로 다 응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큰 은혜 받는 비결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질 때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정말 신이 납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눈물로 범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눈먼 사람을 보십시오. 그가 눈을 떠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은혜 받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 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은 다음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소원을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까지는 그래도 쉽습니다. 하지만 은혜 받고 응답 받고 난 다음에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해서 더 낭패를 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병 낫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병 고침을 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을 위해 충성하여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해서 나중에 더 심한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어떤 집에서 귀신이 나갔는데 나가서 돌아다니다 보니 머물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다시 돌아와 보았다니 집은 잘 청소가 되어 있고 정돈이 되어 있는데 빈집입니다. 그래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니 그 집이 더 엉망이 되더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은혜 받고 기도에 응답을 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더 헌신하고 충성해야 합니까? 악한 마귀가 장난질을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복을 받을수록 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아간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만 좋은 물건들을 보고 탐이 나서 그 물건들을 가져다가 숨겨두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곧 바로 아이성을 치러갔는데 그 날의 전쟁에서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누구 때문인가 알아보았더니 아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아간과 그 가족들을 다 아골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질 때 먼저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고 더욱 말씀을 따라 충성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내가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내가 기도한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까? 왜 들려지는 말씀에 기쁨으로 “아멘”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까? 악한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더 큰 은혜와 복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면 기쁨으로 순종하고 충성하고 봉사하게 되면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는 더 넘치게 될 것이요 약속을 따라서 주시는 부귀와 장구한 재물과 의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받을 뿐 아니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요 더욱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어 말씀이 힘을 얻고 교회가 부흥케 되는 귀한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수록 더욱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말미암아 더 큰 은혜와 복을 그리고 부귀와 장구한 재물과 의를 함께 누리게 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세 번째 고난을 알려주시고 난 다음에 곧 이어서 여리고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길에서 만났던 이 눈먼 사람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그 눈먼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바 은혜대로 살지 못하고 내 스스로 말씀 안에 서 있지를 못하고 그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근근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그런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습니까? 주의 종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순종합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말씀 안에서 내 마음에 품게 된 소원의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부르짖어 구하십시오. 그것도 아주 끈질기게 부르짖으십시오. 어떠한 방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해도 하나님께 엎드리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마음에 작정하고 충성하기로 다짐하였으면 그 다짐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받고 소원의 간구에 응답이 될수록 더욱 충성하십시오. 더욱 봉사하십시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열심을 품어 사랑을 나누십시오. 모이기에 더욱 힘쓰고 말과 혀로만이 아닌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돌아보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성도들이요 축복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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