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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드리고 사랑하고 나누게 (창 22:7-10,24-63-67, 창 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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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혁 목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듯 감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고 그 사랑은 서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내가 처한 처지와 나의 응답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납니다.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무지개 색깔로도 나타나고, 산과 들을 아름답게 물들인 단풍 색깔로도 나타납니다. 죄인인 한 여인에게는 그 사랑이 한없이 흐르는 눈물로 나타났고, 아브라함에게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감격과 찬양의 외침으로 나타났습니다. 송명희 시인에게는 고통 중에서 주님을 간절하게 사모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시들로 나타났고, 이중표 목사님에게는 세상에 대한 모든 애착을 훌훌 다 털어버리고 죽음을 영광으로 맞는 별세의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이삭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은 ‘드리게’ 하신 사랑이었고 ‘사랑하게’ 하신 사랑이었고 ‘나누게’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높은 차원의 색깔의 사랑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믿음을 본받아 최고의 믿음과 순종과 드림의 삶을 살았고, 최고의 사랑의 삶을 살았고, 최고의 나눔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삭은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장로와 권사로 임직하는 분들이 모델로 삼아야 할 사람입니다. 권사님들은 루디아를 모델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삭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이삭으로 하여금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 이삭은 오로지 하나님께 드릴 번제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한 유일한 한 마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칼을 잡고 자기를 잡으려고 했을 때에도 이삭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사53:7). 이삭은 믿음과 순종과 드림의 최고 모델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은혜였고 사랑이었습니다. 부귀영화를 받아 누리게 하시는 낮은 수준의 은혜와 사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게 하신 높은 차원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과도 견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첫째 항목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이삭은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 최초의 인간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삭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은혜였고 사랑이었습니다. 제사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예배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명기에 의하면 저주를 받을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을 찾아가서 몸과 헌물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신명기에 의하면 축복을 받을 조건이 됩니다. 오늘 아침에도 9시 경에 일찍 와서 교회당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이 다 되어서 헐레벌떡 들어오기도 합니다. 

  이삭이 어떻게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는 그런 높은 차원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인간적으로 말하면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이었고 어머니 사라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린 아들 이삭을 바라보면서, 어린 아들이 너무 귀여워서 온 몸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삭아, 너는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었던 아들이었단다. 이 할머니 엄마와 할아버지 아빠가 너를 도저히 나을 수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그냥 너를 낳게 해주셨단다. 아니 하나님이 너를 언약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 주셨어. 네 이름도 하나님이 지어주셨어. 너는 하나님의 것이야, 알았니?” “삭아, 우리 고향은 부산도 아니고 광주도 아니란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야,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고향은 하늘 나라야, 알았니?” “삭아, 우리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무엇이든지 해야 한단다. 살라고 하시면 살고 죽으라고 하시면 죽어야 되, 알았니 삭아?” “네 알았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아니 엄마 아빠.” 믿음과 순종과 헌신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제가 여기 있게 된 것은 기도의 할머니와 순교의 아버지 때문입니다. 이승일 목사가 지금 여기 있게 된 것도 믿음의 할머니와 기도의 아버지 때문입니다. 믿음과 순종과 헌신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의 유산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런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둘째 이삭으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24:67).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주시는 사랑 중의 하나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며 살 수 있는 배필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시고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주시듯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리브가를 배필로 주셨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삼고 그를 사랑하였다고 했고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리브가를 통해 위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리브가의 외모를 창24:16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The girl was very beautiful)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는 외모뿐 아니라 마음도 착했습니다. 우물 가에서 만난 엘리에셀과 그의 약대들에게 기꺼이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급히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약대를 위하여 물을 긷는지라”(창24:20). 그 모습을 바라본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은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끼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외모도 아름답고 마음도 착한 소녀였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리브가의 사람됨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리브가는 아름다운 동양적 소녀로서 그의 아름다움은 구김살 없고 들뜬 곳이 전혀 없는 극히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여성이었다. 좋은 가문의 딸이기는 했지만 자기의 손이 더럽혀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스스로 물을 길러 가고 식사 준비를 하고 엘리에셀의 낙타에게 수발까지 들어주었다. 또한 그의 마음 속에는 신앙의 열매가 맺혀 있었다. 그녀가 아브라함의 천막의 사람이 되기 위해 우상 숭배의 마을 밧단에서 떠나려고 결정 지은 그의 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삭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의 소녀를 아내로 얻을 수 있었습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었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의 지도 때문이었고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의 순종과 기도 때문이었고 이삭의 묵상과 기도 때문이었고 그리고 리브가의 신앙과 순종과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며 살 수 있는 배필을 얻게 되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들의 신앙과 기도와 묵상과 순종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삭은 아름다운 신부를 얻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담처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말하면서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어도, 아리따운 믿음의 소녀를 바라보며 이삭은 기쁘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고달프고 피곤한 나그네 길에서 얻은 리브가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였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 유학길에서 봉화라는 소녀를 만나고 나서 좋아하면서 편지를 여러 번 써서 보냈는데 그 중의 두 개 편지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재미있게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My adorable Bongwha, 참 고마웠습니다. 편지를 두 통씩이나 또 받고 air mail package 까지 받고 나니 이곳 clinic의 nurse가 한 턱 내라고 놀리는군요. 한국에 계신 이모님으로부터 sea mail package도 함께 받고 나니 마음에 풍년이 든 느낌입니다. 봉화 편지에 저 위해 염려하며 기도한다는 말 제일 좋았습니다. 일전에 드린 편지에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로 위하고 생각해주고 귀여워해주고 기도해줌이 생을 기쁘고 용기 있게 만드는 source 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독일어 시를 보내주셔서 애쓰며 읽었습니다. 둘째 phrase가 좋았습니다. 원문을 무시하고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의 맑은 두 눈동자를 들여 다 볼 때 나는 또한 사랑과 신뢰 가운데 휴식하고 있는 너의 가슴을 알 수 있단다. 완전히 완전히 도취되어 있는 너의 가슴을’ 저도 Goethe의 시 하나를 적습니다. Die Liebende schreibt abermals. 즉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쓴다’ 라는 제목의 시인데 글 쓰는 사람의 연연한 심정을 잘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로 번역된 것을 보냅니다. 다시금 보내주신 글들, 라면, 그리고 함께 보내신 봉의 귀여운 마음에 고마움을 드립니다. 1969년 1월 21일 아침 With love, 명혁 드림”

  "나의 가장 사랑하는 보고 싶은 봉화양에게, 오늘 아침 봉화의 편지 받아 읽으며, 봉화 보고 싶은 생각이 몇 배나 더해 짐을 느꼈습니다. 학교에 와서 봉화에게 편지 쓰려고 편지지와 봉투를 이렇게 가지고 와서 지금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따듯한 봄날인데 봉화가 옆에 없으니 더욱 더 허전함과 보고 싶은 생각이 더해지는군요. 지금 심정은, 여러가지 다른 말을 쓸 생각이나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기 보다는, 그저 봉화가 보고 싶고 봉화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고 하겠습니다. 봉화가 옆에 있으면 공부도 더 잘 될 것 같고 모든 것이 편안하고 즐거울 것 같이 생각됩니다. 1969년 2월 3일 학교 도서관에서 봉화양을 보고 싶어하는 Your Myung With all my love.”

  광야와 같은 인생 길에서 아리따운 믿음의 여자를 만나 사랑과 위로를 주고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고 주위의 여러 사람들의 기도와 도움으로 주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교역자들이 봉화 사모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요. 며칠 전에는 강명희 전도사가 이런 글을 이 메일로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이 모든 것이 그리움으로 남아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리움과 동시에 배움이 되어 저희에게 남아있어요. 목사님! 사모님! 힘내세요^^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하시는 세밀한 말씀들 하나 하나가 행동들 하나 하나가 저희에게 얼마나 귀한 배움으로 전해지고 있는데요. 저희도 목사님과 사모님처럼 될꺼에요. 목사님! 사모님! 감사합니다. 특히, 우리 김봉화 사모님 정말 고맙습니다. 사모의 귀한 사역을 알려주셔서요. 목사님! 사모님! 두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김세영 전도사도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부모의 심정으로, 따스함과 엄격함을 겸한 진심어린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데 대해, 교역자들을 향한 분에 넘치는 인격적인 사랑에 다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곽금이와 저는 나중에 꼭 목사님과 사모님이 하신 것처럼 하자고 다짐하곤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리브가를 만나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며 살 수 있는 은혜와 사랑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 남녀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고 주위에 있는 여러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와 지도와 도움의 손길을 통해서 아름답고 신앙이 좋은 배필들을 얻어 모두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으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시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셋째 이삭으로 하여금 나누게 하셨습니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람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26:18). 이삭은 한 평생 하나님 앞에서 귀중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소년 시절도 귀중했고 그의 청년 시절도 귀중했지만 그의 장년과 노년 시절은 더욱 더 귀중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누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말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백배나 받아서 창대 해지고 왕성해지고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아서 불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게까지 되었다고 했습니다(창26:12,13). 그런데 그는 부자로 부를 누리며 부요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저는 부자들이 부를 누리며 부요하게 사는 모습이 별로 좋지 않게 보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았습니다. 우리 한 권사님에게도 그런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삭은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하여 우물을 파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물을 마시게 해 주었습니다. 이삭은 이웃을 위해서 우물을 파고 또 파고 또 팠습니다. 이삭은 이웃이 자기가 판 우물을 빼앗으면 대항해서 싸우는 대신 그저 웃으면서 그 우물들을 이웃에게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은 이웃을 마시게 하고 이웃을 도와주는데 모든 재산을 다 썼습니다. 창26:25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삭이 그 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요사이 말로 하면 재산을 다 드려 교회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삭이 그런 나눔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먼저 우물을 팠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이삭도 우물을 팠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흙으로 메웠을 때 이삭은 제일 먼저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불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창26:17,18).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한 두개의 우물을 파고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재산이 다 소비되기 까지 우물 파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힘이 다하여 기진해질 때까지 교회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급식소를 세우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웠습니다. 노숙자의 집도 세웠고 외국인 노동자의 집도 세웠습니다. 그는 나눔의 삶을 산 최초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삭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와 최고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후에 루디아가 이어 받았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이어 받았고 마게도냐 교회들의 성도들이 이어 받았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을]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1,2).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베푸신 세 가지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좋은 집에서 물질의 부요함 속에서 평안하게 사는 낮은 수준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리게 하신 사랑, 리브가를 만나 사랑과 위로를 나누게 하신 은혜, 모든 재산을 다 소비하여 이웃과 나누게 하신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비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우리들을 만나 신부라고 하시며 사랑과 위로를 나누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허비하시며 우리와 나누셨습니다. 이삭에 대해서 한 말씀 더 드립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같은 모세 같은 신앙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주역도 아니었습니다. 수동적이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하나의 조역이었습니다. 평화롭고 유쾌하고 순수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닌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주님의 모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커닝함이라는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세 사람 중에서는 물론 구약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 중에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는 가장 두드러진 모형이었다.” The most striking type of the Lord Jesus Christ 라고 했습니다. 이 보다 더 귀한 찬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영웅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조용이 믿음의 길 순종의 길 드림의 길 사랑의 길 나눔의 길을 걸으면 됩니다. 이삭에게 베푸신 세 가지 은혜와 사랑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사랑을 모두 받아서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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