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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오직 전도 (요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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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예용범 목사

세상이 살기 어려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자칫하면 신앙도 위축되고 나아가 전도도 위축되기 십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도전적 신앙이 되고 적극적 전도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1) 바보

바보들만 사는 바보 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급커브 길과 벼랑길이 비좁아서 비가 오거나 어두운 밤이 되면 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보 촌에서 회의가 있었습니다.
오랜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환자를 위한 「간이용 병원」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바보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사실은 말이야 길을 개선하던지 터널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돈이 많이 들고 많은 사람이 희생해야겠기에 차마 그 말을 못했어…….」

또 다른 바보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근세를 바꿔 놓은 색다른 바보입니다.
◦ 구두 수선공인 「월리엄 케리」입니다.

성경을 보다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에 감동을 받고 「그럼 가야지!」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세계지도를 어렵게 구해 놓고
「하나님은 세계로 나가라고 했는데…….」하며 세계를 그리며 살지만,
선교의 문은 굳게 잠겼습니다.

어느 날 교회의 모임을 청년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발언권을 얻어 발언을 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성경을 보니깐 교회는 모름지기 선교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선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때 신학교 교수라는 분이 「청년 가만히 앉아 있어요 다 하나님의 때가 오면 할 것입니다.」하며 앉혔습니다.

멋쩍은 케리는 「그러나 누군가는 시작해야 할 텐데,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도…….」하며 회의장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친구들에게 묻습니다.
「누군가가 선교해야 하는 것 아냐?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일지라도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않되!」

결국 그 친구들의 선교후원 뒷받침으로 깜깜한 인도 선교를 떠납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40년 동안 한 알의 썩어진 밀알 되어 선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시작으로 선교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서 두 바보가 어떻게 다릅니까?
바보 촌의 바보는 말만 하는 바보이고,
케리는 행동하는 바보인 것입니다.

2) 던지라

오늘 본문도 이와 같은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요 21: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던지는 일을 먼 바다에서 행하면 선교요 가까운 바다에서 행하면 전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던지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되고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대는 되고 법칙을 아는가?
      돈이 없으면 돈을 벌면 되고,
      잘못이 있으면 잘못은 고치면 되고,
      안 되는 것은 되게 하면 되고,
      모르면 배우면 되고,
      부족하면 메우면 되고,
      <중략>
      해보라 된다.

맞습니다.
생각만 아닙니다.
각오만 아닙니다.
결단만 아닙니다.
실제의 행동이고 실천적인 모양이어야 됩니다.

어떻게 던질까요?
아니 베드로의 실패는 무엇입니까?
아이로니 하게도 어부로써 던질 때 실패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의 어부가 아닙니다.
이제는 주님의 제자이기에 자기 기술이 아닌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 방식으로」던져야 했습니다.

우리 누구입니까?
출신과 직업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전도는 세상 속의 내가 아닌 주님 안에서 변화된 나로써 전도해야만 합니다.

① 예배자로써
요즘 예배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와 신앙적 접근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자연 「예배 갱신」이라는 말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배자의 변화」라는 말이 맞습니다.
  예배는 의식이 아니고 모임도 아닙니다.
  예배는 주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순서를 바꾸고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본질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없다면 예배는, 모양은 있으나 민방위훈련과 다름없고, 과외 공부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새로운 갱신과 시도를 목회자가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 자신이
  ◦ 하나님을 알고,
  ◦ 보혈의 공로를 알고,
  ◦ 성령 충만할 때
어디서든 참예배가 됩니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

과연 우리는 어떤 예배자입니까?
  종교적 예배자입니까?
  정서적 예배자입니까?
  하나님과 예수님 품은 예배자입니까?

우리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유대인들과 같은 의식입니까?
초대 교인들 같은 주님과의 만남입니까?

◦ 예배 전에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설렘이 있습니까?
◦ 예배 후에 주님을 만났다는 감격이 있습니까?

요즘 일본, 중국은 물론 동남아는 한류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좋아하는 연예인을 설렘으로 기대하고 만나서는 심하면 울고, 졸도하는 일까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열정적인 예배자입니다.
행복한 예배자의 모습, 성령 충만함의 위엄, 기쁨의 예배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편지되고 향기가 되어 전도됩니다.

  고후 2:15-16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② 증인으로써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언제나 증인이 되어 증거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한갓 「변론인」에 불과합니다.
증인과 변론인의 차이를 아십니까?
어떤 사건이나 사실에 대하여 내가 직접적인 당사자가 된 경우 「증인」입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
귀동냥, 눈동냥 해가지고 「그랬다 카더라!」하는 식은 변론인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확신이고 신뢰입니다.
증인은 표정과 눈빛과 언어가 확신 있어 신뢰를 주는 반면 변론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가장된 확신과 신뢰를 줍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내가 만난 주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죽어도 확고합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 앞에 그렇지 않았습니까?

  단 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는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나이다”

결국 이러한 다니엘을 통해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단 2:47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하나님은 모든 신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도다”

오죽하면 왕이 어명으로 전 백성에게 하나님 경외하라고 조서를 내렸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증인되리라」하셨지 「변론인」되리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증인입니까?
하나님 만나셨습니까? 동행하십니까?
삶속에서 의식하고 계십니까?

구원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인도의 하나님 그렇다면 증거하고 증명해야 됩니다.

◦ 누가는 - 데오빌로각하에게 두 번의 편지를 쓰는 수고를 통해 증명했습니다.

◦ 수가성 여인 - 물동이를 버려두고 「즉시」로 동네에 들어가 증거했습니다.

◦ 테레사 수녀 - 온몸과 평생으로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직 계획 중입니까?
이제는 그물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3)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는 데 꼭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꼭 「오른편」입니다.

오른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왼편의 반대입니까?
◦ 공의요 정당성이요 성경적이요 주님 방식입니다.

교회가 많고 전도에 대한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세상 방식이 교회 안에 들어옵니다.
떡 반죽이 거룩한 즉, 떡 그릇도 거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광명에 사는 어느 목사님의 푸념입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이 눈에 띄게 줄기에 나서보니 인근 교회가 봉고차를 세어놓고 간식거리를 주면서 아이들을 태우고 있더랍니다.

경기장의 선수가 규칙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이기고도 집니다.
던졌다 한들, 그물이 좋다한들, 많이 얻었다 한들,
주님이 인정치 않는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전도대상을 선별하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방식은 선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훈련, 구제, 환자고침, 소외된 사람을 살핌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간증했습니다.

어찌 보면 주님의 방식은 오늘날 외면당하는 방식입니다.
◦ 돈 많이 들고, 시간 많이 들고, 힘이 많이 들고, 그러면서 효과는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본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나를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공동체이기에 주님 뜻에 맞아야 합니다.

4) 결론

구맹주산(拘猛酒酸)이란 고사성어를 소개하면서 맺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맛 좋은 술을 만들어 파는 주점이 있는데 손님이 없어 술이 오래 묵다보니 맛이 시큼해 졌습니다.

이상히 여겨 동네 원로에게 물어보니
「주점의 개가 너무 사나와 어느 누구도 그 집에 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누가 있습니까?
내 안에 사나운 개는 없습니까?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의 교회로 소문 되고 역동적인 성도로 인정되도록

보이는 교회당이 아니라
나부터 단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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