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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으로 체질을 변화시켜라 (삿 3: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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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어느 목사님이 출산을 앞둔 산모를 심방 갔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끝냈을 무렵에 진통이 오자 산모는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때 산모를 위해서 목사님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목사님의 찬송에 산모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큰일이구나. 목사님이 나의 죄를 다 알고 저러시나?" 순간 친정 어머니의 말이 생각나서 얼른 힘을 써 보았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나올 생각을 않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찬송은 계속되었습니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정말 힘써도 아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산모는 참는 데까지 참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찬송은 더욱 산모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노래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우리 나라 가수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87%의 가수가 자신의 노래말과 같은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령, 1980년대 초에 우리 나라 가요계에 대표적인 가수요, 천재 작곡가였던 김정호 씨가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곡 가운데 '하얀나비'라는 곡이 있습니다.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은/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님인데/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보고싶은 마음'이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리움 두고 가야해. 나는 가야해 잊을 수 없는 그 사람 찾아 가야해" 이 분의 노래 가사를 보면 대부분이 떠나가는 이야기, 보내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분이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그의 영정에 바칠 노래로 '님'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노래를 들어보면 마치 상가 집에서 부르는 노래를 연상시키는 아주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인데,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간다 간다 정든 님이 떠나간다. 간다 간다 나를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 님의 손목 꼭 붙들고 애원을 해도. 님의 가슴 부여잡고 울어. 울어도 뿌리치고 떠나가더라. 속절도 없이 오는 정 가는 정에 정들어 사랑을 했다. 님은 어쩌면 그렇게도 야속하게 가시나요. 어허~" 그런데 이 노래는 결국 자신의 죽음 앞에서 울려지는 진혼곡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노래말처럼 이 노래를 완성한 후에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우스개 이야기이지만 1992년에 최고의 히트곡은 노사연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만남으로 스타가 되었지만, 노래가 유명해진 이후에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합니다. 만남이 히트된 이후에 노사연 씨는 여러 번의 자동차 접촉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해서 왜 이렇게 접촉 사고가 많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속상해 했더니 사고를 낸 운전기사가 그 이유로 만남의 가사 한 대목을 부르더랍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바램이었소"

결국 사람의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인 서정범 교수는 똑같은 말을 3천번 되풀이하면 그렇게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바른 생각, 건강한 의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극심한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되는 긴장과 공허감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면서 탈출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삶의 여러 길목에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유 없는 적개심이나 불안함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과 감격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서 시간마다 때마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고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이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 안에,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기를 사모하십시오. 아무리 절망적인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능력만 들어가면 새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상실하고 혼돈과 착각과 자기 합리화 속에서 힘들고 괴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둠의 권세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의 능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왜곡시키지도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의 생각과 이론 속에 머물러 있는 그런 나약한 분이 아니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으신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십시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사람은 언젠가 인생의 풍랑이 휘몰아칠 때에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던 것처럼 그렇게 떠나갈 것입니다. 전세계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15%라고 합니다. 나머지 85%는 하루살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믿음의 하루살이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7일 가운데 하루만 믿음의 흉내를 내는 어리석은 하루살이가 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루살이와 같은 믿음의 생활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할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리가 우리의 전 존재로 예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행하셨던 이적과 기사들이 오늘은 물론이거니와 미래에도 일어날 것을 믿으셔야만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2절 이하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마땅히 행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제 말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다" 이 말씀을 여러분이 믿는다면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사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더 큰 일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도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믿고, 주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얄팍한 지식으로 성령을 분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이성과 과학으로 분석되어지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신앙과 생활이 따로 노는 그런 이중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일 아침이 되면 교회에 나가서 성경 말씀과 영감 있는 설교로 가득 채워진 다음에 한 주간 동안 그 말씀을 품고 있다가 다시 교회로 나가서 설교를 듣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일주일 가운데 6일은 사회 생활이기 때문에 세상적인 마인드로 마음껏 살아가고, 나머지 하루는 주일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신앙을 갖는 그런 이상한 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꾼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의 흉내만 내는 그런 나약한 종교꾼이 되지 마십시오. 종교꾼은 스스로가 올무가 되어서 넘어집니다. 종교꾼은 아무런 일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셔서 옷을 벗음과 동시에 여러분의 신앙도 벗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경책을 놓음과 동시에 여러분의 신앙도 놓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능력을 나타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독교는 생활의 한 방식입니다. 신앙이 생활이고 생활이 신앙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것과 똑같은 걸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기사와 이적들을 지금 우리들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주님께서 행하셨던 그 일들을 우리들도 마땅히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일들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순종하니까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성이 아닌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우리 안에 실제로 살아 계시며, 우리를 통해서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드리십시오. 지금은 능력의 시대입니다. 지금은 잠자는 거인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동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권능과 기적이 없는 연약한 교회를 거부하십시오. 모든 예배에서, 그리고 시간마다 때마다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힘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어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재력을 가진 사람이나 혹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하실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재능과 재력이 있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은 결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법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감에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의 붙들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인간의 실수마저도 선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한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쓰실 때에는 언제나 우리의 믿음이나 삶의 태도를 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적으로 볼 때에 좋은 여건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쓰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는 굉장히 약점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아주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두드러지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성령의 권능에 붙들림을 받게 되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놀랍게 쓰임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보게 되면 사사들은 한 마디로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내놓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사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람들 앞에 결코 드러내 놓을 만한 특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들이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붙들림을 받게 되니까 그들은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삶의 체질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의 체질이 변화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평범한 도구를 위대한 도구로 만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의 체질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시대와 환경을 초월해서 형통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이 아닌 그의 삶에서 우선 순위가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선 순위를 따라서 살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삶의 우선 순위가 뒤죽박죽이 되니까 인생의 모든 것이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혈육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방백들과 다른 총리들이 음모를 꾸며서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은 그런 위기 중에서도 그가 의지한 것은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시대와 환경을 넘어서서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모든 환경과 시대를 초월해서 형통한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거기에 형통의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은 풍성함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니엘 밑에서 40년간 태평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나 옷니엘이 죽은 후에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보시고 이번에는 모압 족속을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압 왕 에글론에게 18년 동안 압제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5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곤란 중에, 환난 중에 처해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곤고함 중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새로운 사사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에훗이라는 사람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에훗에게는 아주 인상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왼손잡이 에훗이라는 사실입니다. 원문에 에훗이 왼손잡이라고 한 것은 그가 오른손을 못 쓴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훗은 오른손을 못 쓰는 큰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른손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에훗의 약점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에훗은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베냐민이라는 이름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손은 언제나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 베냐민 지파에는 아주 날렵하게 오른손을 잘 쓰는 무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무사 족속 베냐민 지파에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 에훗은 공교롭게도 오른손을 못 쓰는 왼손잡이였습니다. 이 말은 그에게 커다란 약점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왼손잡이를 사용하신 것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냐민 지파에서는 당연히 훌륭한 무사가 나올 것이고, 그들은 오른손잡이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없애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쓰시는 기준은 그 사람의 재능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 장점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오히려 이 장점이 불행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유능한 지식인이 자기의 높은 지식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인 것입니다. 자기의 지식, 자신의 재물, 자신의 건강이 하나님께 향하는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가장 큰 불행인 것입니다. 우리의 장점이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편견과 교만을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이 등장시킨 사람이 바로 에훗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에훗의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오른손을 못 쓰던 에훗, 그는 자신의 단점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랬더니 주님의 오른손이 에훗의 오른손이 되어 주셨다"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이 오히려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에훗처럼 신체적인 약점과 연약함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을 더 의지하십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을 의지하십니까? 사람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은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결국에는 사막과 같은 삭막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약점과 좌절에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 약점 때문에 더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크게 들어서 쓰실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약점과 연약함이 곧 하나님의 강함의 시작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른 손을 못 쓴다고 포기하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에훗처럼 하나님을 더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손이 내 손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셔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약속을 붙잡으셔야 합니다.
책을 외판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떤 회사 중역과 만나기로 했는데, 그 중역은 말수가 몹시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학생이 호화로운 그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중역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용건을 단 두 단어로 말해보시오" 그러자 이 외판 학생은 수금장부를 펼친 후에 중역에게 펜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사인을!" 중역은 아무 말 없이 청년이 건네준 장부에 사인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연약한 사람이 강해지는 비결을 아십니까? 그것은 함께 동행한다는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누구라도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뿐만 아니라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음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 그래서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두려워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세 번이나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여호수아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붙잡고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셨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과도 함께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약속은 내가 강해진다는 보증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동행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나에게 어떤 재능과 힘이 있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니까 강해지는 것입니다. 강해짐의 원천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체질을 바꿔야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당당하게 이 세상을 승리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동행한다는 말은 원어에서 볼 때 '산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손목을 꼭 잡고 산책할 때에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가지산 정상에 올라갔다" 도저히 상상을 불허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힘센 아빠의 손을 꼭 잡고 가면 가지산을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아빠의 힘으로 올라가게 되어서 올라간 것입니다. 믿음 생활은 "내가 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도록 함께 하셔서 했다" 이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힘이 없어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해내면서 사는 생활이 믿음 생활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에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승리의 여정을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에훗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오른손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압 왕 에글론의 궁실에 들어갔습니다. 심장이 떨려서 어떻게 혼자서 왕의 궁실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과 동행하고 계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게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었던 에훗은 모압왕 에글론을 죽이고, 모두가 용사요 장사였던 모압 사람 일만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에훗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에는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체질을 바꾸십시다. 어떻게요?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기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기대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위로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어떤 절망적인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이것이 내 의지로 됩니까? 내가 하나님만 의지해야 겠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겠다. 다짐하고 결심하지만 그것이 어디 내 의지로 되나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붙들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붙들림을 받게 되면 우리의 평범함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위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사들이 어떤 특별한 재주나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순종한 일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들어서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 가면 가장 쓸모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보잘 것 없고 쓸모 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역사의 핸들을 돌리고 계십니다. 내 인생의 화복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주권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영으로 충만해져서 도구로 쓰임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주간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승리하는 발걸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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