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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슴에 가득 담은 복 (마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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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1963년 8월 28일 노예해방 100 주년을 맞아 워싱톤의 에이브러햄 링컨의 동상 앞에서 25 만명의 흑인들이 모였습니다. 그 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습니다’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가득한 앨라배마 주에서, 흑인어린이들이 백인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 설교는 전 세계로 방송되었습니다. 이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킹 목사님은 이 명설교를 통해 비폭력으로 인종차별의 벽을 허물수 있었습니다. 킹 목사님은 이듬해 비폭력 인권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최연소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39 세의 젊은 나이로 한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그는 암살을 당했습니다. 미국의 1 월 3 번째 월요일은 국가기념일입니다. 미국인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생일을 국경일로 삼았습니다. 킹 목사님은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가톨릭 교황청에서 이례적으로 개신교인 킹 목사님을 20 세기 신앙의 증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제까지의 설교 가운데 킹 목사님의 'I have a dream.' 만한 명설교가 있을까요? 저도 킹 목사님과 같이 역사에 길이 남을 명설교를 남길 수 있을까요? 저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설교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킹 목사님도 따라 갈 수 없는 진짜 명설교가가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탁월한 설교가이십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신 산상설교는 정말 위대한 설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산상설교는 가장 뛰어납니다.

예수님은 가난과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보여주시며, 천국 같이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직까지 지구 역사 가운데 산상설교만한 설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후로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한 마디도 땅에 떨어뜨릴 수 없는 귀하고 귀한 말씀들입니다. 이런 설교는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아마도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너무 주옥같은 말씀들이 잠든 영혼을 깨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주님의 음성은 그들 가운데 잔잔한 감동의 물결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산상설교는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어떤 윤리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 설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최고의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시작부분입니다. 1 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본문 바로 앞에 4 장 마지막에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허다한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나라 밖에까지 퍼졌습니다.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여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한 눈에 보이는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무리를 향해 연설을 하려면 서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상설교의 내용은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착하게 살라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이어야 먹혀듭니다. 그런데 산상설교의 윤리는 아주 고차원적인 내용입니다. 사람의 경지보다는 오히려 천사처럼 살라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산상설교를 적용하는데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이니까, 참고로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또 이 윤리는 종말 때 극한 상황에서나 지킬 수 있는 것이므로 지금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비판가는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보다도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지웠다고 빈정댑니다. 많은 학자들이 산상설교에 나오는 계명들은 지고선의 목표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실천하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합니다.

사실 이 산상설교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키기 어렵습니다. 무리가 따릅니다. 영감이 넘치는 설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러운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산상설교는 아무에게나 줄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수많은 무리를 향해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앉아서 설교하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산상설교는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입니다. 물론 예수님 가까이 있던 일반 백성들도 들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이라야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 제자들은 바로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의 사명을 지닌 자들입니다.

올해부터 시작한 마태복음 강해설교는 이제 5 장을 시작합니다. 앞으로 산상설교를 강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이 말씀을 나누게 되어 약간 상기되었습니다. 감히 주님의 제자가 되어 말씀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산상설교를 통해 우리의 영성이 더욱 성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산상설교는 처음부터 이 세상의 가치관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은 좋지 않습니다. 나쁜 겁니다. 이 세상사람 누구나 붙들고 “부자가 될래요? 가난할래요?” 하고 물으면 대답은 하나입니다. 누구나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한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보통 생각을 깨는 파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그냥 가난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럼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가난이 심해지면 거지가 됩니다. 자기 힘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손을 벌려 빌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인 거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능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가난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실적인 가난입니다. 현실적인 가난은 물질의 결핍입니다.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 하는 위기에 맞닥뜨립니다. 입을 것이 없어서 헐벗게 됩니다. 거처할 곳이 없어서 지붕 없는 곳에서 쉬기를 청해야 합니다. 기본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는 가난을 절대적인 가난이라고 합니다.

가난에는 이와 달리 상대적인 가난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것은 해결됩니다. 그런데 이웃이 가진 것과 비교할 때 느끼는 가난입니다.

시장에서 예쁜 가방을 샀습니다. 그런데 옆집 여자가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그걸 보니 내 가방이 갑자기 초라해 보입니다. 창피해서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리를 해서 명품 가방을 구입하거나, 암시장에 가서 짝퉁을 구입합니다.

이런 가난은 주로 인간의 끝없는 욕심 때문에 채워도 언제나 가난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가난은 곧장 불행과 연결됩니다. 가난은 그저 불편한 것뿐인데, 불행한 것이 되고 맙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이 상대적인 가난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진 것을 비교하면 불행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소유물에 대해서 일체의 자만이 없습니다.

나는 가난하지만 하나님은 부자라는 사실을 믿고 삽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언제든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여기고 삽니다. 지옥 같은 세상을 살다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같은 세상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정에 천국이 나타납니다.

포커 노름을 하는 사람은 표정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그걸 포커 페이스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좋아도 좋은 표시를 하지 않습니다.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포커 페이스는 언제나 무표정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가진 사람은 해븐 페이스를 하면서 삽니다. 활짝 웃으며 삽니다. 말에도 천국이 나타납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셨지만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아니셨지만 언제나 풍부하셨습니다. 베풀고 나누어 주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면 우리는 아버지의 부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천국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가슴에 가득 하늘의 복을 담으십시다. 하나님이 언제나 풍부하게 부어 주십니다. 활짝 웃는 얼굴로 이 복을 나누어 주는 천사 같은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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