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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이여!” (시 97:10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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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시편 97편 10 - 12절 
제  목 : “의인이여!” 

마을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킬 이라는 의학박사가 있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며, 자비의 아버지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밤만 되면, 하이드라는 흉악범이 나타나 마을을 망쳐 놓곤 합니다.
사람들은 하이드라는 흉악범을 잡아 마을의 화근을 없애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의 총소리와 함께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몰려든 마을 사람들 앞에서 드디어 범인의 가면이 벗겨졌습니다.
그 순간 거기 모인 사람들은 아연 실색하고 말았습니다.
하이드라는 흉악범은,
바로 그들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았던 지킬 박사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영국의 스티븐슨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단편소설얘기입니다.
비록 소설속의 인물이지만,
우리 내면의 모습이 폭로되고 고발당하고 있습니다.

1) 인생들의 탄식

인생이라면,
누구나 선하고 바르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을 짓밟고 올라서고자하는 폭악함과 자기 교만과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탄식!
성령께 붙잡혔던 사도의 갈등?
기억하십니까?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 의인의 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의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궁극적으로 본다면,
모든 인생의 고민이고,
모든 철학의 목표이고,
모든 신앙의 목적입니다.

여기에

① 흔하게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의 모양은 선은 행하고 불의는 상관치 않으려고 합니다만..
과연 그 일이 가능할까요?

어느 노름꾼이 패가망신한 후 정신을 차렸습니다.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으리라하며 스스로 손가락을 절단했습니다.
그 후 손가락이 완전히 치료된 후 노름하던 습성을 버리지 못해 이제는 발가락에 화투를 끼고 앉아서 여전히 놀음을 하더랍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외아들 된 박지만씨는 마약 복용으로 수차례 치료감호를 받았지만, 아직껏 그 마약을 벗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의지, 결단, 내 안에 있지만 내 마음과 생각 따라 움직이질 않고 죄에 따라 움직이는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② 신이라 칭하는 존재에게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가능하지 않습니다.
신이라 칭하는 존재들은 사람이 만든 우상이거나 아니면 자칭 신이라 했던 인생이기에 능력이 없습니다.

가끔은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의 차이점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초대교회 전도자들의 답을 인용합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인생무상의 종교요,
유교는 치레와 예식 종교라면,
기독교는 희락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하곤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혼자 나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때
지나가던 나그네가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는 먼저 질문합니다.
「왜 거기에 빠졌소?」
「어떻게 나올 것인가? 잘 생각해 보시오!」
하며 길을 갔습니다.

또 다른 나그네가 멈추었습니다.
살려 달라는 부르짖음에
「당신 복장이 그게 뭐냐고, 책망하고」갔습니다.

이번에도 한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멈추었는데 그는 대뜸 구덩이 속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딛고 나가시오!」
내 걱정은 하지 마시오! 하며 구덩이에 빠진 자를 건져 주었습니다.

③ 오직 유일한 방식이 있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여기서 구원이란,

하이드 성품을 빚은 타락된 죄성에서의 구원이고,
그 죄의 결과 심판과 지옥에서의 구원이며,
그 성품의 현존하는 세력에서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다른 데는 구원이 없습니다.
죄는 죽어 관계를 끊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죄인과 죄성이 죽은 곳이 갈보리요
죄인의 괴수로써 대신 죽으신 이가 주님이십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사실을 믿었던 사도바울은,
자신의 내면을 볼 때 곤곤하다고 탄식했지만,
이제는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하며 혹은 찬송하리로다하여 구원의 은혜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3) 완전한 새 창조

성경은,
아니 하나님은,
이 아들을 믿는 자를 의인이라고 신분상 칭하여 주신 것입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즉각적인 의인의 선언!
무죄만 아닌 무죄보다 더 나아간 의인의 선포입니다.
종전의 죄에 싸여 갈등하는 그 인생을 개선하거나 개량한 것이 아닌,
죽었다가 살려냈기에
「새로운 창조물」로써 빚어진 것입니다.

이런 의인이 누가 또 있습니까?
세상에는 의인이 여러 계층이 있습니다.

◎ 자칭 의인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대 제사장들이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았습니다.

◎ 타인이 칭하는 의인이 있었습니다.

노아, 백부장 고넬료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들도 실상은 불완전한 의인일 뿐입니다.

◎ 완전한 의인이 있다면 예수님이십니다.

  요1 1:9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이 있습니다.

곧 성도입니다.
실제는 그렇지 못한데 하나님이 그렇게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는 의롭다함을 받은 인생의 조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사랑의 시각으로 된 일입니다.
신분상 의인화 된 것입니다.

  찬 189장)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4) 의인의 삶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의인의 실천적 삶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된 성도라면 두드러지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해야」합니다.
그리고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구태여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언제 미워하며 무엇을 감사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리키지 않아도,
아니 배우지 못해도, 의인의 본성과 본능은 이를 구별하고 이를 지켜 이룩합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신비한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먹이를 먹는 것을 보면,
소는 소 풀만 먹고
염소는 염소 풀만 먹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하였지만,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고난 보셨네」함으로 거룩한 의인의 신분과 자격을 얻은 성도들은 어느 특별한 한 의인만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모두가,
그러면서 포괄적 하나님 사랑, 포괄적 악의 미움, 포괄적인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 모습, 이 모양이 참된 거룩인 줄 믿으십시오.
확신하십시오.

◎ 죄인된 나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 내가 죄의 노예로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 은혜의 자리로 주소지를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할 때
죄가 주관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몸의 의의 병기로 드려야 됩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 기쁨을 뿌렸도다.

왜 의인된 성도가 빛 되고 생활을 해야 하며
왜 기독교를 희락의 종교라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어거스틴의 말씀대로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기까지
인생은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불의를 행하여 죄책과 죽음이 두려운데 어찌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면서 빛 가운데 거하지 못하고 여전히 악에 거한다면 문제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문제입니다.
감사가 없다면 문제입니다.

결 론)

두 권투 선수가 사각의 링 위에 싸웁니다.
챔피언 벨트를 놓고 싸웁니다.
하나는 이기고 하나는 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기고 진 것은 사각의 링에서가 아니라
링 아래에서의 평소의 훈련이었습니다.
다만 링 위는 평소의 훈련과 삶을 통하여 챔피언으로써 인정받는 순간일 뿐입니다.

우리의 사회생활,
교회생활,
가정생활,
의인되고자 하는 삶은 아닙니다.
의인되었기에
의인으로써 인정받는 삶의 신앙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인입니다.
거룩이 생명입니다.
빛과 기쁨의 주단이 깔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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