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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명하의 범죄 (요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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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2:13-17
설교 : 이원희목사

마7장에 보면 아주 황당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땅에 있을 때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소경을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기적을 행하던 사역자들이 위풍당당하게 주님 앞에 갔습니다. 당연히 칭찬 받을 줄 알았겠죠. 당연히 상급이 기다릴 줄 알았겠죠. 그런데 저들을 기다린 것은 청천병력과 같은 주님의 말씀뿐이었습니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고 보면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닌가 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선지자 노릇한다고 다 인정받는 것 아닌가 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다고 상 받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해서 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나는 말이 있었습니다.
“빛 좋은 개살구!”
겉모양은 보기 좋습니다. 누렇고 먹음직합니다. 그러나 너무 시어서 먹을 수 없습니다. 그게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 주님 앞에 빛 좋은 개살구는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빛 좋은 개살구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의 교회 봉사가 빛 좋은 개살구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참 충성스럽습니다. 경건합니다. 참 훌륭합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 보실 때에도 그렇습니까?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도무지 너희들을 알지 못하느니라.” 판단 받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지금 성전에서는 두 가지 일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매매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환전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성전 안에서 매매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은 그렇다고 치고 멀리서 오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제물을 가져오는 도중에 다 죽고 맙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서 성전의 한 구역에 제물로 사용할 짐승들을 염가로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아주 순수하게 제사드리는 사람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제물 장사에 이익이 남고 돈벌이가 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 집안에 이 일을 독점하게 되었고, 돈을 더 벌 양으로 소위 합격품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인데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다가 온 짐승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 특별하게 구별해서 키운 짐승을 사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 무공해 제물이 있으니 이거 쓰라는 말입니다. 제물을 가지고 오면 제사장이 제물로서 합당한지 아닌지를 검사하게 되는데 외부로 들어온 제물이면 아무리 흠이 없어도 트집을 잡아 제사장이 다 불합격시킵니다. 그리고 은근히 “성전 안에 제물은 흠이 없는데...” 하면서 은근히 성전에서 파는 제물을 권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파는 것은 칼같이 합격시킵니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집에 비둘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파는 비둘기를 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제물이 싸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죠. 얼마나 비싸게 받아먹었는지 비둘기 하나를 예를 들면 시장에서 비둘기를 사면 500원이라면 성전에서는 무공해라는 이유로 10,000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20배가됩니다. 이렇게 폭리를 취했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무조건 불합격, 여기서 사는 것만 합격, 제사장이 검사원, 제사장 아들이 출납원, 사위가 회계... 그렇게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만 보고만 계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들도 자기들의 너무했다는 것을 아는지 예수님이 난리치실 때 아무 말도 못하고 꼼짝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돈 바꾸는 일에도 비리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유통되는 돈은 헬라나 로마의 화폐였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서는 세속적인 돈은 제물을 사는데 합당하지 않다고 해서 유대 화폐로 바꾸라고 합니다. 유대 화폐는 당시에 사화(死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피점령국 돈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쓸모도 없는 돈들이 여기 저기 굴러다니고 있을 때입니다. 그렇게 무가치한 돈으로 20배나 되는 제물을 사야 합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돈을 바꾸는데 합리적인 환율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일대 일로 바꿨습니다. 분명히 화폐 가치로는 전혀 쓸모 없는 돈입니다. 사회에 나가서는 죽은 돈입니다. 구멍가게도 안 받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당하게 바꾸어 주면 말도 안 합니다. 바꾸되 세상 돈보다 하나님의 돈이 가치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해서 예를 들어서 100:1로 바꾸어야 할 것을 일대 일로 바꿉니다. 또한 당시에 성전세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면 누구나 다 성전세를 내야하고, 또한 이방인이라도 성전을 구경하려면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다른 화폐로는 낼 수 없고 유대화폐로만 내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수료를 챙깁니다. 그러니 얼마나 폭리입니까? 이렇게 해서 돈을 긁어모으고, 심지어는 이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투덜대는 사람들에게는 제사장들이 부리는 종을 보내서 몽둥이로 때려서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었다는 기록이 고문서에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3년 전에는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모든 물건들을 싹 쓸어버리는 데모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3년 있다가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망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이 날강도 놈들아, 너희들이 날강도인 것은 좋은데 하나님의 집까지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하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편의를 봐주는 것 같습니다. 멀리서 송아지를 가지고 오려면 얼마나 고생스럽겠습니까? 멀리서 양을 끌고 오려면 얼마나 고생스럽겠습니까? 그러니 아예 돈만 준비해 가지고 오면 예루살렘에서 깨끗한 제물이 준비되어 있으니 참 편리하지 않습니까? 편의를 봐주는 것 같아 참 귀하 일 같습니다. 또 돈을 바꾸어 주는 것도 얼핏보면 참 귀한 일 같습니다.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외국에서 사는 유대인들이 특히 많이 오는데 그들이 지리도 모르는데 돈을 바꾸려고 여기저기 알아봐야 하고, 번거롭게 찾아다니면서 바꾸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니 말만하면 턱 바꾸어 주고 바꾸어주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헌금하고, 세금 내고... 얼마나 불편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선한 일입니까? 얼핏보면 그렇습니다. 또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진 이방돈으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산다? 옳지 않습니다. 우상으로 숭배되는 황제의 흉상이 그려진 돈으로 성전세를 낸다? 신앙양심상 분명히 거리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화폐로 바꾸라는 말... 얼핏보면 그럴듯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거 다 하나님께 제물 드리려고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주기해서 그런다고 말합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의 고생을 덜어 주려고 이런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돈 바꾸러 다니는 사람들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이런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 오염되지 아니한 돈으로 드리게 하려고 그런다고 말은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좋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진노하신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전에서 그렇게 장사하는 일을 부득불 해야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할 장소가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장소가 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장소에서까지 장사하면 안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니까 그렇다고 하자. 그러며 성전 밖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꼭 거룩한 성전 안에 까지 끌고 들어와 도떼기시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약자의 약점을 이용해서 돈을 갈취하려는 이 도둑놈들아! 그런 말입니다. 예수님은 화가 몹시 나셨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미명하의 범죄입니다. 명분은 좋습니다. 구호는 좋습니다. 주장은 좋습니다. 그러나 속에는 엉큼한 생각이 있어...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렇게 화를 내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닙니까?

1.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셨을까요?

1)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모독에 대한 의분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의 좌소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즉사했습니다. 하물며... 물건을 사고 팔고 못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아예 소새끼 끌어들이고, 양새끼 끌어들이고...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우시장으로 변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면 짐승들이 똥을 쌀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 냄새가 장난 아닙니다. 게다가 움--매... 음매애애... 구구구... 울음소리에 정신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이 흥정하는 소리, 싸우는 소리... 이거야말로 도떼기시장이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또 예배당 한쪽에 좌판 놓고 돈 바꾸어 줍니다. 그러니 돈 짤랑거리는 소리, 새치기한다고 싸우는 사람, 계산이 안 맞는다며 싸우는 소리... 이거 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들이 약자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다고 해도 용서가 안 되는 일인데, 더군다나 약자를 착취까지 하니... 이거는 정말 매를 맞아도 죽도록 맞아야 할 일 아닙니까? 성전이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진노하실만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소중해야 합니다. 요17:1에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 끔찍하고 살 찢기는 십가가... 내가 기꺼이 지겠습니다.” “아버지께 영광만 된다면 나 빨리 죽고 싶습니다.” “내 끔찍한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런 말입니다. 이만큼 아버지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간절한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의 좌소인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볼 때에 그냥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최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게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죽는 것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게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공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게 더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로 하나님께 영광 된다면 우리는 죽더라도 그 말을 해야 합니다. 조롱 당하도라도 그 말을 해야 합니다. 일본 신사에 대고 절 한번 구뻑하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된다는 생각에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절 안 했습니다. 역대 믿음의 조상들의 여정을 보십시오. 말 한마디가 하나님의 영광에 가려질 때는 죽으면 죽었지 그 말 안 했습니다. 그래서 폴리갑과 같은 사람은 나 예수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그 당시 황제가 사정을 했는데도 폴리갑은 그 말 안 했습니다. 우리 주님, 단 한번도 나보고 모른다고 안 하셨는데 어떻게 내가 꿈에라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냐며 허리를 톱으로 켜 죽어갔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보탬이 되고,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우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먹구름이 깔려 해가 안 보인다고 해도 그 먹구름 너머에는 여전히 태양이 빛나고 있듯이 우리가 어떠하다고 태양의 빛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을 가리우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내 말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말아라. 내 욕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말아라. 편파심이나 빛 좋은 개살구 노릇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2) 미명하의 가증한 짓을 예수님은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이 미명하의 범죄를 저지르던 성전을 마24:1-2에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될 것은 예언하셨는데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교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가치가 없어, 촛대를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 70년 후에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 역사를 더듬어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교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 사람을 사랑함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 예배와 봉사가 빠진 교회는 어김없이 촛대를 옮기셨습니다. 그랬을 때 초대교회가 문을 닫았고, 종교개혁 시절 중세 교회가 문을 닫았고, 미국 교회가 문을 당았고, 유럽교회가 문을 닫았고, 한국교회도 지금 이 시험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적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사랑이라는 말을 악용할 때에, 가증한 짓으로 미명을 탈 때에... 예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2. 성경에 보면 그러한 빛 좋은 개살구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아래 지은 죄가 많다는 말입니다.

1) 미명 아래 욕심의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삼상15:3 이하를 보면 사울 왕과 아멜렉이 전쟁을 할 때에 “전리품을 하나도 취하지 말아라.” “전부 다 없애버려라.” 하나님이 엄히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사무엘이 진지시찰을 갔더니 어디서 송아지 우는 소리가 나고, 양 우리는 소리가 납니다. 깜짝 놀란 사무엘이 이 전쟁 마당에 송아지 울음소리는 웬 소리요, 양 울음소리는 웬 소리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이 가로되 사실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이(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제물로 쓸려고 아마도 좋은 것을 남겨 두었나보라고... 뭐 그렇게까지 놀라시느냐고... 얼버무립니다. 말은 좋습니다만 왕의 허락 없이 누가 송아지를 가져오고, 왕의 허락 없이 누가 양 한 마리들 가지고 올 수 있겠습니까? 사울이 지가 탐이나니까 슬쩍 눈짓을 줘서 모아놓았다가 궁지에 몰리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그랬다고... 미명아래 욕심을 가리우고 있었습니다. 미명아래 불순종을 가리우고 있었습니다. 미명아래 거짓을 가리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거짓말을 하는 사울 왕이 과연 옳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제물의 기름보다도 순종을 원하신다고 탄식하셨습니다.

목적이 좋으면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촛대를 훔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적이 좋다고 해서 방법이 나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좋으면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태도가 좋으면 동기도 좋아야 합니다. 결과가 좋으려면 과정도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만 보고 좋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공산당에서는 목적만 좋으면 방법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 부모를 고발하고 때려죽이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 때 ‘살부회(殺父會)’라는 게 있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아버지를 죽이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부르조아인데 내가 죽일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네 아버지 죽일테니 네가 내 아버지 죽여라.” 그래서 모인 것이 살부회입니다. “지상천국 만들기 위해서 모든 부르조아는 다 죽어야 한다.” 이게 공산당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태도만 좋으면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닙니다. 동기가 문제입니다. 사울 왕은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드린답시며 미명아래 죄를 저질렀습니다.

2) 미명아래 허영심의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25:41-43을 보면 임금 예수님께서 땅을 심판하실 때 한쪽에는 양을 두고, 한쪽에는 염소를 두고 판단을 하십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무슨 말입니까? 예를 들어서 남․녀선교회 회원 모두가 모여서 고아원을 방문하고, 양로원을 방문하고, 교도소도 방문하고,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그런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떡커니 나가니 “너는 오른쪽에 앉아라.” “너는 왼쪽에 앉아라.” 갈라놓습니다. 다같이 땀 흘렸는데, 다같이 수고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는 오른쪽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참 고맙다. 수고 많았지?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갇혔 때 돌봐주었고... 참 잘했다.”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지극히 작은 소자 중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 했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아니 우리가 언제 안 했습니까? 저 사람들하고 똑같이 고아원 다니고, 양로원 다니고 그랬는데 안하더니요?” 반문합니다. 그때 주님 하시는 말씀이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 물론 다 했습니다. 문제는 정신입니다. 하나는 함께 땀을 흘리며 일을 하면서 “저 아이들도 다 부모가 있을텐데... 불쌍해라.” “저 어른들도 다 자식이 있을텐데... 이렇게 양로원에 오셨구나.” 그래서 김치를 담아도 지저분하게 담지 않고 깨끗하게 담고, 숟가락 하나도 물이 질질 흐르게 놓지 않고 잘 닦아서 깔끔하게 놓고, 갔다 드리는데도 툭 던지듯이 놓는 게 아니라 정성을 다해서 놓고...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우리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대접하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우리 주님 보실 때에 모양도 좋고, 마음도 예쁘고... 그래서 이를 기억하셨다가 심판 날 “너는 오른쪽에 앉아라.”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반면 또 한쪽에서는 “내가 이것을 해야 인기를 얻고, 그래야 집사되고 권사되고, 장로되는 데 도움이 될 것 아닌가?” “내 바쁜데 여기까지 왔으면 기왕이면 다른 사람에게 멋있게 보여야지.” 똑같이 일은 하는데 마음은 엉뚱한데 있습니다. 그 마음에 주님이 없습니다. 그 마음 속에 주님 사랑함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기는 행하는데 목적이 다른데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 보시고 천사보고 “저 집사 마음 좀 기록해놔라.” 그래서 심판 때 그 기록보고 “너는 왼쪽!” 그러는 것입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해야 하는 것인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해야 하는 것인데, 기껏 일해놓고 스스로 공치사하고, 자랑이나 하고... 이런 식으로 하는 봉사는 다 왼쪽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헌신, 그런 봉사, 그런 충성... 다 왼쪽감이라는 것입니다. 허영심이나 명예심 때문에 미명하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3) 성직이라는 미명하에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제사장이니까 아무래로 괜찮다.”
“나는 서기관이니까 아무래도 괜찮다.”
“이 성전의 관리자니까 아무래도 괜찮다.”
아닙니다. 이것이 성직이라는 미명아래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이름 팔아 빛 좋은 개살구같은 목사,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전도사 있을 수 있고,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장로들도 있을 수 있고, 빛 좋은 개살구같은 권사, 집사들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이 노끈으로 채찍 만드시어 우리교회를 책망하시지는 않을까... 이원희목사를 책망하시지는 않을까... 장로, 권사, 집사를 책망하시지는 않을까... 반성해보자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왜 이렇게 저들이 미명하의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좋지 못한 습관 때문입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입니다. 한번 할 때는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다가 두 번 하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약해집니다. 세 번, 네 번...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습관화되어 버립니다. 요12장을 보면 마리아가 300 데나리온의 값어치의 향유를 예수님께 쏟아 부었습니다. 가룟유다가 그것을 보고 “아이구 아까운 것! 아이구 아까운 것! 저것을 팔면 얼마 받을텐데... 그러면 내가 얼마를 삥땅칠 수 있을텐데... 어이구 저 아까운 것...” 그러면서 팔아다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될 것 왜 허비하느냐고 비난합니다. 말이냐 좋지... 역시 미명하의 죄를 짓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의 이러한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는 습관 따라, 지금까지 살아온 그 방향 따라 돌아가게 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방향으로 마음이 돌아가는 법입니다. 생각에도 습관이라는 것이 있고, 마음에도 습관이라는 것이 있고, 말에도 습관이라는 게 있고, 행동에도 습관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부지부식간에 습관 때문에 미명하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2) 어떤 때는 혈기나 허영심 때문에 미명하의 죄를 짓게 됩니다.

마26장에 보면 로마의 군병들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 잡으러 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 잡으러 온 로마 병정들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예수님을 보호할 양으로 옆에 있던 칼을 빼들어 휘둘렀습니다. 그리고는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겉으로 볼 때 얼마나 충성스럽습니까? 지금 목숨 걸고 나서지 않습니까?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로마병정이 달려드는 날이면 단칼에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용기를 내서 칼을 뽑아들고 주님을 보호하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충성스럽습니까? 그러나 그 충성은 충성이 아니라 충성이라는 미명하에 범한 죄이기에 우리 주님은 받아들이지 않고 칼을 제 집에 꽂으라고 야단을 치셨던 것입니다. 목적이 좋으면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다면 칼이나 휘둘러서 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는 명예, 허영심, 혈기 때문에 미명하의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고함을 치고 말을 거칠게 합니다. 내가 이러는 것이 돈푼이나 생겨서 그러는 줄 아냐고... 내가 이러는 게 덕보려고 그러는 줄 아느냐고... 다 교회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천만에요. 말은 좋지만 마음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을 교회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자기 혈기를 휘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명 팔아 죄짓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충성한다고 거짓의 칼을 휘둘러서는 안되고, 혈기의 칼을 휘둘러서도 안됩니다. 저 다른 동네 가면 어떤 이는 폭언의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상스러운 말의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혈기의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아무리 교회를 위한다고 해도, 교회를 위하면 방법도 교회를 위하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4. 그러면 이 미명하의 죄를 이기는 법이 무엇입니까?

고전4:4-5에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감추인 것과 마음의 뜻을 보고 판단하시는 판단이 우리 주님의 판단입니다. 사람은 겉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속보고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라도, 내가 애매한 누명을 썼든지, 내가 변명하려고 하지말고 판단하시는 이는 주시니 주께서 어련히 아시고 판단해 주실까! 이를 모르는 사람이 교회를 위한다는, 복음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 날 우리 주님 날보고 뭐라고 하실까?”
이것이 우리의 삶의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빛 좋은 개살구 되지 않으려면 “우리 주님 나보고 뭐라고 하실까!” “주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실까?” 이것 깨달아야 합니다.

미명하에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충성한다고 하는, 봉사한다고 하는, 예배드린다고 하는 미명아래 가룟유다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사울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욕심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습관 때문에 그럴 수 있고, 혈기나 명예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우리 주님 불꽃같은 눈으로 내 양심을 들여보다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내 생각을 들여다보시면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내 은밀한 곳을 들여다보시면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 때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 미명하의 범죄를 할까봐 조심조심... 빛 좋은 개살구 될까봐 조심조심... 목적이 좋걸랑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태도가 좋걸랑 동기가 좋아야 합니다. 주님의 판단을 최후의 판단으로 알고 살아, 하루 하루가 주님께 인정받는 삶으로 이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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