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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친구 되는 교회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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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 되는 교회(눅 10:25-37)

오늘은 은급주일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몸 바쳐 헌신하신 원로 교역자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예배드리고 헌금하여 원로교역자들을 돌아보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만족을 드리지 못합니다만. . .한국 교회의 성장의 배후에는 원로 목사님들의 눈물과 기도와 희생이 어려 있습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이 필요로 합니다.
감리교회는 한국 기독교에서 최초로 은급사업을 시작한 교단입니다.
현재 원로목사와 별세교역자 유족 등 758명에게 매월 4억 4천여 만원씩 년 54억(2002년) 정도를 지급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른 교단들도 은급사업을 나름대로 하고 있습니다만
현재, 개신교 8개 교단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활발한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은퇴목회자의 대폭적인 증가 현상이 나타나면서 현행 은급사업도 시급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좋은 친구, 변화되는 세상”이라고 표어를 걸고 한 해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좋은 친구’에 대한 주제의 말씀으로 “좋은 친구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계속 드릴려고 합니다.
친구, 이웃.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참 친구가 드물며, 참 이웃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은 많지만 친밀함이 없고 깊은 인간관계는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을 ‘고독한 군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세상입니다.
점점 이웃이 없어지고, ‘우리’라고 말 할 수 있는 울타리는 좁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4무병에 걸려 있다고 말합니다.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
친구, 이웃이 없습니다. 사람은 많지만 속마음을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이웃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강남에 있는 아파트 밀집 지대에서 두 집 이상 이웃을 가진 가정을 조사하였습니다.
500세대에 98세대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집만 가진 이웃은 187세대가 나왔습니다.
이웃과 단절된 오늘 사회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연세대 심리학과에서 초등학교 5, 6학년 500명을 대상으로 친구에 관한 조사를 했는데, 친구가 별 의미 없다 23%, 친구가 좋으나 사귀지 않는다 35%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38%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어린 아이들도 친구의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친구를 가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며칠전 경기도 부천에서 초등학교 두 어린이가 피살 된 사건이 있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아직 경찰의 수사가 끝나지 않았지만 얼굴을 아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이웃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걱정인데, 거기에 다가 아는 사람이 범행을 저지르는 이런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의 시민들은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최근 한 기독교잡지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비 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의 모습’은 이기적이다 31.4%, 비인격적이다 22.9%, 위선적, 자기중심적 18.6%, 모범적, 인격적이다 17.1%, 기타 10.0% 였다고 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비율이 73%에 달합니다.
참 부끄러운 결과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학교 1학년때 해변에서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을 보면 옷입은 채 물에 뛰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 튀브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졸업반이 되면 뛰어 들어가지도 않고 링을 던지지도 않고 밖에서 “어 나와” 하며 손짓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풍자적인 비유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그린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율법을 잘 아는 율법사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율법사는 쉽다는 듯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신6:5)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러면 영생하리라”고. .
그 때 율법사는 “옳게 보이려고”다시 말하면 ‘자신만만하게’ 자신은 모든 것을 다 했으니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다시 질문합니다.

국어 사전에 ‘이웃’이란? 나란히 이어서 경계가 서로 접하여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와 있습니다. 율법사는 ‘동족’이 나의 이웃일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 이웃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당시에 천대받았던 한 사마리아 사람이 베푼 선행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때 세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지위와 명예를 지닌 제사장이었고 또 종교인 레위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신음하며 도움을 청하는 그 사람을 목격했지만 못 본체하고 지나갔다. 무서워서 도망갔던 것입니다. 제사장 레위인은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멸시와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은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고, 붓고, 싸매고, 태우고, 데리고 가고, 돌보아주고, 그뿐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맡기고, 돈을 주며 돌봐줄 것을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율법학자는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서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는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찬밥 대우를 받는 뉴스가 많습니다.
온갖 학대와 인종차별을 받으며 내 쫓김을 받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온 것은 우리가 우리의 노동계가 3D업종을 싫어하고 실업자는 점점 불어나지만 일군이 없어서 그들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웃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1. 좋은 이웃은 생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좋은 이웃은 착한일 정도 하는 사람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생명을 사랑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1이후에 보면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쇠고랑과 쇠사슬에 묶였으나 그것들을 끊고 부수고 헐크 같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힘을 당해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밤낮 공동 묘지와 산 속을 돌아다니며 소리지르고 돌로 제 몸을 해치곤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군대입니다. 우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 많은 돼지떼가 풀을 먹고 있었는데 귀신들은 예수님께"우리를 돼지떼에게 보내 그 속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요"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 돼지떼 속으로 들어갔는데 거의 2,000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가파른 비탈로 내리달려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돼지를 치던 자들이 예수님께 그 지방을 떠나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돼지 2000마리가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돼지값을 몰라서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귀신들린자 한 사람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생명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좋은 이웃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사랑의 마음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좋은 이웃은 상대의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강도의 출현이 잦았고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이런 길은 혼자 다니면 혼자 간 사람의 책임도 큰 것입니다. 책망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도와주면서 꼭 한마디씩 합니다. 도와주고는 훈시를 설교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둥. . . . . 먹을 것 조금 도와주고는 잘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둥. . .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부주의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이웃이 되어 줬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런 위험한 길에 혼자 왔기 때문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된 것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신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설교가 아니라 행동입니다.
예수 오래 믿으면 굳어지고 형식화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랑을 자꾸 입으로 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칠려고 합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 . .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관심, 사랑이 아니라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추상적인 것을 가르치며 생각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이웃들의 삶의 현장에서 팔을 걷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 많은 수는 저를 비롯해서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내가 하지 않을려는 생각이 가득한. . .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멸시와 천대 받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만 지역감정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세계는 다 지역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민족적인 갈등의 골이 깊이 패여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분명히 이 강도 만난 자가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대인이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역감정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도 멸시하던 원수같은 유대인의 아파하고 죽어가는 모습 속에서 쾌감을 느껴보고 싶어하는 복수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복수심을 느끼고, 상대가 조금 힘든 일을 만나면 통쾌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 진노 재앙이라고 까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합니다.
롬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우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는 사랑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자의 아픔을 보는 순간, 아무 조건 없이 불쌍히 여기는 뜨거운 가슴이 불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만 가지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저 말없이 행동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많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기가 2.8%만 있으면 물이 썩지 않는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 .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 차원을 넘어서 희생과 봉사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강도 만나 신음하는 이웃들이 너무 많습니다.
좋은 이웃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참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노숙자, 그많은 가난한 사람, 카드 빚진 자들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3.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 슈바이쳐 박사는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돕는 사랑을 Pericanism(페리카니즘)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Pericanism이라는 말은 아프리카에 사는 페리칸 이라는 새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부리가 매우 발달한 페리칸이란 새는 큰 부리 주머니를 이용하여 다른 새들이 공격해 올 때면 새끼들을 그 부리주머니에 넣어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되어 먹이 구하기가 어려울 때면, 페리칸은 최후의 수단으로 그 커다랗고 긴 부리를 이용하여 앞가슴의 털을 마구 뜯어냅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부리 끝으로 살점을 집어내어 새끼들에게 먹입니다. 떨어지는 살점에는 피가 낭자하고 그 고통이야말로 다 형용할 수 없지만 페리칸은 생명이 다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새끼를 위하여 사랑을 쏟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을 나타낸 것을 Pericanism이라고 했습니다.
페리카니즘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또는 질고에서 고통 당하는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죽으시기 까지 희생하시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도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환자에게 나누며, 행동하는 사랑을 하였습니다.
34절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돌보아 주었습니다” 동사형이 계속 나옵니다. 이것이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참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도, 아픔도. .
사마리아인의 행한 일을 살펴 볼 대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여 강도 만나 신음하는 이를 돌보며 도와주는 일을 했다고 봅니다. 이는 어떤 보상을 생각하지도 아니했고 자신의 명예나 위치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뜨거운 사랑의 감정에서 했던 일이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의무와 한계를 초월하여 돌보며 어려움을 만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되
자신의 힘이 미쳐지는 데까지 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도움이 전혀 안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좋은 이웃이 되어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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