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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배우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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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배우라
마태복음 11:28~30

사람이 살아가는 생의 전 과정은 끊임없이 고통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심에 있는 어떤 갈증에 대한 욕구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욕구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거기에 따라오는 고통도 다릅니다.

스탠포드 대학 연구소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심리유형을 연구했습니다. 생계유지형, 외부지향형, 내부지향형입니다. 생계유지형은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하는 기본적인 생존 욕구를 추구합니다. 외부지향형은 ‘내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잘 살까, 남보다 더 출세할까, 성공할까 하면서 외형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내부지향형은 풍성한 삶을 내면에서 찾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인 것,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발전시키면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이것은 유명한 찰스 핸디라는 사람이 쓴「헝그리 정신」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배고픈 갈증을 가지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해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거의가 다 이 세 부류에 속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건강하게 살까, 어떻게 살아남을까’ 하는 갈등, 또 ‘내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성공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갈등 속에서 몸부림치는 일종의 헝그리 정신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 말씀은 헝그리 정신, 욕구의 갈증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을 초청하시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을 먹고 살까’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 칩니다. 또 성공하기 위해서, 남보다 더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하면서 배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까지는 배우지만 인격적인 삶은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 수고와 짐을 덜고 안식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그 쉼을 위해 예수님에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참다운 쉼과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 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배고프고 소외된 백성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는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뒤를 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수의 사람인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배우도록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간들, 기본적인 생존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게서 진리를 배우고, 인격을 배움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은 “내가 너희를 만족케 하겠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인간은 만족해야만 쉼이 있고,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것은 배우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가 자신을 성찰해야 됩니다. 내가 무리 가운데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입었는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무리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인격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배운대로 성격도, 인간성도, 체질도, 기질도 다 형성되었습니다. 부모의 운명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우리 사회에 물려진 습관과 문화가 오늘의 사회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배움에 따라서 운명을 결정하는데 잘 배우면 잘 배운대로 성공하고, 행복하고, 잘못 배우면 잘못 배운대로 인간은 불행하고 굴절된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성격도 배운대로 됩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나고 부모로부터 받은 그대로 또 배운대로 형성이 됩니다. 부모에게서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배운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식에게, 아내에게, 사회 속에 그대로 표출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거의 배운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친구를 사귀면서도 배우고, 가정에서도 배우고, 사회에서도 배웁니다. 그러면서 배운대로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서 배웠든, 친구에게서 배웠든, 사회에서 배웠든 그대로 하나의 인간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고, 학식을 배우고, 많은 정보를 배우지만 마음을 배우라고 초청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배워야 할 것 가운데 최고의 배움은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특별한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가르치는 특별한 스승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행복도 마음에 있고 불행도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밀턴은 마음은 천국도 지옥으로, 지옥도 천국으로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삼중고의 인간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답운 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것은 가슴으로만 느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좋은 것은 마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월리암 제임스는 “우리 세대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자기 마음 자세를 바꾸므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일찍이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모든 운명과, 행복과, 불행과, 삶의 모든 자유가 다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와서 내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무슨 마음입니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만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도 인간의 모든 고통을 마음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해와 생로병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이 다 고통인데 불교의 팔고 가운데 이별예고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 헤어지는 고통, 물질을 잃어버리고, 권세를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유의 잃어버림, 높은 권세의 잃어버림, 만나서는 안될 사람을 만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서 미워하고 사는 고통, 만나서는 안될 사고를 만나는 고통, 구했는데 얻지 못하는 구득불고의 고통, 사업을 열심히 했는데 돈을 못버는 고통,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학교에 떨어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마음속에 쌓이는데 여기에서 자유하는 경지를 해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끊임없이 자기 몸을 고행을 해서 깨뜨려 가는 것이 불교요, 기독교는 내가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깨뜨려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와서 내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온순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온순과 온유는 다릅니다. 온순은 자연적인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바꾸어주신 성품입니다. 온순은 겉사람의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속사람의 성품입니다. 온순한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삽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대로 삽니다. 온순하면서도 예수를 안믿을 수 있지만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는 끝까지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고, 화평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를 이룹니다.
사도 바울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했다”(빌 2:5-8).
이것이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온유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자기를 완전히 별세시키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마음을 배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방법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멍에를 멘다는 말은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 땅에 가면 두 마리의 짐승이 한 멍에 아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멍에라는 말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고 훈련하는 것을 멍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배우고, 따르고, 본받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날마다 그 삶 속에서 예수를 드러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는 은혜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는 죄사함 받으라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받는 사건이요, 초보적인 은혜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높은 단계를 우리에게 요구하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본받고 예수님의 인격을 형성하고 세상을 살려내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로의 부름입니다. 이것이 함께 멍에를 메고 일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마음속에 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왔으니 하나님을 배워야지’ 하나님 배우러 신학교에 갔으니까요. 그런데 교수님들을 보니까 자기들이 배운 신학을 가르치는데 열중하지 하나님을 가르친다는 근본적인 목적이 없어요. 그래 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마태복음 11장 29절이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가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나님을 배우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가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를 배운다는 것이요, 예수를 배운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배움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이 제 생애를 새롭게 만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앉아있어도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길을 걸어도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잠을 자도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배움이 바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배우는 것인데 예수 배움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대립되는 두 신학이 있는데 복음주의 신학과 진보주의 신학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은 죽은 후에 천당가는 것을 가르쳤고 진보주의 신학은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이 3년동안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가르쳤고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별세신학은 뭐냐? 내가 죽고 살아서 나를 변화시켜 세상을 살려놓는 신학입니다. 죽은 후의 천국을 얘기하고, 세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세와 현세를 여기서부터 끌고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성경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주님은 나의 생명, 나의 행복, 나의 전부,
  이 마음으로 하늘을 보니 새 하늘이요, 땅을 보니 새 땅이라
  현세와 내세가 함께 만나니 신비한 세계로다.

예수를 배우되 죽은 예수만 배우지 말고 산 예수만 배우지 말고 죽고 사신 예수를 배워야 됩니다. 죽으라고만 하면 다 싫어합니다. 죽고 살라고 해야 좋아합니다. 신비한 비밀은 죽지 않고는 살지 못합니다. 내가 죽은 만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죽으면 많이 산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 옛날 카톨릭의 신부들처럼 몸을 피가 나도록 때리고, 못에다 자기 몸을 찔러서 어떤 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멍에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를들면 여기 종이 한 장과 성경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종이와 성경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 종이와 성경은 따로 놉니다. 종이와 성경을 함께 두려고 풀을 묻혀서 붙이고 테이프로 붙이면 어느 기간까지는 잘 붙어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찢어져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 종이를 끼워 넣으면 종이는 성경이 가는대로 따라갑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 십자가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예수가 죽을 때 나도 죽고 예수가 부활할 때 나도 사는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 멍에 속에 들어가면 쉽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멍에를 메고 있으니까 나는 그 속에 끼어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 안맞는 고통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농촌에서 지게를 져보니까 지게가 안맞으면 아주 큰 고통입니다. 지게가 나에게 딱 맞아야 힘이 덜 들고 짐도 가볍지 너무 크든지 작든지 하면 짐보다 지게가 나를 더 힘들게 합니다. 이와같이 멍에도 딱 맞아야 짐을 나르고 밭 가는데 좋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멍에가 나에게 딱 맞느냐? 예수님의 멍에에다 나를 맞추어버리면 됩니다.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이 안맞는 고통입니다. 사람이 사회에 맞지 않아서 이 사회가 고통입니다. 부부간에 맞지 않아서 사네 안사네 고통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이혼률이 높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한국입니다. 이혼사유 1위가 성격차이입니다. 까다로운 성격을 누가 맞추면서 살겠습니까 안맞아서 못살겠다는 것이 이혼입니다. 직장이 맞지 않으면 일하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갓 입사했다가도 안맞으면 금방 나옵니다.

교회에서도 은혜가 맞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고통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와 맞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이 고통입니다.
왜 맞지 않습니까? 멍에가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같이 못을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이제는 예수 십자가 속에 자기가 꼭 끼어버린 것입니다. 예수와 꼭 맞으면 그때부터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맞습니다. 

이 세상에서 맞추기가 제일 어려운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요, 우리는 불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실한 분이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예수님은 선하신 분이요, 우리는 악한 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맞겠습니까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이 어떻게 맞겠습니까 도저히 안맞습니다.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안살려고 믿고 또 천당이 있기는 있는데 안가려고 합니다. 천당 가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입으로만 천당 얘기하지 가려고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천당 가려고 믿으면 삶 전체가 달라집니다. 예수님하고 살려고 믿으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왜 예수님과 함께 살기가 어렵습니까?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함께 사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같이 죽는 것입니다. 내가 의로워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어야만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서 예수와 맞아진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다 맞습니다. 어떤 까다로운 남편과도 맞습니다. 예수의 뜻을 어떻게 맞춥니까? 십자가에 죽으므로 맞춥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와 함께 죽으므로 모든 것이 맞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도 다른 사람들은 탄식하는데 혼자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 멍에는 쉽다’는 말은 꼭 맞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짐이 가벼워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 배운 자의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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