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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Buffet, just for God! (13) / 시 133:1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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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ffet, just for God! (13)
시 133: 1 - 3

자식을 기르는 부모로서 가장 기쁘고 감사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형제끼리 서로 화목하고 사이가 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서로 화목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마 부모에 대한 최고의 효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형제끼리 밤낮 다투며 으르렁 거린다면, 사이가 나빠서 서로 왕래도 하지 않으며 소 닭 보듯 하며 산다면, 그리고 서로 상처를 주며 산다면 부모로서 얼마나 마음 아프고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저는 아들만 셋을 키웠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과 함께 탁구장을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동네 농구장에서 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농구장의 아이들이 세 명이었는데 우리 아이 세 명을 보자 세 명씩 팀을 짜서 시합을 해 보자는 제안이 들어오고 즉시 아이들은 편을 짜서 농구 시합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길가에 서서 아이들이 농구 시합을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아들 삼 형제가 한 팀이 되어 ‘ 형 이리 패스 해’ ‘정열아 여기 여기’하며 농구 시합을 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 가 없었습니다. 형제 없이 혼자 자라나 외롭게 자란 사람이 아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어 사이좋게 자라는 것을 보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저는 그때 시편 133편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저와 똑같은 마음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 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오늘 하나님을 위한 Buffet menu를 생각하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잔칫상에 올려 드려야 할 가장 중요한 메뉴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되어 서로 형제 된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메뉴를 ‘형제를 사랑함’으로 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서로 형제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쉽게 이야기하지만 세상에 사랑처럼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사랑이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많이 있지만 저는 사랑이 어려운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를 공의와의 조화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공의와 조화를 이룰 때에만 진정한 사랑이 되는데 불완전한 우리 인간에게 그 사랑과 공의의 조화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공의를 생각하다보면 사랑을 놓치고, 사랑을 생각하다보면 공의를 놓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사랑 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닙니다.

사랑만 생각하다보면 공의를 잃어버리게 되어 공의 없는 사랑이 되기가 쉽습니다. 공의를 잃어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사랑은 결국 사랑받는 대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입니다. 망칩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그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하고 애용하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율법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에 있다는 바울의 신학을 강조하다 그것이 지나쳐 지나친 은혜주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신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바울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율법주의가 되면 그 본래의 생명을 잃어버리듯, 은혜가 은혜주의가 되면 똑같이 은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율법 없는 은혜만을 강조하다 우리 한국 교회는 많이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공의 없는 사랑이 사람과 자식을 망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초달을 공의로만 알고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공의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공의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율법 없는 은혜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국교회에서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이상한 것으로 변질 되었습니다. ‘은혜스럽게 하자’는 말은 무조건 잘못된 것을 덮자는 말과 같은 뜻이 되었고 무슨 일을 하든지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일사천리로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망가지고 어렵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공의 없는 사랑만큼 나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없는 공의 입니다. 공의 없는 사랑만 강조하며 율법과 비판 없는 엉뚱한 은혜만을 강조하다가 교회가 부패하게 되고 망쳐지게 되자 율법과 바른 비판과 같은 공의를 교회개혁의 잇슈로 내걸고 나타난 사람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의’였습니다. 그러나 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의에 지나치게 집중하다가 보다 중요한 사랑을 놓쳤습니다. 공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 사랑 없는 공의 역시 공의가 아닙니다. 사랑 없이 외치는 공의에는 아무런 능력도 생명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마음으로 외치는 그 어떠한 공의도 울리는 꽹과리와 같아서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이 자식을 망치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 없는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는 길과 사랑 없는 공의로 자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아이들을 버릇없게 없게 만듭니다. 후자의 경우는 아이들을 반항아로 만듭니다. 율법 없는 은혜가 사람을 잡고, 은혜 없는 율법이 똑같이 사람을 잡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공의 없는 사랑과, 율법 없는 은혜 때문에 부패하고 망가진 교회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교회입니다. 제가 말이라도 교회개혁을 부르짖고 옳고 그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교회를 표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 교회가 공의 없는 사랑으로 부패되거나 망할 위험성은 다른 교회에 비해서는 좀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교회가 안전한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세상의 다른 교회와 똑같이 위험합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공의 없는 사랑을 말로만 비판하고 실제로는 율법과 비판을 무시함으로 다른 교회들과 똑같이 몰락할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확률이 높은 것은 사랑 없는 공의와 은혜 없는 율법으로 상처 받고 갈라져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몰락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게시판을 통하여 우리 교인들과 사람들의 진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향과 취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리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서슴없이 말하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이야기하고 주장하는 것이 모두가 다 옳은 말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옳은 말들입니다.

옳지 못한 말과 생각은 사람과 교회 그리고 세상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옳은 말과 옳은 생각만 있으면 사람과 교회가 세상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옳은 말에는 생명이 없어서 사랑 없는 옳은 말과 생각은 옳지 못한 말과 생각과 똑같이 사람과 교회와 세상을 죽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공의 없는 사랑으로 스포일(spoil) 되어가고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사랑 없는 공의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사랑이 사람과 세상을 살릴 줄로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공의가 사람과 세상을 살릴 줄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공의와 사랑이 함께 잘 균형을 이루고 입을 맞출 때에만 사람과 세상과 교회는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의 후임으로 아볼로라고 하는 사역자가 부임을 하였습니다. 그는 젊었지만 학문이 깊고 아주 유능한 사역자였습니다. 바울의 뒤를 이어 큰 흔들림 없이 고린도 교회를 사역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탁월한 사역자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참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고 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천막 깁는 기술을 가르쳐 줌으로 바울이 자비량 선교를 할 수 있게 해 준 부부였습니다. 그것을 보아 저들도 천막 깁는 일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 부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교인들이 미처 아볼로의 약점을 발견하기 전에 신앙이 깊었던 이 두 부부가 아볼로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무도 모르게 아볼로를 찾아 갑니다. 그리고 조용히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하여 설명을 해 줍니다. 아볼로는 겸손하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말을 새겨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약점을 바로 잡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아볼로의 약점이 문제가 될 틈도 없이 정말 조용히 그러나 아주 완벽하게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예리함과 우월함을 입증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자랑을 삼으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아볼로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그와 같은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지만 저들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본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의로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다가 상대방을 죽게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그러나 예리한 공의의 칼날에 죽어간 사람들이 교회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와 세상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자기들의 의 그리고 자기들의 예리함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저들의 관심은 아볼로와 고린도 교회의 생명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공의와 사랑이었습니다. 공의 없는 사랑과 사랑 없는 공의 사이에 예리한 균형을 이룬 감각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한다고 무조건 덮어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함부로 들추어내지도 않았습니다. 공의 없는 사랑은 문제를 무조건 덮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을 잡습니다. 사랑 없는 공의는 무조건 문제를 들춥니다. 그러다가 사람과 교회를 잡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무조건 덮지도 않았고 무조건 들추지도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성숙한 신앙과 그 신앙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사랑이 아볼로와 고린도 교회를 살렸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기 이전에 그 보다 먼저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신앙과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인격을 가지고 사람과 교회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의 미숙한 인격과 신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없는 옳은 말로 사람과 교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그 반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을 그 누구 보다, 그 어떤 것 보다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메뉴를 하나님의 잔칫상에 올려 드려드리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분의 신앙과 인격을 자신의 신앙과 인격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인격과 신앙을 갖춘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연합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은 자신이 속해 있는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합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화평과 형제의 연합을 그 어떤 것보다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 시편 133편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화평과 형제의 연합을 가리켜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제가 시편 133편에서 가장 좋아하는 표현 중에 하나는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다’라는 표현 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시고 만족하셨으면 복을 명령하시겠습니다. 그것도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복이 아니라 영원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영생의 복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소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에게 결단코 상을 잊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자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아무리 작게 여기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를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사랑 없는 공의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옳은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옳다는 것만 알지 자신들이 말을 함부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별로 민감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은 옳고, 자신의 비판을 받는 사람은 옳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 정도는 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교만이 대개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게시판을 통하여 가장 마음 아파하는 것 중에 하나는 말들을 너무 함부로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아무렇게나 조심성 없이 툭툭 말을 내뱉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심지어는 욕까지 서슴치 않고 오로지 ‘무엇이 옳고 그른 가’만을 생각하며 함부로 자기의 말과 생각을 글로 올린다는 것입니다. 설사 자신의 주장과 생각 그리고 판단이 옳다고 하여도 그와 같은 식의 표현과 자세를 통해서는 그 어떤 것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며 말과 생각을 글로 올린다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예전 사람들에 비하여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예리하고 똑똑해 졌습니다. 그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전 사람들에 비하여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덕이 없고 예의가 없어졌습니다. 부덕과 무례는 사람을 하찮게 보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에게 꼭 가르쳐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과 세상을 귀히 여기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과 낮은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저들을 함부로 대하는 부자들과 높은 사람들이 싫습니다. 똑같이 저는 무조건 부자와 높은 사람을 경멸하며 비인격적으로 모욕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도 싫습니다. 부자 편을 들며 가난한 사람을 경멸하는 사람도 싫고 가난한 사람 편을 들며 무조건 부자들을 모욕하고 정죄하는 사람들도 싫습니다. 부자도 사람이고 가난한 자도 사람입니다. 부자도 존중을 받아야 하고 가난한 자도 존중을 받아야만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부자는 존중하나 가난한 자는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그에 못지않게 가난한 자는 존중하나 부자는 무조건 경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와 같은 무례와 부덕 때문에 세상에는 분열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한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어떤 일과 사업을 하는 것 보다 그것을 먼저, 더 기뻐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마음과 인격과 신앙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노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여러분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이 마음과 인격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그와 같은 수준이 될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잔칫상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메뉴를 올려드리는 사람이 되시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게 될 때 여러분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명령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복을 다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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