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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에서 내려 오시니 (눅 9:3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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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 오시니 (눅 9:37-48)

여러분! 어느(주일) 날, 예배시간(또는 새벽기도 시간)이 너무 좋고 은혜로워서 일어 설 마음이 전혀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까? 교회가 너무 좋아서, 예배가 너무 좋아서, 말씀이 너무 좋아서, 찬송 부르는 것이 너무 좋아서, 기도 시간이 너무 좋아서, 전도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구역예배가 너무 좋아서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져 본 경험이 있으신 지요?

사실은 그러합니다. 어느 정도 신앙 세계의 신비를 알고 계시는 신자라면 때때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시간만큼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인즉 사실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베드로의 기분이 그러합니다. 정말, 산에서 내려오기 싫습니다. 산에서 계속 살고 싶었습니다. 거기서 주님 모시고 살고 싶었습니다. 33절은 그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영적 도취상태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정말 공감이 갑니다. 포기하는 심정에서가 아니고 정말 좋아서, 천국이 그립고 사모되어서 ‘이 상태로 천국까지 가 버리고 싶다’ 이런 경험 있으실 것입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찬송가499장 3절)‘ 바로 베드로의 심경이 이에 흡사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찬송을 성령에 도취하여 부르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달래고 추스리사 산을 내려오십니다. ”저 산 아래로 내려가자. 나를 보라. 저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에서 한 발자국도 옮기기 싫었지만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 왔지 않은가? 조금 전에 나의 영광을 보았지? 그것은 사실 지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야. 그런 영광의 나라에서 이 세상을 구하고자 내려 온 거야!(요1:14, 17:5, 24, 빌2:6-8)/ 나의 사명은 이 세상이란다. 저 곳! 저 산 아래이다.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 병자들이 득실거리는 곳. 온갖 문제들이 기다리는 곳, 저 곳이 우리의 일터이다. 그러니 우리는 내려가야 한다. 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한 곳, 쉬운 곳, 문제없는 곳, 신경 안 쓰이는 곳, 말썽 없는 곳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 중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거기다 기도원도 세우고 수도원도 세웁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칩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부르십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마5:13-15, 28:19-20, 행1:8, 고전5:10..그리하려면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장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골목으로, 아파트 속으로, 군대로, 학교로, 공장으로, 병원 입원실로, 중환자실, 응급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치료받으러 갈 수도 있고, 의료인이 되어 치료하러 갈 수도 있고, 병문안하고, 위로, 격려, 용기를 주고 전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현장 속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회원(직원, 사원)이 되어 들어가고, 손님으로 들어가고, 초청 받지 않았어도 기도의 힘으로 밀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이 예수님을 환영하였던가요?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세상 속으로 밀고 들어오셨습니다.(요1:1-10, 눅9:51)

산에서 내려오시니 거기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1) 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 자식이 병들었습니다. 그것은 흉악한 병입니다. 여기에 부모의 고통이 있습니다. 부모의 눈물이 있습니다. 부모의 통곡이 있습니다. 이런 급한 일, 나쁜 소식, 가슴 찢어지는 일만 없다면 부모가 되어 볼 만합니다. 그러나 아기가 대학생으로, 시집장가 들 수 있기까지에는 무수한 위기를 넘겨야 합니다. 왜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서두르지 않습니까? 심지어 왜 기피합니까? 결혼 적령기의 여성 49%가 결혼을 기피하거나 미루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충격적입니다. 국가적인 염려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청년들이여! 특히 여 청년들이여, 그러면 안됩니다. 이런 것은 본 받으면 안됩니다. 실제로 성경에도 이런 것은 본 받지 말라고 합니다. 로마서 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본을 보여 주여야 합니다. 세상의 잘못된 본을 은근히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결혼을 기피하는 풍조는 하나의 유행병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결혼시켰습니다. 결혼하여 젊음의 때에 사랑하는 아내(남편)와 더불어 즐겁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가나마을 혼인잔치에, 직접 참석하사 축하하시고 이적까지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끔찍히 사랑하시고 머리에 손을 얹으사 축복해주셨습니다.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예수님이 축복해 주실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사직동교회 청년들이여, 꼭 결혼하십시오! 짝이 없어서 못하고 있으면 담임목사에게 와서 신청, 접수하고 나의 지도에 그대로 순종하십시오. 그리하면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는 최소 3명, 최대 5명을 낳으시오. 왜? 지금 한국교회가 위기요, 하나님 나라가 위기입니다. 대학이 텅텅 비고 있습니다. 유치원들이 비고 있습니다. 주일학교가 비상입니다. 이러다가는 천국도 텅텅 비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꼭 결혼하십시오. 아이는 최소3명, 최대 5명을 낳으세요. 5명 낳으면 성지순례 보내줄 용의있습니다.(장로님들 동의하시지요?) 오늘 설교테이프 구입하여 객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에게 꼭 보내십시오.

2) 산 아래에는 귀신이 설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세요.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39절) 성경은 귀신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잘 보아둡시다. 그래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귀신은 사탄의 하수인들입니다. 귀신은 유치하고 비겁합니다. 어린아이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거꾸러뜨리고,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내뿜게 합니다. 심히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힘이 상당합니다. 경기도 부천에서 또 초등학생 2명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이들을 살해한 수법이 꼭 귀신의 수법 같습니다. 잔인하고 추하고 비겁합니다. 공산주의 간첩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범인이 누구든 ‘귀신의 수법’과 동일합니다. 21세기 현대는 귀신들이 직접 설치지 않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귀신 노릇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인간, 귀신 노릇 하는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 사람을 해치는 것, 성 윤리 파탄으로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귀신의 농간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요10:10)“

3) 산 아래는 정치적 음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44절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타락한 권력, 더러운 공권력, 추잡한 술수와 음모, 흉계들이 사방에서 넘쳐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끊없이 희생양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정말 더러운 세상입니다. 썪은 악취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권력들의 더러운 음모가 이 세상을 먹구름처럼 뒤덮고 있습니다. (강도, 창녀, 국회의원 세 사람이 동시에 해운대 해수욕장서 수영하다가 한꺼번에 위험지역으로 들어가서 익사직전이 되었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했는데 해변의 군중들에게 ‘누구를 먼저 구출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군중들이 한 목소리로 무어라고 답했을까요? 신기하게도 일치된 대답이 울려 나옵니다. ’국회의원입니다.‘ 왜 이 대답이 나왔을까요? 깨끗한 해운대 바다 물을 가장 심하게 오염시킬 인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그렇습니다. 주님 위하여, 믿음 때문에 때로 바보취급 당하고, 손해보고,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정치적 음모를 별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순교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례요한과 야고보는 칼로 목베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바울은 고문과 폭행을 당한 후 투옥됩니다. 이러한 희생은 결국 전도 열풍을 일으키는 핵폭탄이 됩니다.

4)산 아래에는 ‘피곤한 인간관계’(갈등, 다툼, 변론, 분쟁, 시기, 질투, 오해, 원망, 비난, 모함등)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46-47절 “제자 중에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이 얼마나 유치합니까? 그러나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 일어나고 있는 실존입니다. 그러니 한심합니다. 그래서 사실 산다는 것이 피곤합니다. 이 세상은 과연 요지경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한 숨 쉬고 푸념하면서 울부짖고, 항변합니다. 특히 시편73:2절을 보십시요.“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사실 순박한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은 피곤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시, 힘들게 하는 것(사람, 상황)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기도하게 되고, 응답을 받고, 은혜를 받습니다. 고로 적당한 긴장은(부족함도) 유익합니다.(시118:13, 119:67-71, 롬5:3-4, 벧전1:6-7)

그러면 산 아래의 이 문제 투성이들을 어떻게 감당하고 극복할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들어가시는 산아래 저 세상에는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병이 있습니다. 귀신들도 있습니다.(귀신에게 이용당함으로 귀신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도 많습니다.) 갈등, 오해, 증오, 원망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생겨나고 눈물과 고통이 끊쳐지지를 않습니다. 우리들 삶속에는 무수한 절박함 들도 꼬리를 물고 찾아옵니다. 하늘을 보십시오. 날씨를 보십시오. 변화무쌍합니다. 변화무쌍한 날씨들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육지와 바다에, 농업과 어업에, 생물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절박한 상황들이 꼭 불행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절박함’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조심하게 되고, 근신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 영혼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 길에서 만나는 절박함은 놀랍고 당황스럽게 만드는 만큼 또한 은혜의 기회가 되어 줍니다. 나의 아우는 만 스무 살에 월남전에 자원하였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감행한 것입니다. 세 살 터울로 함께 뒹굴면서 자랐으므로 우애가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아우를 위하여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새벽에 자지 않고 깨어 기도하리라 결심하였습니다. 전사하지 말고 꼭 살아서 귀국하기를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 위의 세계와 산 아래의 세계는 판이합니다. 교회는 산 위의 세계요, 세상은 산 아래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양극단을 오가면서 살고 있습니다. 산 아래로 가서 우리의 소임을 잘 감당하려면 능력을 입어야 합니다. 무서운 병과 귀신들, 욕심과 음모들, 논쟁과 갈등, 대립으로 가득차 있는 산아래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믿음으로 살고 힘써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요일5:4-5, 눅18:8, 막9:23-24) 역사하는 믿음, 능력 있는 믿음을 가져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십시다. 그리고 기도입니다.(막9:28-29, 슥4:6, 약5:15) 쉬지 말고 기도하고, 힘써 기도하고 부르짖고 울면서 기도하면 부딪쳐 나갈 수 있습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요16:33, 롬8:37)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마10:1, 16, 19, 20, 26, 31, 39, 28:20, 고전10:1)

예수님의 이 당부 말씀을 평생 기억하면서 실천합시다. 이 세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문제 아닙니다. 문제 큰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문제라면 제자들처럼 우리에게 믿음이 적다는 것,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는다는 것, 쉽게 걱정하고, 돌아서면 의심해 버리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반신반의한다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병입니다.

산 아래에서 살아 남는 길, 승리하는 길, 사람들을 세워주고, 치료하고, 살려내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35-36절입니다. 오직 주님 예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즉 ‘믿음과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믿음이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무조건 신뢰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저 문제들 속으로 뛰어들어갑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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