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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벽별의 영광 / 사 61:1 ~ 6, 골 1:24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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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새벽별의 영광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61: 1 ~ 6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공의의 나무, 주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것이다. 황폐한 성읍들을 새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곳을 다시 세울 것이다. 낯선 사람들이 나서서 너희 양 떼를 먹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너희의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너희를 '주의 제사장'이라고 부를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일컬을 것이다. 열방의 재물이 너희 것이 되어 너희가 마음껏 쓸 것이고, 그들의 부귀영화가 바로 너의 것임을 너희가 자랑할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골로새서 1:24 ~ 27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으며, 그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 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라고 맡기신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에게 감추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성도들에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 복음서 1:15 ~ 18

  (요한은 그를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다. 율법은 모세에게서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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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현절 첫째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신 날을 기념한다 해서 주현절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수난주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7주간 동안 계속됩니다.

지난 연말에 성탄절을 다 지냈고 이미 신년으로 들어섰는데, 우리 교회에는 여전히 성탄절 장식이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 치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늘까지는 성탄 장식을 봅니다만, 다음주부터는 보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교회들이 있고, 그 교회들마다 전통이 있는데,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데도 두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12월 25일 전통이고, 또 하나는 신년 1월 7일 전통입니다. 그리스, 러시아, 또 루마니아, 폴란드, 그리고 옛날 유고슬라비아, 남인도, 북부 아프리카 등, 소위 정교회가 있는 곳에는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7일이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일을 주현절 첫째 주일로 지킵니다만, 정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오늘 주일을 성탄 후 첫째 주일로 지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예배를 주현절 첫째 주일 예배로 드리면서, 동시에 형제자매인 정교회의 성탄 후 첫째 주일에 함께하는 뜻으로 이렇게 성탄 장식을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이렇게 성탄축하일이 다르게 된 것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달력을 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달력은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그러니까 BC 46년, 로마 황제 율리우스 때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달력을 율리우스력이라고 부르는데, 이 달력은 오늘날의 달력과 비슷하게 1년이 365일과 4분의 1, 그러니까 365.25일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0.25일이 4년마다 모여 1일이 되기 때문에, 4년째 되는 해는 2월 달이 하루 많은 윤년이 됩니다.

그런데 325년에 열린 교회회의에서는 부활절과 성탄절 날짜를 정할 때 음력으로 정했는데, 그것을 율리우스 달력으로 맞춰 계산해보니까, 성탄일의 날짜가 1월 7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원조로 따지면 성탄일은 1월 7일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365.25라는 1년 주기를 과학적으로 계산해 보았더니, 오류가 있었습니다. 365.25일이 아니라, 365.242199일이었습니다. 사사오입해서 365.2422일, 이것이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도는 1년의 정확한 날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간 계산에 좀 차이가 있었던 것인데, 이 차이는 1년에 11분 14초 차이입니다.

그런데 율리우스력을 고쳤는데, 그것이 그레고리 교황의 이름을 딴 그레고리력입니다. 고친 달력으로 BC 46년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서 계산해보니까 예수 탄생일이 달라졌습니다. 1년에 11분 14초 차이를 가지고 역산해서, 서기 1년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추정했는데, 그게 12월 25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율리우스력을 고수하던 동방정교회 쪽에서는 여전히 1월 7일을 주장했고, 그리고 새로 만든 그레고리력을 쓰는 서방기독교, 우리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거기서는 12월 25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 태어나신 것도 아닌데, 이렇게 달라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교회 모든 축제일들은 과학적으로나 산술적으로 정확한 날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렇게 날짜를 잡고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성탄절, 주현절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지, 산술적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도 다 아는 상식 아니겠습니까.

정교회와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의 교회 일치를 논의하면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한 하나님을 믿지만 신앙과 교리, 또 축제에 관한 규정, 또 세례와 성만찬 규정 등  서로의 전통이 너무 달라서 한자리에 모여 예배드리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같은 것은, 성탄일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정교회에서는 중요한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실 러시아는 예부터 정교회가 국교로 되어 있었는데,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부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핍박에 핍박을 겪었습니다. 교회의 생존조차 어려웠습니다.  세계 많은 교회들이 러시아정교회와 연대 관계를 맺고,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러시아 교회는 세계 교회의 지원과 협력이 없었던들 그 암울했던 시절을 견뎌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고마워합니다. 그중에서도 러시아정교회를 가장 많이 도와준 교회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성공회입니다. 미국 성공회는 러시아정교회를 도운 지가 2백년 정도 됩니다. 오래전부터 도왔고, 미소간의 갈등과 대결이 심할 때에도 열심히 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사건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요즈음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 하나가 생겼습니다. 동성애 문제입니다. 동성애가 일반 세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 하는 것은 제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 안에서 논란이 벌어진 문제는 동성애자도 성직자로 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성공회가 지난 8월에 뉴 헴프셔 주의 교구회의에서 투표를 해서 62대 43으로, 로빈슨이라는 신부 한 사람을 주교로 서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2월에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 성공회가 분열되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을 겪고 있고, 성공회 본부인 영국에서도 지금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정교회가 이 주교의 취임과 동시에, 지난 2백 년 동안 자기네를 도우면서 서로 자매관계를 맺고 살았던 성공회에 대해서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러시아정교회는 과거의 모든 고마움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하나만 가지고 반성서적 반기독교적이라며,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지난 11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정교회 내에서도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러시아정교회 교인들 중에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가 공산 체제가 되자, 공산주의가 싫어서 러시아를 떠났던 사람들과 해외에 나가 있다가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러시아정교회 사람들이 해외 러시아정교회 총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 정권과 타협하면서 살았던 국내의 러시아정교회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철저하게 반대되는 새로운 러시아정교회를 세운다며,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소위 해외 러시아정교회 총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래서 1917년 이후, 두 정교회 사이의 관계는 아주 나빴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정교회가 미국 성공회와 절연하면서, 해외파 러시아정교회와 화해하고 연합하는 큰 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한쪽은 끊고 한쪽은 합치고. 그래서 분열과 일치가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서, 뉴욕에도 모스크바에도 아테네에도 오십니다. 성탄은 러시아정교회나 성공회나 우리 장로교나 똑같습니다. 이날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화육(化肉)한 날입니다. 하나님이 뭐 하러 인간이 되셨습니까?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은 유한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시간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에게는, 하나님 나라에는 우리가 아는 이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태어나는 시간이 있고, 수십 년 살다가 죽는 시간이 있고,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유한한 것입니다. 영원불변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무궁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무한한 하나님이 성탄의 날에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게 우리 성서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한이 유한 안에 어떻게 옵니까? 아무리 철학적 사고를 해봐도 그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철학적 사색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탄이란, 무한한 하나님 나라가 유한한 이 세상에 온 것이라기보다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사랑으로, 죄와 악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기 위해, 죄인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과 함께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은 영원과 시간에 관한 사상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죄인인 우리의 통곡 가운데서 함께 통곡하고, 함께 우시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과 함께 죽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죽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간의 죄를 없이 하신 뒤에, 인간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 의로운 나라의 시민으로 만드셨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바로 이 기쁨입니다.

그 하나님은 배고픈 자들과 함께 배고파하십니다. 묶인 자들과 묶여 계신 분입니다. 슬픔에 젖어 있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스스로 묶이심으로써 묶인 자들을 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오시면, 눈 먼 자는 눈을 뜨게 되고, 묶인 자는 풀려난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은 성탄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 경험 없이 아무리 성탄을 말해본들, 아무리 찬송이 울려 퍼진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오셨다는 것을 사실 유대인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멀리 있는 동방박사들이 별의 움직임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별빛을 따라 베들레헴 마구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별빛은 새벽 별빛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아주 누추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만나서 그분을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어둠이 얼마나 깊은가 아닌가 하는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는 다 어둠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사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어둠이 지나면 반드시 새벽이 온다는 것입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새벽 별빛이 비칠 겁니다. 새벽별을 보고 별빛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던 동방의 현자들, 그 사람들은 별빛 속에서 새 희망을 보았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비치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구간에서 깨달았습니다. 이 별빛은 그냥 별빛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별빛,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빛은 베들레헴 마구간에 예수라 이름하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태양이 별빛이 되어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별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탤런트가 되고 싶고, 각 분야의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왜 스타가 되고 싶어 합니까? 자신에게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했지만, 그들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비추는 빛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 보혜사 성령을 통한 그 빛을 반사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 오만한 스타들은 쫓겨났거나 단두대에서 교수형을 당했거나 또는 다른 심판을 받았습니다. 스타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빛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스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각 영역에서 말입니다.

주현절을 맞는 우리는 스타, 별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별입니다. 우리가 그 빛을 비출 때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 무너지지 않는 인기, 칭송받는 인품으로 우리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새벽을 기다립니다. 새벽을 깨웁니다. 새벽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새벽별을 빛나게 하십시오.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비추이게 됩니다. 새벽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오늘 주신 성서의 말씀입니다.

이 비밀을 한번 경험해 보십시다. 경험해 본 사람은 하늘의 영광이 어떻게 우리에게 복이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가장 낮은 곳에 거룩한 영광이 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룹니다. 그 구원의 역사가, 그 영광의 새벽별 빛이 여러분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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