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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음 문을 닫은 친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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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훈(소설가·소달중 교사)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147:3)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부터 우리는 친구였네. 세월이 흘러 이제 쉰이 다 된 나이에 당도한 지금 우리 사이가 너무 소원해진 것 같아 안타깝네. 그대의 얼굴을 본 지 벌써 일 년에 다 되어가는군. 그것도 스치면서 잠깐 만난 것이고,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눠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마저 아득하네.

사업에 성공해서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여. 그러나 사업장은 아내에게 맡기고 기원(棋院)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 그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네. 그대가 동굴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마음 문을 걸어 잠근 까닭을 말일세. 그 절절한 사연을 새삼스럽게 말해서 뭣 하겠나. 그대가 경험한 인간에 대한 혐오와 그에 따른 마음의 상처를 나는 얼마쯤은 공감할 수 있다네.

그러나 나는 그대의 동굴 속 생활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며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다네. 하루아침에 훌훌 털고, 햇살 가득한 가을 들녘으로 나서기는 물론 어려울 걸세. 하지만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겨놓으려는 노력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책을 읽다가 말츠(Maltz)라는 심리학자의 다음 글귀를 발견한 후 그대에게 꼭 한번 이런 편지를 쓰고 싶었다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상처받을 위험 속에 뛰어드는 일이다.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 그 하나는 두꺼운 보호 껍질을 만들어 상처를 싸맨 후 다시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껍질 속으로 들어간다. 굴은 그 견고한 껍질 때문에 언제나 안전하다. 그러나 타인과 교제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며 교감의 충만한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상처받지 않은 다른 한 뺨을 돌려대며 여전히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려는 태도이다. 이런 사람은 또 다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창조적이며 역동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네. 이제는 그만 굴 껍질 속에서, 그 진한 칠흑의 동굴 속에서 그만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대의 깊은 상처를 공감하는 친구로서, 그대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어루만져주실 한 분을 소개하겠네. 상처 입은 자네를 위해 더 큰 상처와 고통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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