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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간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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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 안양대교수 기독교문화학

현대 사회의 특징을 규정하는 개념에 원자화(原子化)라는 말이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몸을 부비며 살아가지만 실상은 제각각의 궤도와 운동 법칙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원자 같다는 말이다. 휴대전화가 울리면 이 용어는 사실로 확인된다. 서로 깊은 마음을 나누듯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다가 휴대전화가 울리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등 돌리고 딴청을 피운다.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버린다. 그 순간 대화는 단절되고 상대방은 머쓱해지고 상황은 싸늘해진다.

이런 광경은 직장에서도,거리에서도 심지어 가정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 함께 대화하던 상대방의 인격은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말하는 자아만이 있을 뿐이다. 내 말만 하겠다는 간접적인 폭력이요,이기적인 일방통행이다. 여기에서 예의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리더십 저서 가운데 ‘배려’라는 개념이 다시 등장한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가 얼마나 상대방의 입장에 서지 못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한다.

예의는 인터넷 상에서도 위기상황에 처한 듯싶다. 오래 전 모 양의 비디오라는 말로 네티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던 사건은 후안무치했다. 예의없는 집단관음증의 한 유형이었다. 얼마전 개똥녀라는 댓글이 사진과 함께 인터넷을 떠돌더니 그도 잠시 된장녀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이들 신조어의 공통점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점점 실종되어가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세인들은 이제 인식하게 된듯 싶다. 우리가 예의없는 사회로 돌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10여년 전 ‘저지 드래드’라는 영화가 나왔다. 너무 자유로워 무법천지가 된 뉴욕의 치안을 다스릴 엘리트 집단에 관한 것이었다. 비슷한 발상의 영화가 한국에도 등장하였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예의없는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무차별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작가 공지영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점잖게 소설로 권유했지만 앞으로 예의없는 것들은 정말 몸조심해야 한다. 영화에서처럼 언제 ‘킬러’가 등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안전불감증,위생불감증,안보불감증 등등 불감증에 대해 소리를 높였다. 이제 한 가지 더 고뇌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그것이다. 인간이 원자처럼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서로에 대한 서로의 사랑과 존경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겠는가.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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