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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견토지쟁(犬兎之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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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요즈음 미국은 FTA를 통해 남한의 무역 개방을 요구하고 있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강 이북 땅이 과거 자기네 땅이었다고 억지를 쓰고 있으며 일본은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핵무장을 하여야 한다고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대립․분쟁을 조정하고 통일적인 질서를 유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분쟁을 생산하고 확대하며 국민의 갈등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은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해 정적을 두드리는데 과도하게 지면을 할애하며 좌우 편가르기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국가의 이익과 실리를 추구하는 냉엄한 외교 현실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유럽 외교는 세력 균형과 국익 추구라는 실리주의를 표방했고 미국의 외교는 실리주의와 함께 이상주의가 공존했습니다. 6.25 때 30만 명이나 투입하여 대한민국 통일의 꿈을 좌절시킨 중국이 이제는 최대 무역국으로 변하고 있고 지금은 맹방이 된 미국이 과거에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허용했습니다.

미국 외교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김봉중 교수는 “카우보이들의 외교사”라는 책을 통해 대한민국이 일본에 늑탈당할 때 상황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루스벨트는 아시아에서 일본과 러시아 중 어느 한 나라가 독점적인 영향력을 차지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일전쟁에서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고, 루스벨트의 중재로 일본은 전쟁배상금 요구를 철회했으며, 그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지배권과 러시아 영향권에 있는 중국 항구와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차지했으며, 사할린의 반쪽을 이양 받았다. 한국 입장에서는 이 조약(포츠머스 조약)이 통한의 사건이 되었으나,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을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이렇게 강대국이 서로 자국의 이익에 따라 서로 거래하며 일본이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강탈할 때 조선의 지도층 인사들은 개화파, 수구파, 친일파, 친로파, 친청파로 나누어 자신의 지배권 확대에만 급급했습니다.

차기벽 교수는 “한국 민족주의의 이념과 실태”에서 당시 지도자들의 잘못에 대하여 네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민족 주체성의 결여와 고질화된 사대주의 근성을 들고 있습니다. 조선조 지도층의 일관된 사대주의는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즉위하기 전부터 친명책을 표방하여 오다가 즉위한 후로는 국호의 결정을 명나라 임금에게 청하여 “조선”으로 승인받았고 명나라에 조공 외교를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지도층은 국력을 길러 국가 주체성을 견지하기보다는 침략 세력에 기대어 자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태도로 일관하였다는 것입니다. 무력한 고종이나 순종은 말할 것도 없고 쇄국을 주장하던 대원군도 국민적 개혁은 못하고 결국 외세에 농락당했으며 민씨 일파나
김옥균 박영효같은 개화파 수구파 할 것 없이 모두 외세의존을 떠나서는 생각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당파싸움을 말합니다. 당파 싸움은 유교의 형식주의적 폐단과 토지 소유 관계를 기반으로 한 이해 충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당파 싸움은 국가적 발전보다는 개인의 사리 사욕을 우선하게 만들고 조선조 중기에는 국가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을 말살하여 버렸고 후기에 들어와서는 외국의 지배 세력에게 우리의 약점을 드러내어 침략을 쉽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자파의 세력유지를 위하여 외국 침략세력을 국내에 끌어들이는 죄과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국을 하게 된 강화도 조약의 체결도 민씨 일파의 시대 조류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대원군의 세력을 내몰려는 의도에서 나온 대외정책의 결과였고 임오군란 이후 청국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몰락한 민씨 일파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 나아가 민족 주체성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에 청국과 일본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조선조 지도층이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한말 지도층이 국제정세와 시대 조류에 대하여 너무 둔감했다고 합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물결이 여러 차례 밀어 닥쳤고 또 그들의 위협이 국가를 위태롭게 할 정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은 모화사상에만
젖어 있었기 때문에 선진국의 사정이나 국제 관계를 전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무너져 가는 왕권을 유지하는데 급급하였다는 것입니다. 국제정세를 읽기 위해 일본에 파송한 신사 유람단이나 중국에 보낸 시찰단 역시 결국 새로운 정쟁을 불러 일으켜 파쟁의
불씨만 키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한 말 지도층의 특징으로는 지도체계의 붕괴와 활력의 상실이라고 합니다. 조선조 중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봉건 지배체제의 최고 권력자인 왕이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존재에 불과하고 그 대신 외척의 세도정치나 섭정에 의하여 권력이 좌우되어 봉건권력의 지배체계가 붕괴되고 말았답니다. 그 결과 국내적으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정책의 수립이 어렵게 되고 국내적으로 그런 형편이니 대외관계에서도 왕을 둘러싼 각 파벌의 이해에 따라 정책이 좌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쟁만 일삼다 지리멸렬한 상태가 되었고 하급관리들은 기강의 해이로 부패가 극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국권을 찬탈당했을 때의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견토지쟁 (犬兎之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가 토끼를 뒤쫓다 둘 다 힘이 다하여 쓰러져 죽자 농부는 힘들이지 않고 횡재하였다는 말입니다. 교각살우(矯角殺牛)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의 뿔 모양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서로 싸우며 소탐대실의 과오를 범하지 말고 단결하여 “우리도 핵무기를 만들겠다”고 주장할 정도로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신앙인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지혜를 모을 때입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서 모세는 민족을 구할 수만 있다면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져도 좋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사야는 정의의 몰락이라는 위기에서 "나를 보내소서" 라고 기도했고,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심을 백성들이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며, 스데반은 맹목적 파당으로 인하여 죄악의 노예가 된 동족을 위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죽음 앞에서까지 기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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