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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생명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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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이수중앙교회 담임)

하늘에서 내린 빗물은 오랜 세월을 거쳐 땅 속으로 스며들면서 수정처럼 맑게 정화됩니다. 그러나 스며들기만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땅 속으로 스며들면서 정화된 물이 거꾸로 분출될 때에만 사람을 살리는 생수의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생수가 되려면 땅 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내면화 과정과 다시 밖으로 분출되는 외면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결여되든 빗물이 생수로 되살아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풀이나 나무도 먼저 땅 속에 씨를 심어야 합니다. 살아 있다면 반드시 땅 밖으로 움이 돋아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내면화와 외면화를 통해 생명이 잉태되고 성장하며 유지된다는 것은 모든 생명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외면화는 반드시 내면화의 깊이와 정비례합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생수 에비앙은 알프스의 눈 녹은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에비앙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15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처럼 장기간에 걸친 내면화의 결과로 생수가 된 에비앙이기에 세계적인 생수로 대접받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서부 유럽의 나무들은 조금만 강풍이 불면 거목들이 뿌리 채 뽑혀 쓰러져 버립니다. 서부 유럽 평지는 겨울에도 혹한이 없고, 일년 내내 비가 충분히 내립니다. 강풍이 거의 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나무가 자라기에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니 구태여 뿌리를 깊이, 넓게 뻗어내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강풍엔 속수무책인 이유입니다.

내면화와 외면화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법칙은 신앙생활, 영적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은혜, 성령의 은사를 심령 속에 받아들이는 내면화를 선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편 1편은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의 잎이 사시사철 푸르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렇게 신앙의 내면화는 반드시 외면화, 곧 삶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내면화가 깊을수록 그에 정비례해서, 더욱 건강하고 충실한 신앙의 외면화가 수반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내면화이며, 신앙의 내면화는 쉼 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는 그에게서 신앙의 내면화가 중단 없이 날마다 갈수록 더 깊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만일 바울이 자기 안에서 자기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내면화 없이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했다면, 그는 바리새인보다도 더 교만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본받으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모범이요 샘플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신앙의 내면화와 외면화가 일치되는 참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물론 신앙의 내면화가 먼저 이루어지고 외면화는 뒤따라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는 내면화가 근본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의 내면화의 핵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행 3:1~3)”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미문은 세계 최고의 고린도 황동으로 건축되어 화려하고 장엄하기 그지없었다고 합니다. 그 아름다운 미문 앞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걸인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 짓을 40년이나 했으니 참으로 가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자기 앞을 지나가고 있는 베드로 일행을 보고 평소에 하던 대로 적선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했습니다. 이 말을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형제여, 내겐 당신이 요구하는 은과 금은 없습니다. 그 대신 내게 있는 것이 있으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걸으시오.” 베드로, 그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지만, 그의 심령 속엔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똑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렇다면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임재해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내면화의 핵심입니다. 신앙의 내면화란 이미 내게 영으로 임재해 계시는 주님에 대해서 깨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의 내면화가 반드시 수반하는 신앙의 외면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내게 임하신 주님에 대해 깨어 있을 때, 나의 삶은 주님에 의해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까? 성전 미문 앞 베드로의 예를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달라진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행 3:3)” 베드로와 요한을 거지가 먼저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보고’로 쓰인 헬라어는 ‘에이도(to see)’입니다. 앉은뱅이는 그날이라고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타나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희멀건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며 적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우리를 놀라게 만듭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행 3:4)” 여기에서 주목했다는 말은 ‘아테니조(gaze)’, 곧 응시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신앙의 내면에 거하게 되자 베드로의 삶 속에 가장 먼저 나타난 외면화의 실체는 달라진 시선이었습니다. 내 속에 주님이 계시면 강하고 높은 자가 아니라 약하고 낮은 자, 나에게 도움이 되는 자가 아니라 내가 도와 주어야 할 자에게로 시선과 관심이 옮겨지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마주해야 할 사람에게로 나의 관심이 흘러간다면, 나는 내 속에 계신 주님과 그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달라진 시선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시선 그 자체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나은 사랑의 대화였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응시하면서 자신을 주목할 것을 요청했을 때, 앉은뱅이의 반응은 이전과는 아주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바라보거늘(행 3:5)” 여기에서 앉은뱅이가 사용한 바라본다는 말은 ‘에페코로( give attention)’로써, 온 시선을 집중시켜 보는 것을 뜻합니다. 거지는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반짝이며 베드로에게 기대감에 넘쳐 온 시선을 집중시킨 것입니다. 베드로가 거지의 손을 잡기 전에 이미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베드로의 시선을 통해서 앉은뱅이에게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눈과 마주친 앉은뱅이의 시선이 달라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눈은 무엇을 비추는 거울입니까?

나의 삶이 내 속에 임재해 계신 주님을 향하여 깨어 있을 때, 그 주님은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주십니까? 두번째는 ‘생명 바꾸기’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일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하루를 산다는 것은 그 하루 동안의 시간을 무엇인가와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매일 자기 욕망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갉아먹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욕망은 마치 물거품 같아서 아무리 자기 생명과 맞바꾸어도 소멸 이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스페인의 투우는 투우사들이 번갈아가며 흔드는 붉은 천을 향해 끊임없이 뛰어듭니다. 그 속에 작살과 창칼로 대변되는 죽음이 숨겨져 있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붉은 천이 단지 자기 감정을 건드리고 욕망을 자극한다고 해서 어리석은 소들은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붉은 천으로 뛰어들다가 끝내 목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저는 그날 TV를 통해서 단지 소의 마지막을 본 것이 아닙니다. 일평생을 허망한 욕망을 향해 뛰어드느라 귀한 자기 생명을 갉아먹다가 무덤 속에 내던져지는 어리석은 한 인간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 바꾸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앉은뱅이에게 폭포수처럼 쏟아부어 준 것입니다. 베드로 속에 계셨던 주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십자가상에서 자기 생명을 베드로의 생명과 바꾸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명 바꾸기를 꺼리거나 두려워합니다. 거기엔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 일방적으로 자기 손해만 수반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생명을 바꾸어 주는 자기 생명이 밝게 정화되고,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옹달샘의 물을 퍼내면 퍼낼수록 생수가 되고, 피를 나누어줄수록 헌혈자의 피가 더 맑아져 결과적으로 자신이 더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슈바이쳐 박사와 테레사 수녀를 보십시오. 생명 바꾸기는 타인을 위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생명의 가치를 극대화시켜 주는 지름길입니다. 그 동기의 원천이 이미 내 속에 임재해 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병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라는 말에서 붙잡다는 말은 헬라어 ‘크레테오’라는 동사로 주로 등 뒤에서 붙잡거나 껴안는 동작을 뜻합니다. 지금 성전에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함을 받은 앉은뱅이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저는 요즈음 주님의 등만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납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 내 무거운 인생의 짐을 져 주시는 주님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내 인생을, 내 인생의 짐을 져주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을진대,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타인의 짐을 져주는 넉넉한 등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은혜를 주셨을까?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 홀로 누리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져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홀로 누리다가 자기가 가진 많은 것으로 자신과 세상을 타락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그 일을 행하신 분은 내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고 주님을 증거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주님께서 서셨던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주님만을 증거한 베드로, 우리는 그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뜻과 영광을 더 높일 때에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와 자신의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등을 돌리게 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들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시 간디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의 실상이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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