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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님 나라의 존재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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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교의 핵심은 한 마디로 영혼의 구원이다. 그 구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갖추는 선행 조건이 바로 영혼 구원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종교는 끊임없이 영혼 구원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 나라는 언제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어릴 적 우리 어머니는 늘 “빨리 천국에 가야지!”하는 말을 자주 하곤 하셨다. 나는 어머니께서 습관적으로 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 천국은 틀림없이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적어도 그 곳은 가난한 우리 집 형편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덩달아 일곤 했다.
  어느 겨울날 그날도 양식이 넉넉지 못해 대충 죽으로 저녁을 때우고 잠자리에 들어서 잠이 들락 말락 한 순간인데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께서 “어서 천국에 가야지!”하는 읊조림을 들었다. 순간 나는 눈을 뜨고 어머니께 “그 천국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갑작스런 내 질문에 당황하신 어머니는 한동안 생각을 하시더니 “죽은 다음에 가는 저 하늘 위에 있는 좋은 나라”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 대답은 여간 실망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일찍 작고하시는 바람에 가난한 살림살이를 혼자 도맡아 하신 어머니의 탈출구는 자연스럽게 교회로 이어졌고, 매번 여름철과 겨울철 부흥회 때마다 단골처럼 등장하는 천국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어머니는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닌 저 피안 너머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천국이라는 곳에 기대감을 걸고 사셨던 것 같다. 그런 면으로 본다는 언제 다다를 지도 모르는 천국은 어머니의 삶에 힘을 주는 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철이 들며 천국의 시간성과 존재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정말 천국이 죽은 다음에라야 다다를 수 있다면 그 천국은 우리와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만일 천국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하등 상관없이 죽은 다음에야 이뤄지는 곳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천재지변이라든가 아니면 병이라도 들어서 어서 빨리 죽기를 기도해야 옳을 듯 하다. 그러면 경쟁 때문에 밤새워 일할 필요도 없고, 소문 때문에 마음 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며, 돌아오는 수표 때문에 동분서주해야할 일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기다감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다.
  천국의 선포는 예수의 지상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분은 어느 곳에서든지 기회가 닫는 대로“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직설적인 선포를 하셨다. 그 선포의 내용은 기득권자들에게는 재판관의 칼날 같은 언도와 같이 들렸고,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미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어진 하층민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이들에게 새로운 나라는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꿈에 부푼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자연스레 예수의 주위에는 당시의 상류층 보다는 하류층들이 주 종을 이뤘다.
  반대로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의 지배층에 속한 이들에게는 예수의 천국선포는 눈에 가시이며, 절대로 실현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자니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를 배척할 명분을 찾아야만 했다. 설사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이 예수를 따른다 해도 그들은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중장소 보다는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을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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