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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에 붙잡힌 사람 (행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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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붙잡힌 사람(사도행전 18:1-11)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이 아덴 선교에는, 적어도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데 실패를 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도 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당장은 믿지 않더라도 복음을 전했으니까 바울로서는 책임을 다했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받은 바 복음 즉 전해지는 복음이 언젠가는 여러 모로 결실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마는, 그러나 다른 도시에서와 같이 당장 눈앞에 교회를 세우고 떠나는 성공은 이루어지지 아니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는 고린도로 가게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지금 고린도에 와 있는데 아덴에서 되어진 일을 상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패의 악몽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한번 실패하고 보면 그로 인해서 사람이 위축됩니다. 그 상처는 오래갑니다. 그것 때문에 새로운 용기를 내는 데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실패라고 하는 것은 한 사건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일생과 미래를 다 그르치고 마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실패했습니다. 고린도에 와서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이 상관 관계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그가 아덴에서 왜 실패했습니까? 첫째는 그가 지식을 의지했어요. 본래 많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나 이 지식을 자꾸 드러내려고 하거든요. 도대체 바울에게는 지식이 장점도 되고 약점도 되는 것입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의 사람이 되었지마는, 스스로 자기의 모든 지식과 죄를 다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불쑥불쑥, 안다는 문제가 단호하거든요. 이것 때문에 실패하게 됩니다. 어쨌든 지식은 필요한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는 지식적인 방법이, 지식에 의지하는 마음이 완전히 씻어져야 하고, 불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늘 지식적인 것이 남아 있다가 헬라 철학의 본산인 아덴에 왔을 때에 그것이 불쑥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교는 결국 실패하게됩니다.
선교에 있어서 또 하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적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순수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께서 주신 방법대로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는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고 인간적 방법으로 시도했습니다. 시작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시작 한번 잘못된 것이 그만 전체를 그르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우상, 신상을 보면서 알지 못하고들 섬기는 그 신을 내가 알게 하겠다―이렇게 발상하고 이렇게 시작했다는 것이 잘못한 일입니다. 발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철학적 방법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종일 변론했고, 토론했고, 쟁론했습니다. 철학자들과 그렇게 쟁론했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말싸움을 해 가지고 전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전도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혹이라도 여러분이 누구에게 전도한다고 할 때에 절대로 말싸움을 벌이지 말 것입니다. 말로 이기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기든 지든 전도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건으로 시작하여야 되는데 십자가 사건을 맨 마지막으로 두었습니다. 이야기 다 하고 끝에 가서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는 얘기를 조금 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아덴전도에 실패하고 고린도에 왔습니다. 고린도에 와서는 아덴에서 실패한 후유증이 남아 있어서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큰 핍박이 있는 것도 아니요, 박해가 있는 것도 아내요, 어떤 저항도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약해집니다. 아주 심약해져서 복음 전할 용기를 잃어버리고, 성경을 보면 아주 비참해졌어요. 천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천막 만드는 일, 요새로 말하면 공장 지대에 가서 내가 이러저러한 기술이 있으니 좀 붙여달라고 해서, 한마디로 말하면 임시 취직을 해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자녀들에게 기술을 가르칩니다. 대단히 중요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랍비의 교훈에 따르면 아들에게 직업이나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참 중요한 얘기입니다. 천하든 귀하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아무 데 갖다놓아도 제밥벌이는 할 수 있을 만큼의 기술을 가르쳐야 됩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배워주지 않은 채 살도록 내버려두었다면 도둑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친 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 옳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학자입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배운 기술이 있습니다. 천막 만드는 기술이 있어서 그는 어디 가나 이것가지고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천막 만드는 기술에 대하여 얘기하느라면 제 아버지가 생각나요. 아버지는 옛날에 중국에도 다니셨다고 하는데 참 실질적인 분이었어요. 사람은 다 배워둬야 한다, 배워서 남 주나, 배워두면 어떤 때에 이렇게 필요하게 될는지 모른다-그래서 제게 가르쳐준 것이 있어요. 변변치 않은 것입니다. 시계 수선하는 것입니다. 시계 수선, 제가 잘해요. 피난 나와서도 시계 수선해주고 밥 얻어먹은 적이 있어요. 제가 처음으로 교회 시계 고장난 것 끌어내다가 수선을 하는데 얼마나 감격했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그 먼지 묻은 것을 털어다가 수선하려고 보니 뒤에 제 이름이 씌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곽선희 생일 기념'하고 씌어 있습디다. 그래서 아버지께 여쭈어보았더니 제가 태어나자마자 하도 즐겁고 기뻐서 시계를 사 걸었다고 하셔요. 그러니까 제 나이와 같이 가는 시계가 되지요. 저는 재봉 일도 할 줄 알아요. 그것도 배웠어요. 전기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그게 참 요긴하게 쓰입디다. 광산에 끌려가 고생을 할 때에도 거기서 시험을 봐 가지고 전기 기술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자유를 얻어 도망을 하게 되었고, 군대에 나와 가지고도 통신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찮은 기술자이지마는 그것 가지고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요즈음에는 마이크도 만지잖아요.
배워서 남 줍니까? 배워두어야 해요. 무엇이든지 많이 배워둘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제가 엔진에 대해서도 많이 배운 바가 있었는데 덕분에 요새 자동차 고치는 데에는 아주 능숙해요. 어릴 때에 배워둔 것입니다.
궂은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몸 아끼지 말고, 주변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르치고 배워야 돼요.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입니다. 상당한 종교인입니다. 철학자입니다.
그런 그가 천막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사실 귀한 직업이 못되었습니다. 가죽을 기워서 천막을 만들거든요. 옛날에는 가죽을 이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가죽을 만져야 됩니다. 목자들이 쓰는 천막, 여행할 때에 쓰는 천막, 캐러밴들이 쓰는 천막, 그리고 군인들이 쓰는 천막들이 있는데, 옛날에는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임시 주택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만드는 기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고린도에서 무난히 살 수 있었지요. 그게 중요해요. 여기서 한번 생각할 것은 바울이 어느 사이에 대 사도에서 평신도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full time으로 전도하던 사람이, 전도에 프로이던 사람이 이제 와서는 아마추어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전심전력으로 온 시간을 다 바쳐서 전도하던 사람이 이제는 part time으로 전도했어요. 시간으로 잠깐잠깐, 개인전도 하는 정도로 머물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들어가 전도했다 합니다. 그건 아니치 못한 것이지요. 안식일은 지키게 되고, 회당은 간 것이고, 그러니 복음을 전했어요. 이 정도 가지고는 바울답지 못해요. 일주일 내내 자나깨나 하루종일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딱하게도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천막 만드는 업에 붙어 있는 것도 그래요.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예요. 호구지책이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비참해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가 고린도서에서 고백한 말씀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의심을 합니다. 사도권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의심을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고린도에서는 사도권을 의심받았어요. 왜요? 초라하게 살았지 않아요? 처음부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나타났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천막 치는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 몇 사람씩 전도하고, 안식일이면 교회 가서 전도하겠다고 하니 천하게 볼 수밖에요. 그게 무슨 사도냐, 어떻게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이냐―이렇게 볼 수밖에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렇듯 사도권에 대하여 많은 도전을 받았고, 아울러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서에서 극구 변명합니다. '내가 사도'라고. 역시 그 변명은 부족합니다. 이유는 사도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좀더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참 솔직합니다. 내적 고민을 합니다. 외적으로 누가 때리던가 누가 가두던가 하는 문제 가지고는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는 어쩐지 심히 떨었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심리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로 아덴에서 실패한 기억이 줄곧 그 마음에 아프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막 만드는 직업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16장 3, 4절에 보면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이 사람들은 참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 바울을 위하여 일평생을 수고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로마로 간다고 할 때에 벌써 로마로 가 있어요. 그들은 본래 로마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다 추방할 때에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와 있다가 나중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로 갈 때에 에베소로 따라갔다가, 앞으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간다고 하니까 벌써 로마에 가 있어요.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 수차 갇혀 고생을 할 때에 사뭇 시중을 들었고, 마침내는 사도 바울처럼 순교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참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이사 다니면서 바울을 뒤에서 support한 평신도 지도자라 할 수 있어요. 그 아굴라, 브리스가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됩니다. 대단히 중요한 협력자입니다. 동역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여러분이 눈여겨볼 말씀은 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말씀에 붙잡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쉬네이게토 토 로고'라고 하는 이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말씀에 포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화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병이 재발을 했는지, 목이 쑤시고 아팠는지, 심령적으로 겪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 것인지…… 그러나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을 것이면 자기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지, 아니면 벌써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를 입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누가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아니하면 저주받을 것이라고 한다면 썩 좋은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폭군으로 만들어서야, 하나님께서 일 안 한다고 벼락을 치신다고, 그렇게 나쁜 분 만들어서야 되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느끼는 마음을 좋은 것입니다. 적어도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하니까, 어머니의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으니까 그 일을 위해서 나는 사는 것이고,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살아야 할 가치가 없고,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그는 믿었어요. 그 마음만은 중요한 것입니다. 저주하시는 하나님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기의 삶의 의미를 전적으로 여기에 두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고, 또 부득불 전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에게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붙들린 존재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일단 포로가 되고 말았으니 내게는 자유가 없어요. I have no choice. 선택권이 없어요. 가고, 오고, 먹고, 자고……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 필요하신 대로 나를 붙들어 쓰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를 이 세상에 두셨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내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게 자유가 있습니까? 철학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명무실(有名無實)―자유란 이름만 있을 뿐이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자유가 있었습니까? 오늘까지 산 것도 붙들려 산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을 사는 것도 주의 손에 붙들려 산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에 붙들려 살고 있었어요. 말씀을 위하여 살았어요.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 하십니다. 어떤 정치적 억압이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전해집니다. 누구를 통해서든 지 전해집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70년 동안 핍박을 했지마는, 1년에 100만 명을 숙청하면서 공산주의를 이루어보려고 했지마는 당찮았습니다. 러시아에 가서 보면 놀라운 것은, 그 핍박 속에서도 계속복음은 전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이나 북한은 40년이라고 하지만 러시아는 70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칠순 이하인 사람은 다 공산주의 하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절대로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사람들을 고용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제1호입니다. 가장 중요한 예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바울을 고용하고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자기를 포로하고 붙들어 자기를 통하여 역사하고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진 자유를 하나님께 다시 반납해버리세요. 내게는 자유가 없다고, 내게는 전혀 자유가 없다고 인정을 하세요. 그리고 출발하세요.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일을 아주 효과 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내가 이렇게 저렇게 자유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붙들린 지 오래다―그렇게 생각하고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에 붙들렸다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들어가 좀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패하고 고린도에 와서 지금 실의에 빠졌고, 울적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 심령이 어두운 가운데, 침체된 가운데 있는데 이제 동역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아주 오묘한 뜻이 있지요. 사람이 혼자 있다는 것 좋지 않아요. 그러면 울적해지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해요. 그런데 실라와 디모데가 돌아와 합류하게 됨으로 불이 붙었어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디모데 앞에서, 믿음의 아들 앞에서 나약해서야 되겠어요? 실라 앞에 그래도 되겠습니까? 서로 격려가 되어서 용기를 내게 된 줄 압니다. 여러분도 믿음이 잘 자라려면 처음 믿는 사람을 항상 인도하고 있어야 돼요. 이를테면 수요예배에 나올까 말까 하다가도 처음에 믿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인도하던 중이라면 그분을 인도하기 위해서라도 나와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다 보면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돕는 것입니다. 서로 권면 하게 되고, 서로 격려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오늘도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나오는 수도 있지마는 다른 사람의 권면으로 나오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권면하기 위해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구러 합해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바울에게 왔을 때에 합류하면서 용기를 얻었어요. 그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하니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에 둘 씩 둘 씩 파송 하셨어요. 서로서로 격려함을 얻도록, 힘을 얻도록 말입니다. 그러니까 독처 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신앙 생활도 독처 하는 것이 좋지 않아요. 함께 한다는 데서, 공동체의식 속에서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교역자로서 이런 생각을 해요. 꽤 심리학적인 얘기지만 여러분이 어느 교회에 갔다고 합시다. 교회가 장소가 없을 만큼 가득 차 있으면 찬송을 불러도 설교를 들어도 은혜가 돼요. 그러나 어쩌다가 여행 중에라도 가보니 썰렁하고 몇 사람만이 있어요. 그러면 죄송하지만 천사의 말을 해도 은혜가 안돼요.
something wrong―곡절이 있지 이렇게 안 모일 수가 있나 싶어요.
재미가 없어요. 음식점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보니 사람이 많아서 섰다가 앉아 먹어야 음식 맛이 있지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면 이 집장사다 했군 싶어서 앉아 먹어도 입맛이 없어요. 대단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에 보니 사도 바울이 유대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 사람들이 또 역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하고, 핍박하고, 훼방하니까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합니다.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내가 할 최선은 다했다는 것이지요. 내가 해야할 분야의 일은 다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해야 될 것은 전했다, 이제 남은 부분의 일은 당신 책임이다―그런 얘기가 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전해야 될 일, 수고해야 될 일에 대해서 한계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예기가 됩니다. 에스겔 3장에 보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이방사람들은 듣는데 왜 유대사람들이 믿지 않았는가―여러 번 말씀드립니다마는 역시 선지자의 고향 같은 마음, 이미 잘못된 편견, 지식이 바로 이 같은 일을 이루게 된 것이고, 또 시기 질투가 문제이며, 민족적 우월감이 문제입니다. 예수 믿는 것 좋지만 이방사람들하고 같이 믿는다는 것은 질색이에요. 예수를 믿어도 우대사람과 이방사람은 좀 달라야지요. 같아진다는 데 기분이 나빴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마음으로 인해서 복음마저 저버리는 불행을 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도 교회에 나오던 사람이든 처음 믿는 사람이든 간에 자기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런 신앙생활은 항상 문제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9절 말씀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결국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복음전파 하는 데는 결과에 대해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전하는 것뿐입니다. 전해서 효과가 있을까 이 사람이 믿을까 안 믿을까―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씨를 뿌리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대상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아하면 나보다 조금 못한 사람에게는 전하는 것이 쉬워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도 쉬워요. 그런데 고관들에게 전할 때에는 벌벌 떨어요. 나보다 지식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감히 내가 어떻게'하면서 뒤로 물러서요. 잘못된 일입니다. 복음 전파에는 남녀노소 지위 고하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다 죄인이므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어떤 이유로든 간에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내게 돌아올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요. 이렇게 복음 전함으로써 내가 얼마나 손해를 입게 되나, 핍박을 받게 되나, 이런 것도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결과도 두려워하지 말고, 대상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 자신에게 오는 피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 있게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오늘의 본문에 강조된 말씀은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하심입니다. 대단히 귀한 말씀입니다. 깊이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런 착각에 빠질 때가 있어요. 시원치 않은 사람이 뭘 안다고 다니며 예수를 전하노, 조용히 예수 믿는 사람의 본을 보이면 되는 거지―이런 벙어리 교인이 될 때가 있어요. 내가 행위로 전도 하겠다고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서 내 행위를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긴단 말입니까? 얼마나 교만합니까? 행위로도 본이 되어야겠지요. 그러나 내 행위가 거룩하고 깨끗해서 내 행위를 보고 모든 사람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문제인 것입니다. 건방진 생각입니다. 나도 허물이 있어요.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면 '너나 잘 믿어라'할지도 몰라요. 그런 말 들어도 좋아요. 그런 말들으면서도 복음을 전해야 돼요. '그래요. 나도 지금 애쓰는 중입니다. 좌우간 예수님을 믿읍시다'해야지 '날 따르라'한다면 나를 전하는 거지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까? 내가 거룩해진 다음에 입을 열겠다고 생각한다면 죽을 때까지 입 못 열고 말 것입니다. 전도 한 번도 못해볼 것입니다. '당신처럼 믿을 바에야 그만두겠어' '당신이나 제대로 믿어'―이런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복음을 전해야 돼요. 상관없어요. 잊지 말아야 됩니다. 벙어리 교인은 교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예수 믿고, 집사 장로 돼 가지고도 아직까지 누구보고 한번 '당신, 예수 믿으세요' 해보지 못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을 못해봤으면 진짜 교인이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오늘 분명히 말씀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Speak out.' 말하라고 했어요. 말해야 됩니다. 이 길로 나가서 당장 한번 말하세요. 버스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사람에게 한번 전도하세요. '예수 믿으세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어떤 때에는 자녀들에게도 그래요. 나도 제대로 못살면서 어떻게 믿음대로 살라고 말하나―그러다가는 한마디도 말을 못하고 말아요. 잘못된 일입니다. 부지런히 계속적으로 말을 해야 돼요.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씀이 본문에 있습니다.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직은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백성이 여기에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가 잠잠하면 구원을 받겠느냐―칼뱅의 예정론과 관계됩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다 정해져 있다면 다 믿게 될 건데 뭘 전도하느냐고 한다면 칼뱅의 대답은 '당신이 전도해서 믿도록'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전도한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만이 전도를 듣게 되어 있고, 또 전도 듣기 위해서, 하나님 백성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는 중요한 사명이 수반한다는 것을, 경륜이 거기에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내 백성이 많다'―그런고로 전도하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도성에 많습니다. 이 강남에 많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면 구원받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도성에 내 백성이 많을 것이니라 그런고로 너는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주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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