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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착한 양심 (딤전 0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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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읽어주신 말씀 가운데 19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 니라. 믿음과 착한 양심은 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비밀은 착한 양심에서만 가질 수가 있습니다. 연로한 사도 바울은 청년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우리 인생을 말하자면 넓은 바다를 항해하 는 배에다 비유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말씀했습니다.

항해하는 데는, 첫째로, 강한 추진력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 항해에는 믿음의 힘이 필요합니다. 믿 음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범사 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는 데는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과 믿음 없는 눈으 로 보는 것은 너무 다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마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서 하나 님의 허락하신 땅을 향해 40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지냈습니다. 이제 그 땅이 가까워진 것을 내 다보면서 그 땅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하여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한 사람씩 택해서 40일 간의 기한을 주면서 들어가 보고 돌아오면서 큰 포도송이를 꿰서 두 사람이 메고 왔습니다. 온 이스 라엘 사람들은 얼마나 기대를 가지고 약속의 땅에 다녀온 사람들의 보고를 듣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열 사람이 먼저 보고를 하는데 그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아름다운 석류와 이와 같은 포도가 열리는 곳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험하고 성곽이 견고하며 그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키가 장대한데 우리를 비교해 보면 메뚜기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땅을 점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망적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목을 놓아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지도자를 택하여 모시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처 보고하지 않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떠들썩한 군중을 안정시키면서 보고했습니 다. 조금 전에 보고한 분들이 보신 것이 맞습니다. 산이 높은 것도 사실이고 골짜기가 깊고 험 한 것도 사실이요, 성곽이 견고한 것도 사실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키가 큰 것 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희를 지키던 신은 이미 떠났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키가 크지만 저희 는 우리의 밥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기 로 허락하셨습니다.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고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 아갑시다 고 보고했습니다.

꼭 같은 기간 동안에 꼭 같은 것을 보았는데 무엇이 이처럼 완전히 다른 보고를 하게 했습니 까? 믿음의 차이입니다. 앞서 보고한 열 사람은 믿음 없는 눈으로 산이 높은 것과 골짜기가 깊 고 험한 것과 성곽이 견고한 것 그리고 거인이 장대한 것만 보고 두려워하고 겁이 나서 그 땅 을 점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고한 여호수아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높은 산과 깊고 험한 골짜 기, 견고한 성곽, 키가 장대한 사람들을 못 본 것이 아니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꼭 그대 로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믿음의 눈은 기적을 보기 때문입 니다. 이 말은 믿음으로 살면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으나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허락하신 새 땅에 들어가려면맘에 준비 다하여 힘써 일하세여호수아 본받아 앞으로 가세 우리 거할 처소는 주님 품일세 2. 시험 환난 당해도 낙심 말고서맘에 걱정 버리고 힘써 일하세 3. 앞서 가신 예수님 바라보면서모두 맘을 합하여 힘써 일하세 4. 일할 곳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담대하게 나가서 힘써 일하세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보나 믿음으로 보십시다. 무엇을 생각하나 믿음으로 생각하십시다. 무슨 일을 하나 믿음으로 합시다. 믿음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나의 삶 전부를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 내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 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두려움도 걱정도 염려나 근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 나님이 언제나 함께 해 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 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두려워 하지 아니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해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두 려워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 치고 행복하게 살며 무슨 일이든지 성취하는 사람 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온 이스라엘 군대가 오금을 못쓰고 벌벌 떨고 있는 블레셋 군대 골리앗 장군에 게 어떻게 도전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가 골리앗보다 키가 컸습니까? 무기가 우수했습니까? 전 쟁 경험이 많았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분명히 다윗은 골리앗에 비하면 비교 도 할 수 없는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있었 기 때문에 그처럼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너 골리앗 분명히 들으라. 전쟁에 이기는 것이 칼 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있는 것을 네게 보이겠다. 하면서 준비했던 물매에다 돌을 얹어 던지는데 그 광경을 생각만 해도 신이 납니다. 얼마나 담대합니까?

이것은 그의 믿 음 때문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골리앗의 도전에서 승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더구나 믿음으로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거 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인내합니다. 요셉이 뜻하지 않은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평한 적도 없고 실망이나 낙심하 지 아니하고 늠름하게 살았습니다.어떻게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 고 오히려 밤중에 하나님께 찬미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기적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 항해를 하려면 우선 믿음의 강한 추진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면 된다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로 정하고 힘있게 나아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암초에 부딪치는 불행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배의 방향을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착한 양 심입니다. 사람이 고귀하다고 하는 것은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Immanuel Kan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 별이 빛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속에는 도덕 의식 곧 양심이 있다 고 로마서 2장 15절에 보면 양심은 우리 마음에 새긴 율법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 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둔 것입니다. 양 심은 말하자면 마음의 법 입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에는 야심을 마음의 눈 이라고 했습니다.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양심을 마음의 등불 이라고 했습니다. 캄캄한 밤에 등불이 없으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어 어디로 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실 때 이 양 심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양심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은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심은 우리 인간의 도덕 생활에 있어서 말하자면 지나침의 역할을 합니다. 어느 것이 옳 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지나침은 언제나 남과 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착한 양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아 나아간다. 고 했습니다. 착한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반면에 착한 양심 은 우리가 그릇된 길로 나아가면 경고해 줍니다. 위험 신호를 보여 줍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려 할 때 누가 뭐라고 말하기 전 에 그들의 양심에 경고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할 때도 그의 양심이 이 사람은 무 죄한 사람이라 는 경고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던지 죄를 범할 때 그 양심의 경고가 없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마는 양심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릇된 길을 나아가게 되면 그래서 죄를 범하면 양심은 우리를 가책합니다. 책망합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하게 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전에 다윗이 죄를 범하고 괴롭던 상태를 시편 32편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 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죄를 범한 다음에 양심의 가책을 얼마나 받았는지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바싹바싹 타서 부스 러질 정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가룟 유다는 어두운 밤에 밖에 나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까? 그의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면 이렇게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책망합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양심의 소리를 듣고 바른 길을 갈 때 양심은 우리를 칭찬해 주고 우리에게 상을 줍니다. 청년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을 때 그 때문에 누명을 쓰고 애굽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 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요셉과 같이 하셨다 고 했습니다. 요셉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비록 요셉의 몸은 감옥에 있었 지마는 그 마음만은 자유롭고 평안했습니다. 왜요? 그 양심이 그를 칭찬해 주고 그들에게 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양심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살아 그 때문에 공연한 오해를 받고 감옥에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어려운 자리에 있지만 그들의 양심만은 자유롭고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양심이 그들을 칭찬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해 주고 잘못하려 할 때는 경고해 주고 잘못했을 때는 가책을 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는 칭찬해 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귀한 양심이지마는 잘못하면 병이 들 수가 있습니다. 디도서 1장 15 절에 보면, 우리의 양심이 더러워 질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를 범하게 되면 그 양심은 자연히 더러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선악의 분별이 희미해집니다. 도덕적인 판단이 흐려집니다. 그렇 게 되면 양심의 소리가 더욱 약해집니다.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어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무시해 버리면 그 양심은 더러워지고 맙니다. 더러워질 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 타락할 수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에, 그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 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아주 무감각해져서 말하자면 양심이 마비 상 태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처음에 잘못하면 그 마음이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계속 그런 죄를 범하면 불안한 것이 덜해지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면 아무런 가책도 없어지게 되고 맙니다. 양심이 그렇게 되면 모든 판단이 왜곡되어 버리고 맙니다. 양심의 판단이 거꾸로 됩니다. 좋 은 것이 나쁘게 보이고 나쁜 것이 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이렇게 되 면 그 인격이 완전히 파산되어 버리고 맙니다. 세상에서 못된 일은 이런 사람들이 다 저지릅니 다. 북한의 공산당들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북한의 공산당 뿐만은 아 닙니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 듣지 아니하면 누구나 다 이렇게 됩니다. 개인이나 정부나 마찬가 지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은 헤롯이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은 느브갓네 살 왕이 미쳐서 들짐승처럼 들에 나아가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양심의 소리 듣지 않은 아합왕과 이세벨이 어떻게 비참하게 죽은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양심의 소리 듣지 않은 독일의 나치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어떻게 망한 것을 우리가 기억 하고 있습니다.그들은 양심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교회의 지도자를 감옥에 가두고 죽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이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의 소리는 언제나 조용하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양심의 소리를 무시 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무시한다고 해도 별 것 없어 보입니다. 시끄럽게끔 구는 것들은 잡아넣 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옛날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 뜻을 따라야 할 터인데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종의 말을 듣기를 원치 않아 귀를 막고 있을 때 그래도 계속 외쳤습니다. 그때 마음이 굳어진 권력자는 정말 귀찮고 시끄러우니까 그를 결박해 서 구금했습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내가 무엇 때문에 이래야 되나? 의심도 생기고 잠잠하고 있 겠다 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고 했습 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계속 외쳤습니다. 돌아오라. 그리하면 이 민족이 산다 그러나 이스라 엘 백성과 정치 지도자들은 끝내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제 길로 가다가 결국은 불행하 게도 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양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 기 위해서 우리는 절대 양심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이 말씀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할 때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이미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버리 고 말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세요. 그는 양심의 소리대로 말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고생을 했고 결국은 헤 롯의 칼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어느 것이 의이고 어 느 것이 불의인 것을 밝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죽어서도 말합니다. 양심의 소 리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양심의 소리를 말하다가 감옥에도 갔고 생 명도 바쳤습니다. 사실 교회는 어느 때나 사회의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착한 양심,깨끗한 양심, 물들지 않는 양심의 구실을 감당하기 위해서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사람 편에, 권력 편에, 금력 편에 서면 안됩니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풍랑 만나 구원의 여망이 없어진 알렉산드리아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 쳤던 것처럼 외쳐야 합니다. 집권자는 기술과 경험만을 앞세우고 의욕을 가지고 전진만을 명령 하지만 매우 위험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모든 계획을 문질러 버리는 광풍이 있습니다. 여기 서는 교회의 바른 충고를 받아 드릴 아량이 필요합니다. 비록 그 소리가 미약해 보여도 시끄럽 게만 생각하지 말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배를 타고 있습 니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북쪽에서는 유라굴로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광풍이 밀어닥 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배의 지나침을 잘 보면서 조심스럽게 항해해야 합니다. 양심의 지나침을 무시하면 파선의 위험이 따릅니다. 우리는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국민의 소리 는 하나님의 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권자는 이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 니다. 개인이고 정부이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안 듣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간곡히 말씀드립니 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집시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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