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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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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기자는 누가입니다. 저작권에 대한 문제가 성서학에서 많이 취급되고 있습니다마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만큼 저자가 분명한 책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 바울의 2&8228;3차 전도여행에 동참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로마 호송에도 동행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감옥에 있던 기간이 57년에서 62년 사이이므로 사도행전의 기록 연대는 59년에서 64년 사이가 아닌가 추정됩니다. 사도행전은 누가의 두 번째 책으로 흔히들 누가복음의 후편이라고도 합니다. 누가복음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도행전이 중요성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복음됨의 성격을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목적이 바로 복음의 성격을 설명해주는 데 있는 까닭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사도행전은 전반에 걸쳐서 복음의 연결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많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에는 여기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에서 끝나고 부활에서 끝나고 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줍니다. 활기 넘치는 '후편'이 사도행전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복음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지던 사건이 이제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역사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 이제는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영적인 능력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목적에는 더욱 깊은 면이 있습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역사성을 지녀야 한다-사도행전은 이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역사적이어야 하고 사실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발견은 했다거나, 누군가 우리보고 해박하게 설명하거나 하는 추상적인 이치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합니다. 진리는 역사적이어야 합니다. 역사성을 지녀야 하고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사건이 사건화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전파되어야 하고 증거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건을 믿으면서 그 사건의 효력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그 진리의 생명성, 그 진리의 역사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특징입니다.
여기에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 되어 가는 것입니다. 줄기차게 만방으로 전해지고,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집니다.
그 진리로 말미암아 모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귀한 사실이 사도행전에서 시작됩니다.
보시는 대로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부딪치는 사건이 '오순절사건'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그 오순절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연결을 해서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가 너무 어렵게 설명되어서도 안되겠습니다 마는 너무 쉽게만 이해하려 들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절 없는 오순절은 신비주의에 빠집니다. 주관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가하면 오순절 없는 부활절은 객관성에 치우치게 되어 결국은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절과 오순절을 함께 해석해야만 합니다. 부활절 없는 오순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순절 없는 부활절 역시 어떤 역사도 이룰 수 없습니다. 두 사건을 함께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기독교의 진리가 확고하게 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중요성이 이에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내용은 그 초점이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십자가와 부활-이 엄연한 사건, 소중한 사건이 이제 오순절을 통해서 증거 되고, 오순절을 통해서 믿어집니다. 그리고 오순절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과 오순절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어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부활사건이 신앙사건으로 화하기까지에 오순절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역사가 있고야 부활사건이 신앙사건으로 바꾸어지고, 그렇게 될 때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를 해보면 어느 교회에서나 모든 교리를 고루고루 전합니다마는 그 중심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로 '십자가'에 역점을 둡니다.
러시아의 그리스정교 쪽에서는 '부활'에 더 역점을 둡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령의 문제, 오순절에 더 역점을 두는 편입니다. 이렇듯 각각 특정이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목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게는 큰 수수께끼가 하나 있습니다. 정작 유대사람들은 왜 예수를 믿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이유를 유대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유대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철저하게 핍박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누이 이같은 사실을 증거 합니다. 얼마나 끈질긴고 하니 남의 동네에까지 따라가서 핍박할 정도였습니다. 제 돈 써가면서 훼방합니다. 사도 바울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까지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까지 가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살리러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죽이러 갔던 것입니다. 그토록 극성스럽고 악착같았던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의 예수 믿는 것을 그렇듯 핍박함으로 기독교는 이방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사람들이 기독교를 그렇듯 핍박한 데에는 하나님의 보다 높으신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기독교가 고스란히 수용되고 말았다면 아마도 기독교는 땅 끝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핍박과 환난이라는 것이 기독교를 멀리 흩어지게 했고, 온 세계로 전해지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입니다. 기독교가 땅 끝까지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핍박을 통해서였습니다. 핍박이라는 것에 실려서 기독교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에서 환난과 핍박을 결코 배제할 수 없습니다. 환난과 핍박은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시초부터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아주 놀라운 선교적 역사 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세계성을 일깨워줍니다. 복음은 결코 예루살렘에만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기까지는 숱하게 이방종교에 부딪히고, 이방철학에 부딪히고, 이방문화에 부딪힙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변증을 해나갔느냐 하는 귀중한 방법을, 그 비결을, 그 생명적 역사를 사도행전은 누누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복음이 전파될 때에 그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교는 우리종교요 기독교는 서양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무식한 생각은 없습니다. 불교가 인도종교지 어떻게 우리종교입니까?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만, 사실 불경은 인도말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인도말로 된 불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된 불경을 봅디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오리지날은 아닌 것입니다. 불경은 인도말로 되어야 합니다. 원래 석가모니가 인도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불교도 국산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교는 서양종교요 불교는 우리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무식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릇 종교가 온 세계로 확장해나가면서 그 나라의 문화에 부딪히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이방철학, 이방종교, 이방문화와 만나게 될 때에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해답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전파에 더없이 귀중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배워야 할 또 한가지는 교회론입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비롯된 바로 그 무렵에 기록된 것이니까요. '오순절 교회''초대교회'-교회의 오리지날입니다. 아주 근원적인 맨 처음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교회의 생생한 모습이 있고 본질이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선교가 무엇인지,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선교되기 위한 증거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행전'이요 '복음행전'이요 '성령행전'이라고 결론지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말씀하고 있는 메시지의 요점은 무엇인가-간단하게 한번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메시지의 첫번째 요점은 '교회의 의미'입니다. 교회의 전신은 히브리사람들의 회당입니다. 그리고 회당의 뿌리는 선민사상에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을 통해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역사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민사상을 모아놓은 공동체가 바로 그들이 말하는 '공회당'입니다. 공회당이 그들의 공동체요 교회의 전신입니다. 이제 기독교로 오면서 교회가 생겨나는데, 그 의미를 선민사상에서 찾습니다. 거기에 뿌리를 둡니다. '교회'가 진짜 선민이요 유대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그림자에, 예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이 교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림자로, 예표로, prototype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진짜(reality)는 바로 교회다, 교회가 원점이다, 참 승리자는 그리스도인이다, 참 하나님의 백성은 교인이다-이렇게 설명되는 것입니다. 선민으로 택함 받은 교회-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하나님나라와의 관계, 이 오묘한 이치를 사도행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소 어렵더라도 정신차려서 이해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의 두 번째 요점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오순절의 주제이니까요.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고, 성령을 어떻게 받았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사건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데서부터 성령은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깨닫는 기독교의 교리는 철학이 아니요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능력입니다.
간혹 보면 밤낮 성경책 붙들고 앉아서 성경공부 한다고 하면서도 말만 많이 늘어놓을 뿐, 자기 하나 중생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없는 성경공부는 사람을 못쓰게 만들뿐입니다. 교만하게 만들뿐입니다. 성령이 반드시 함께 하여야 합니다. 지식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것은 철학에 불과합니다. 추상적 이론에 불과합니다. 성령을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능력이라 하심입니다. 도대체 무슨 능력입니까? 죄를 이기는 능력이요 사망을 이기는 능력이요 뭇 시험을 다 이기는 능력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곧 능력인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령 스스로가 고용하시고 역사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교용 하셔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 점을 설명하는 것도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사람을 고용하십니다. 사람을 붙드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이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령께 이끌려가고 이끌려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여십니다. 성령께서 마음 문을 여시지 않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마음 문을 여심으로 생전처음 만난 사람에게 딱 한마디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도 그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바로 그곳에 교회가 섭니다.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사람, 인간의 언어, 인간의 문화까지도 다 고용하십니다. employ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간혹 내가 성령을 받아서 내 마음대로 역사 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를 고용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대단히 깊고 큰 진리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우리는 성령께 이끌리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은혜적인 것이요, 은사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로 후자를 말씀합니다. 은사적인 성령의 역사가 바로 사도행전이 말씀하는 메시지의 주제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의 세 번째 메시지라 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입니다. 교회의 연합성입니다.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사도신경)을 보십시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령과 교회를 하나로 연결합니다. 성령론 안에 교회론이 있고, 교회론 안에 성령론이 있습니다. 성령과 거룩한 공회가 하나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의 교회나 예루살렘의 교회나, 오늘의 교회나 내일의 교회나, 교회는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의 교회를 말씀합니다. 분명히 그 뿌리가 하나입니다. 거룩한 하나의 교회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말씀하는 주제입니다. 도처에 교회가 있고 여러 모양의 교회가 있습니다마는, 결국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줍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데오빌로여'하고 시작합니다. '데오빌로(Theophilus)'는 '데오스'라는 말과 '필로'라는 말이 합해진 것으로, 전자는 '하나님'을, 후자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데오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말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이 '데오빌로'는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정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고 사료됩니다. 그 사람을 상대로 기독교의 교리를 변증하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라고 변증하기 위하여 데오빌로에게 헌정된 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여기에 변증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데오빌로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교육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 편지는 데오빌로를 대상으로 삼아 썼달 뿐, 그실은 모든 교회가, 모든 교인이 읽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의 편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1-3절)……'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사실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하여,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이십니다.
몸소 행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사실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로 기독교의 교리가 전파될 때에 너무나도 오묘하고 놀라운 역사이기에 예수님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을 비롯하여 증인들이 누구할 것 없이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행하시며 가르치시며 고난 당하시며 부활하시며 승천하시며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시며, 나아가 성령을 약속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요, 예수님 그분이 바로 복음이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뿌리다-누가는 이 한마디로 누가복음을 요약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이 한마디로 요약하고 나서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使徒)가 어떤 인물입니까? 본문말씀에 나타난 대로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하신 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택하심으로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택하시고 세우십니다. 선택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 스스로를 나타내십니다. 특별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몸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계시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명령과 더불어 약속을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명령과 성령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권에 대하여는 뒤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본문에 나타난 명령을 보십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성령을 기다리라'-두 가지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왜입니까? 사실 예수님의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고향이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선생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머물고 싶겠습니까? 하루도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갈릴리로 가버립니다. 다시 옛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도 물고기를 잡으로 갈릴리로 가버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안 계신 예루살렘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한번 고향을 떠났으면 이제는 다른 길을 가라, 이제는 널리 세계로 나아갈 것이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그 동안은 육신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영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안 계시다고 해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경망스러운 짓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을 기다리라,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기다림, 이 대망(大望)이 곧 신앙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연결해서 생각해야 할 매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과 한번 비교하여 보십시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 24:49)'-문맥만 조금 다를 뿐, 내용은 똑같습니다.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다 똑같이 누가의 기록이니까요. 누가복음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시작이 같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이 성에 유하라 말씀하신 뒤에 이어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을 연결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까지는 떠나지 말라, 성령의 지시를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에서 한발도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머물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까지는 아무 일도 경망 되이 결정하지 말 것입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일생을 좌우하는 문제를 놓고 그 당장에 결정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단 며칠이라도 돌아가서 기도해보고 오라고 당부합니다. 성령께 여유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판단하고 좋다 싶으면 당장 그 자리에서 결정해버리려고 하는데, 그것은 실수가 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느 때에는 많이 생각하다가도 정작 일생을 좌우하는, 이를테면 결혼 같은 문제는 당장에 결정을 해버리고 맙니다. 자기 혼자 생각해서 좋은 사람이다 싶으면 앞뒤 재지 않고 결혼해버립니다. 엄청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기도도 없이 결정해버립니다. 그리고 나서는 울고불고 합니다.
제일 많이 기도해야 할 일을 두고 잠시의 기도조차 없이 당장에 결정해버립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이든지 당장에는 결정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성령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위로부터 입히울 때까지 성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는 절대로 요동하지 말라 하심입니다. 아무 판단도 하지 말고, 어디 갈 생각도 하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마가의 다락방,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식을 치르셨던 그 다락방에 예수님의 체취가 배어 있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얼굴이 비쳤던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 당신의 영이 그들을 인도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고, 증인이 되고,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언되었던 약속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다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져 저들이 성령을 받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역하여 교회를 세웁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교회는 제자들이 세워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뿌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이 저들을 고용하시어 이같은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5절).'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심을 받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히 붙들림을 받음입니다. 그럼으로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곧 성령의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여 우리들을 붙드실 때까지, 이 엄청난 복음의 사역 안에 우리들을 이끌고 나가실 때까지는 절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오늘도 이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기 있고 교회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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