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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라 (계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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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을 매개로 해서 우리들에게 드러내 보여준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보여주신 것을 예수님이 그의 종들에게 보여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1절 후반부의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하나님과 우리들의 소통이 직접 이루어질 수는 없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금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실 수는 없습니다. 그대신 그의 천사를 보내주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그의 영을 요한에게 보내어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종'이란 단어는 히랍어로 '둘로스'(Dulos)입니다. 이 단어는 '노예'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중 드는 사람' 즉 '하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야곱이, 모세가 주의 종이었습니다. 또 여호수아도, 엘리야도, 이사야도, 다윗도 모두 하나님의 종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성직자가 주의 종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의미는 좀 더 넓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하나님의 임무를 수행하는 측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아니,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임무를 수행하는 조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요한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나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이 신비로 감추어진 난해한 책이라는 그동안의 통념을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진리의 말씀이 넘치는 은혜로운 책이라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 줍니다.
 
폭죽처럼 터지는 축복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3절의 말씀은 요한계시록이 나타나는 7가지 복 중의 첫번째 것입니다. 여기에서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은 복수로 쓰면서도 '읽는 자'는 유독 단수로 표현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 당시 회당에서 가장 신앙이 깊은 사람 7명을 뽑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오늘날의 봉독자와 같은 역할입니다. 그런 전통 때문에 '읽는 자'는 단수로 씌인 것입니다. 요한은 그의 증거가 담긴 편지를 회중 앞에서 읽고 있을 그 봉독자에게 복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번역상 원문이 꾀하려 했던 박진감이 결여된 느낌이 듭니다. 이 구절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행해서 지키는 자들에게는 더욱 더 큰 복이 있으리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읽으면 훨씬 은혜로울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마치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영상화 되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철썩'하고 봉독자에게 부딪칩니다. 곧 이어 더욱 강한 축복의 포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쏟아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산더미 같은 축복의 파도가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몰려와 폭죽처럼 터지면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찬란히 선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축복의 말씀을 쏟고 나서 그 편지를 읽게 될 일곱 교회의 교인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인사는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행해지던 인사법이었습니다. 그것을 읽는 일곱 교회의 교인들은 유배지에서 모진 고생을 겪으면서도 승리의 삶을 살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분'(5절)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라는 대목은 원문에서 현재형으로 씌어 있습니다. 과거에 사랑하셨던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의 죄대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의 죽으심으로, 그의 피로써 용서하시며 새롭게 해 주시는 구속의 주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속성이 전제된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요한계시록은 심판을 예고하고 두렵기만 한 책은 아닐 것입니다.
 
기다림은 삶의 최소공약수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낙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7절).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의 주제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묘사는 예수님의 재림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사람이 보고 맞이하게 될 우주적인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을 못박았던 그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땅에 있는 모든 족속' 즉 죄적이며 속된 인간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자들 모두가 그것을 보고 슬피 울게 된다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망과 낭패함을 안겨주는 위협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 신앙인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그 날이 확실히 올 것을 알기에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희곡작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현대인의 고뇌를 가장 극명하게 그려준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어느 시골길의 고목 밑에서 두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고도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음날을 기다리며 돌아갑니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소년이 나타나 말합니다. '아저씨들, 오늘도 고도는 오지 않을거래요. 내일 올거래요'라고. 그리고 작품은 끝납니다.
 
도대체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누구입니까? 그는 언제 오는 것입니까? 왜 그들은 고도를 기다립니까? 이런 질문들이 사람들의 영혼 깊숙한 곳을 찌르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발표되고 난 후 사람들은 고도가 누구인가에 대해 저마다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고도의 실체는 사람들에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들에게는 신(神)일지 모릅니다. 어느 사람에게는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좀처럼 대답을 거부하던 작가는 어느날 '인간의 기대치의 허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가운데 삶이 엮어지고 기다림 속에 삶은 다시 떠오릅니다. 삶을 유지시키는 최소공약수가 바로 고도라는 것을 그 작품은 묵시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인에게 고도는 분명한 존재입니다. 그는 바로 그날,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희랍어 알파벳의 맨 처음 글자와 맨 나중 글자를 말하듯 하나님은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일 뿐 아니라 전 역사를 주관하시는 실재적인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있게 하셨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약속은 우리들 심령의 양식이 되고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을 줍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일곱은 하늘과 땅을 합한 수
 
1장 10절부터 16절까지는 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 여러가지로 주석을 붙이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아무런 사적인 견해를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이 대목을 영상화하면서 그 모습의 위엄과 찬란함에 사도 요한처럼 압도당할 뿐입니다.
 
이다만 이 구절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입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1장에서만 10번(4,11,12,16,20절)이나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전체에 걸쳐 일곱이란 숫자는 자주 나옵니다. 결국 이 숫자는 뒤에 나오는 다른 많은 숫자들을 풀어나가게 하는 열쇠가 됩니다.
 
사도 요한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자주 쓴 것은 예로부터 일곱이라는 수를 완전수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수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3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늘의 수입니다. 또한 4는 이 세상의 수입니다. 왜냐하면 땅에는 동,서,남,북의 사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수 3과 땅의 수 4가 합쳐진 7은 완전한 수라고 여겨진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기 때문에 7을 완전수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으로 볼때 6은 사탄의 수입니다. 7에서 1을 빼내어 7을 망가뜨린 수이기 때문입니다. 8은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말합니다. 7을 주기로 볼 때 7을 끝내고 새로 시작하는 수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꿰뚫는 새로운 관계 도입
 
요한계시록을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이 시간과 공간에 붙잡혀 있는 2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2차원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고 있는 3차원적인 세계에는 몰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시간을 의식하며 삽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동물들은 그날 그날의 충동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시간 의식이 없습니다. 신적 존재에게도 영원한 나날이 있어서 별반 그 시간에 대해 한계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 분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의식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시간'을 말씀으로 전개해 주고 있습니다. 시간을 확장시키면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의식은 곧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려 할 때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자리(공간)에 연연해하는 존재입니다. 과장 자리, 부장 자리, 자리 때문에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은 그 시간을 넘어서고 그 공간을 넘어설 때 비로소 구원의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길이 보입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신비의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한 시공(時空)의 인정을 통해 그 속에서 새로운 관계 도입을 할 때 그 길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시간과 공간을 꿰뚫는 공통분모는 '간(間)' 곧 '사이'에 있습니다. 그 사이는 관계 형성입니다. 인간(人間)은 관계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도입이 곧 신앙입니다. 나와 너와의 진정한 관계가 사랑입니다. 우리와 너희와의 편안한 관계가 평화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풀어놓아 우리로 하여금 서로 잘 어울리게 하신 그 관계 개선이 구원 곧 자유입니다.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윗 사람과 아랫 사람, 많이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정의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 관계 개선의 길을 찾을 때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시공을 꿰뚫는 새로운 관계 도입의 체험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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