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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기둥들 (갈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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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기관들은 다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그 안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국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몇 사람의 똑똑한 사람이 국가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집단이 때로는 더 강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국가나 회사에서는 엘리트들을 키우려고 하고 그들을 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국가나 회사처럼 몇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함께 이루어 나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소중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우리 평강교회가 구성되고 또 우리 교회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여러분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다수가 참여하여 움직이는데 모두가 다 기둥 같은 일군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둥 같은 일군들의 헌신과 모범으로 인하여 이루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기둥 같은 인물들이 있을 때에 우리 교회는 알차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기둥 같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지탱되었고, 그들에 의해서 부흥되었으며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그 무서운 박해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자신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자신과 교제의 악수를 한 인물들을 말씀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원래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사도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바나바에 의해서 사도들에게 소개가 되고 함께 악수를 나누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그룹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 똑같은 열정으로 일을 했습니다. 이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다른 대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일치 여부를 확인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제 완전히 교제의 악수를 함으로 교회의 기둥들이 이렇게 하나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본문입니다.

여기에서 악수를 한 사람이 모두 다섯 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들 모두를 가르켜서 '기둥같이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탈무드에서 기둥(스튈로이)은 원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이스라엘의 세 기둥(암무딤)이라 불렀습니다. 아마도 이 개념을 원용하여 바울이 본문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만을 '기둥같이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을 위한 사역자인 바울과 바나바도 기둥같은 일군들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는 초대교회를 지탱하고 버티고 있던 다섯 사람의 귀중한 교회의 기둥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바울과 바나바'가 바로 초대교회의 기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는 기둥들이었습니다. 이 다섯분이 다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나는 우리 교회에 어떠한 기둥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말씀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기둥으로서 교회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생각하면 각오를 다지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기도의 기둥 / 야고보
먼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야고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야고보는 여러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요한의 동생 야고보와 예수님의 제자 중 또 한 사람인 야고보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동생 야고보는 행12:1-2에서 '헤롯왕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 야고보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것을 끝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기록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보는 것이 아마도 가장 무난할 것입니다. 바울은 1:19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야고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행12장에서 야고보가 중요한 직책에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헤롯은 베드로를 유월절이 지나면 죽이기 위하여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구해 주게 됩니다. 행12:17에서 보면 베드로는 자신이 천사의 도움으로 옥에서 나오자마자 마가의 다락방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야고보는 이미 단순하게 예수를 믿는 한 사람이 아니라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추측을하게 합니다. 그 증거는 행15장에서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열릴 때에 야고보는 당당하게 의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행15:13에서 야고보가 최종적인 결론의 말을 하고 회의는 폐막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행21:18에서도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고 기록함으로 야고보는 오랫동안 예루살렘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이 야고보의 이름을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보다 앞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해서 야고보를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교회는 처음부터 세습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순수성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자격에는 야고보의 기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낙타 무릎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야고보는 성의 높은 곳으로 끌려가서 성밑으로 내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 밑으로 내 버려진 야고보는 성 절벽 저 밑에서 엎드러져 죽은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장사를 하기 위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야고보는 거기에서도 무릎을 꿇고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기도를 많이 함으로 그가 성에서 떨어져서도 '낙타 무릎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단단하게 연단된 무릎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야고보는 약5장에서 기도의 위력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약5:13-14에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하거나 병중에 있을 때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위경에서 건져주시며 그 어떠한 병에서도 고쳐주심을 분명히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5:15-16에서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이론적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동생이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이 말씀 속에는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것이니다. 그는 기도의 산 증인이었고, 체험자였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기둥이 없는 교회는 힘도 없고 쓰러지는 교회일 뿐입니다. 일하는 사람보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야 교회는 부흥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시간이 나기만 하면 언제나 기도하시고, 또 아무리 바쁘고 분주해도 일부러 시간을 할애해서라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기도 외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기도하는 교회만이 살았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여지없이 사그러 들었습니다. 생활로 어렵다고 기도하기를 포기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포기하실지 모릅니다. 우리교회가 중보기도하는 모임들이 생기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목표 중 하나가 '민족과 세계의 파수군'입니다.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기도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기도하는 기둥이 되어 교회의 기도실이 날마다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기도회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룰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골방마다 기도소리가 울려 퍼질 때에 교회는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기도의 기둥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2) 믿음의 기둥 / 베드로
본문에서 두 번째의 기둥은 게바라는 분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모두 아홉 번에 결쳐 베드로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번을 '게바'라고 부릅니다(14절; 1:18; 고전 1:12; 3:22; 9:5; 15:5). 베드로는 믿음의 기둥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로서 밤이 &47583;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낙심하여 그물을 챙기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눅5:4에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이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목수일이라면 몰라도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완전히 선생인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입니다'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와같이 주님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실 때에 자신도 주님을 의지하면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물위를 걸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했을 때입니다. 에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모두가 들은 이야기를 한마디씩 하게 되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와같이 베드로는 믿음에 출중한 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기둥으로서 오순절 이후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예수를 전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잡아다가 가두고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워두고는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함을 말하게 됩니다. 행4장을 보십시오. 그러자 그들이 이제는 제자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외칩니다.

또 행5장에서는 또 다시 잡혀가서는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라고 말을 하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을 합니다. 대단히 담대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정말 이렇게 할 상황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 기독교는 이단으로 몰려서 유대교인들에게 당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초대교회를 훌륭하게 이끌어 갔습니다.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을 보임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정말 초대교회의 믿음의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말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우리는 믿음의 기둥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믿음이 식어지리라'고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정말 우리들은 그 동안 2000년이 되면 세상 종말이 온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신념은 다릅니다. 믿음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지만 신념은 자기 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눅5:4에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을 때에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라야 힘이 있습니다. 자기 확신은 흔들릴 때에 그 기준이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견고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매사에 믿음으로 행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적극적 사고방식의 신앙(노만 반센트 필이나 로버트 쉴러와 같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스라엘에게 내 귀에 들린대로 시행하겠다고 말씀하시고서 그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말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못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못한다고 말하면 나만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도 못하게 가로 막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루어 진 것을 보십시오. 모두 믿음으로 행한 결과가 아닙니까? 12월 26일에 우리는 저희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에 어떤 권사님께서 1000만원을 약속하시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렇게 50평이나 되는 교회를 얻어서 들어왔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계약을 하고 오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거의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감사합니다. 모두가 다 협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예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일한 결과입니다.

믿음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다른 그 어떠한 것도 믿음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기둥이 되어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으로 담대하게 승리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믿음의 기둥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믿음으로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기도의 기둥, 믿음이 기둥들이 되어 우리 교회를 든든하게 하고, 우리 가정을, 우리 사회를 건강하고 소망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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