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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롭게 되는 유일의 길 (갈 0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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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들이 내 세웠던 가장 위대한 교리중 하나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입니다.
(Sola fide) 이는 굉장히 중요한 교리로서,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환영을 받게 되는 길이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 교리에 기독교사상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 교리야말로,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가짜가 아닌, 진정한 성도가 되기 위해선, 바로 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달고 있어야만 합니다. '의롭게 되다'는 단어는 법정에서 빌려 온 법적인 단어로서, 이는 '정죄'의 반대어입니다.

법정에서 어떤 사람의 유죄를 선언할 때, 그것을 '정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 반대로, 어떤 사람이 죄 없고 순결하고 바르다고 선언하는 것을 가지고, '의롭게 되다' 즉 '칭의'라는 단어를 썼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법정에서의 단어를 가지고,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 대하여 심판을 하신다고 보고, 그 재판정에서 '정죄'와 '의로움'을 선언하는 기준이 그 사람이 살아온 생애의 어떤 행동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믿음'을 보시고, '정죄'와 '의로움'의 기준을 삼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권력에 아부하는 검사와 판사가 있다고 하십시다. 어떤 사건을 맡아서 판결하게 되었는데, 외부의 권력기관에서 압력이 온 것입니다. 그 사람을 무죄로 만들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검사와 판사가 그 사람을 무죄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맡은 판검사는 피고가 저지른 행위를 보고 판결한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압력에 따라 판결을 한 것입니다.

이런 판결은 분명 옳지 못한 판결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대하여 판결을 하시는데, 사람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냐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죄 없다'고 판결하시겠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불합리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큰 죄인, 작은 죄인 가릴 것 없이 그 행위를 보지 아니하시고, 믿음만을 보시겠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눈으로 볼 때에, 지극히 부당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불합리하신 분이 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당하게 보이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지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인간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두가 죄인으로 선언 받고,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뜻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행위가 아닌 다른 방법을 만들어 내셨으니, 우리의 죄 값을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불하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값이 이미 지불되었기에, '의롭다'고 선언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을 때, 발생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이런 주장을 하는 엉터리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하여 졌기에, 이제부터는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삶을 살아도 된다는 식의 주장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점을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자유방임주의, 도덕과 윤리가 필요 없다고 하는 도덕해체주의자가 되어서, 예수를 믿기 전보다 더 형편없이 죄짓는 삶을 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만 가지곤 안되고, 율법도 지키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하여 바울은 두가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라면, 결코 우리를 더욱 더 심한 죄인되게 하시는 말씀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길을 걷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깊이 죄짓는 생활을 하게 만든다면,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깊은 죄, 거리낌없이 죄짓는 사람이 되게 만드신 것인데, 예수님이 과연 그런분이시냐,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는데,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고,
진리의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죄인이 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그같은 주장은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2) 두번째로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는 새 사람이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함께 사시기에, 결코 예전의 죄인 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되었다고 했을 때, 막연하게 우리가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순간, 우리 안에는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게 됩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1:12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동격입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예전에 내가 아닙니다. 우리는 옛날 모습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되어 한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코 예전의 총각, 처녀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부부가 되어 살면서도, 서로 총각고 처녀시절처럼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헤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헤어진다고 해도, 옛날의 처녀, 총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혼남과 이혼녀가 되겠지요. 예전과 달라진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예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됩니다. 분명 그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집에 강아지가 한 마리가 더 들어와도, 집안이 바뀌게 됩니다. 사람이 새로 들어오면, 당연히 바뀝니다. 당신이 우리의 마음과 가정에 들어오면, 얼마나 바뀌겠습니까?

예전의 죄인된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해서, 결코 죄짓는 삶, 행도을 마음대로 하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3)세번째로 바울은 거듭난 성도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하는 열망과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열망 때문에, 그는 율법의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죄짓는 사람이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나게 되면, 새사람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새로운 소망이 생겨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하는 소망과 꿈입니다.

해바라기라는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은 해만 바라보며 꽃을 피우는 식물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기 위하여, 율법에 대하여선 죽은 존재가 되었다. 사실, 바울은 율법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이 그의 사랑이었고, 그의 소망이었고, 그의 인생 전부였습니다. 않으나 서나 율법이었고, 자나, 깨나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말합니다. 나는 율법에 대하여 이제 죽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제 더 이상 율법은 내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가 그렇게 변했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의 초점은 하나님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 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결코 죄인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때문에, 행위는 어떠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연약하기 때문에 시험에 빠질 때도 있고, 죄의 유혹에 넘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에 거하시는 한, 그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곧 그 죄와 유혹에서 벗어날 것이고, 진리의 길을 향하여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거듭나, 새사람이 된 성도는 결코 이전의 죄악된 생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하는 소망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행위는 문제가 안된다는 복음 때문에, 죄된 생활에 더욱 더 빠지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된 복음의 진리 속에 들어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거듭난 사람,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는 성도가 아닙니다.

바클레이는 크리스챤의 삶에 두가지의 중대한 유혹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유혹은 우리 모두에게 지금도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 보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므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받아야 하고, 받을 것이며, 또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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