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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히스기야에게 찾아 온 위기 / 사 38:1-8, 히 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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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에게 찾아 온 위기
( 사38:1-8, 히4:14-16 )

 
우리 나라가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아주 익숙해진 말이 있습니다. "위기관리"라는 말입니다. 사회가 불안하고 어려울수록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위기를 지혜롭게 관리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고르바초프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개혁과 개방 정책을 펼쳐나갈 때입니다.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군부에서 반대시위를 벌이면서 탱크를 몰고 왔습니다.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그 때 고르바초프는 군부의 위세에 눌렸는지 숨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때 보리스 옐친이라는 지도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군대의 탱크 위에 올라서서 군부를 설득하고 국민을 안심시켰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급락하고 옐친의 인기는 급상습 했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소련의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위기관리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위기는 기회가 된다. 도전의 기회요, 변화의 기회요, 성장의 기회다.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된다. 위기는 가정에도 찾아오고, 사업에도 찾아옵니다. 회사에서 갑작스러운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자녀가 대학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남들은 성공했다고 칭찬하지만 불쑥 불쑥 찾아오는 실존적 허탈감에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가 바로 위기관리능력이 필요한 때이다. 그 위기를 잘 수습하면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됩니다.

1. "그 즈음에 ...병들어 죽게되니"(1절)
히스기야는 성경의 역대 왕들 중에서 몇 안되는 신실한 왕입니다. 그런 히스기야에게 예기치 못했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절에 "그 즈음에"라고 했습니다. 그 즈음이란 히스기야의 통치 14년, 나이 39세입니다. 히스기야로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때이다.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국가적인 위기를 이겨낸 바로 그 때이다. 그 때 히스기야에게 죽을 병이 찾아왔다.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는 찾아와 히스기야에게 죽을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청천하늘에 날 벼락같은 일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10절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제 들어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그렇다. 이제 가정도 자리가 잡혀가고 직장에서도 자리가 잡혀가는 때입니다. 한창 때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가 찾아옵니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키워놓고 이제 오손 도손 재미있게 살아 볼만 할 때입니다. 그런데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갑니다. 이런 위기가 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입니다. 애써 부인하고 회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분노를 느낍니다. 화를 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왜 하필이면 나야?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거냐? 원망합니다. 내가 왜 여기서 주저앉아야 하는 거야! 그럴 순 없어! 이건 말도 안돼! 이럴 순 없어! 이렇게 사는 삶은 지옥같은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체념하여 자포자기합니다. 움추립니다.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내 복이 이것밖에 안는구나 하며 포기합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지울 수 없는 패배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직면하여 현실을 받아들이고 싸우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그런 실패가 찾아 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똑바로 쳐다봅니다. 그리고 싸워 나갑니다. 히스기야가 그랬습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산헤립을 데려가셨으면 됐지, 왜 나까지 끌고 가시는거야? 이건 말도 안돼하면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거 잘못된 거 아닙니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체념하고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닥친 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문제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를 직면한 것입니다. 직면하는 것, 이것이 위기가 왔을 때 믿음의 사람이 취해야할 행동입니다.

중년이 되면 병원에 가는 것에 겁을 냅니다. 혹시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직면하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병을 키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가 찾아 왔을 때 직면하는 사람입니다. 흰머리가 하나 둘씩 늘어납니다. 주위 친구들이 흰머리가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건 "흰머리가 아니고 세치"라고 우겨봅니다. 그렇게 우긴다고 쉰머리가 세치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기는 것은 직면하는 것이 싫은 겁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에게 밀어닥친 위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합니다. 시험에 떨어진 것은 떨어진 겁니다.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한 건 당한겁니다. 부인한다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망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과감하게 직면하는 겁니다.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살고 죽습니다. 머리털 하나 들고 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죄를 짓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부끄러울 일도 재수 없는 일도 아닙니다. 숨길 일이 아닙니다. 덮어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도, 우리의 고통도 사용하십니다. 유익하게 만드십니다. 한동안은 뒤지는 것 같습니다. 퇴보하는 것 같습니다. 희망을 잃은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도 실수도 쓰십니다. 하나님안에서 모든 것이 유익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1-13) 직면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피하지 말고 그 문제를 인정하고 똑 바로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기서부터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겁니다. 신앙이란 삶을 해석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깊다는 이야기는 어떤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고 그 일을 소화시켜내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2.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2절)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왕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면 약을 구한다 명의를 찾는다고 아마 나라 전체가 떠들석할만큼 야단법석일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어의를 불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명의를 찾아오라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신하들을 불러 약을 구하라 닥달을 하지도 않았다. 그의 행동이 인상적이다. 2절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 그는 지금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했습니다. 이제 뚤린 곳은 하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안에서 해답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길을 찾고 뜻을 찾아내겠다는 고집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낫고 낫지 않고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 믿음이 귀합니다. 우리에게 위기가 찾아 왔을 때,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당당하게 대담하게 하나님과 대면하고 마주 앉아야합니다. 하나님이 해답을 주실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다는 결연한 신앙으로 하나님과 마주앉아야 합니다. 링컨 대통령의 어머니 낸시는 링컨이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가 남긴 유언은 간단했습니다. "아들아, 매일 성경을 묵상하라. 위기가 닥칠 때에는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으라" 위기가 왔을 때, 더욱 기도해야합니다. 더욱 애타게 하나님을 찾읍시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실로 간절하고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얻은 답이 아닙니다. 그 기도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15절에 히스기야는 이를 영혼의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내 영혼의 고통을 인하여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15절)

육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더 힘든 싸움은 영혼의 고통이었다. 패배감, 불쑥 불쑥 찾아오는 좌절감, 순간 순간 엄습해오는 찾아오는 낙담과 무력감 ...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다보면 때로는 칠흙같이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이라 불려지는 수도자는 이를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했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주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주님이 내 곁을 떠나신 것은 생각에 영혼이 캄캄한 어두움에 휩싸입니다. 무력감이 찾아 옵니다. 좌절감이 몰려옵니다. 오스왈드 샌더스의 말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풀이 죽게 하거나, 압박감을 느끼게 하고, 의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낙심도 시키는 사탄의 철저한 억압을 극복해야 한다" 사단은 우리가 기도하다가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적당히 기도하다가 패배감에 사로잡혀 기도를 그만 두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멈추게 하는 기도는 멈추고도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단이 멈추게 하는 기도는 우리에게 패배의식을 남겨줍니다. 그것은 영적 생활에서 쓴뿌리가 되고 상처가 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아야 합니다. 패배의식이 찾아오면 찾아올수록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아야 합니다. 애타게 찾아야 합니다. 결과를 미루어 짐작하거나 단정하는 것은 신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의지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하나님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3.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5절)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역사를 통치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우주적인 하나님입니다. 히스기야는 37장에서 강대국 앗수르의 왕 산헤립을 들었다 놓았다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영광스럽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미지는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치밀하고 너무 친숙한 하나님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치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경영하시고 통치하시는 우주적인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기를 맞이하는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빌2:7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신학자들은 이 하나님의 모습을 "비천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있고 싶어서 비천해 지셨습니다. 우리 가까이 계시기 위해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내 곁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친근한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본문 5절에서는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히4:15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시는 자가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요, 우리의 연약한 사정을 알아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기도는 통곡의 기도요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3절 " ... 심히 통곡하니" 5절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은 눈물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기 위한 간절한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아오셔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그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난 자리에서 흘리는 감격의 눈물도 있었다. 눈물이 있는 신앙, 감동이 있는 신앙입니다. 그 눈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머리를 차갑고 가슴은 뜨거워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뜨거움을 잃어 가는데 있습니다. 열정이 식어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열정이 식어가고 눈물이 말라갈 때, 우리는 위기를 수습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잃게 됩니다. "종교가 쇠락하는 것은, 밖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종교 자체가 터무니없고 흐리멍텅하고 억지스럽고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이 쇠퇴하고 우리의 영성생활이 비틀거리는 이유는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 밀어닥친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눈물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몰래 돌아서서 붙들고 울 수 있는 기둥입니다. 남몰래 흘리는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을 붙잡고 힘겨운 문제를 직면하면서 또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마주 대면하면서 가정의 위기, 사업의 위기, 인생의 모든 위기를 헤쳐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을 붙잡고 불쑥 찾아와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인생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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